제95화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아귀가 차를 앞뒤로 막고 있는 남자들을 보며 싸늘하게 말한다.
“생각이라는 게 없나? 그쪽이 우리 아 치었잖아. 사람을 치었으면 보상을 해야지.”
말투를 듣고 상대가 조선족임을 안 아귀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진다.
“무슨 보상?”
“여기 보라. 빨갛잖니. 내일이면 피멍 들어. 그러니 치료비를 내라.”
“치료비? 얼마 주면 되는데?”
“아프기도 하고 당장 일도 못 할 테니. 그래. 천만 원이면 되겠네. 천만 원 내라.”
아귀가 남자를 보며 웃는다. 잔뜩 뒤틀린 웃음이었다.
“천만 원? 크크, 돈 벌기 참 쉽다. 그치? 그런데 그거 아나? 나는 지금까지 누군가한테 삥을 뜯어는 봤어도 뜯긴 적은 없어. 알겠어?”
스릉-
품속에서 빠져나온 아귀의 손에 날이 시퍼렇게 선 칼 한 자루가 들려있다.
“자 귀엽다. 그렇지 않니?”
남자가 동료들을 보며 웃는다. 그리고는 뒷 춤에서 커다란 칼, 정글도를 꺼낸다. 동료들 역시 기다렸다는 듯 정글도며 도끼 같은 무기들을 꺼낸다.
아귀가 씨익 웃는다.
“재미있겠다. 그치?”
먼저 움직인 것은 아귀다. 상대의 수가 네 명이나 되지만 아귀는 조금도 겁을 먹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정글도가 수직으로 떨어져 내린다. 상대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무서운 무기임에도 망설임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귀는 정글도를 피하며 빠르게 손을 앞으로 뻗는다.
“컥-.”
한 명이 허벅지를 움켜쥐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서다 쓰러진다. 아귀가 자세를 낮추자 머리 위로 도끼가 지나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칼을 역수로 쥐고 벤다.
다시 한 명이 종아리를 잡고 쓰러진다. 남은 두 명이 빠르게 뒤로 물러선다. 피로 물든 칼을 들어 올리며 아귀가 묻는다.
“왜 그래? 벌써 쫀 거야? 이제 막 재밌어지려고 하는데? 안 들오면 내가 들어간다?”
퍽-
달려들던 아귀가 옆으로 날아가 벽에 부딪힌다. 살기가 일렁이는 눈을 희번덕이며 아귀가 몸을 돌린다. 그곳에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검은 정장에 흰 와이셔츠를 입은 인호였다.
“만나서 반가워.”
“하, 하하. 씨발. 너였냐? 니가 쟤들한테 나 찾으라고 시킨 거야?”
“시키지는 않고 부탁은 했지.”
아귀가 칼을 위협적으로 휘두른다.
“지난번에 내가 도망쳤다고 아주 우스워 보이지?”
“전혀.”
기생령이 붙은 사람이 평범할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지랄이야!”
아귀가 분노를 담아 외친다.
인호가 별일 아니라는 듯 짧게 대답한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니까.”
“시발. 한국에 사채업자가 나 한 사람뿐이야? 왜 나한테만 지랄이냐고.”
사채업자들은 많다. 하지만 기생령을 달고 다니는 사채업자는 아귀뿐이다.
“너한테 돈 빌린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왜 내 인생만 이렇게 가혹하냐고. 그런 사람들 어떻게 했어? 조금 전 칼 쓰는 것 보니 여럿 보냈을 것 같은데?”
“유도심문하는 거야? 뭐 녹음기라도 가지고 있어? 그런데 어쩌나? 내가 눈치가 십팔 단이야. 그런 수작에 넘어갈 것 같아?”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 사람들 눈에서 피눈물까지 뽑아냈겠지.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겠네.”
인호의 말이 끝날 무렵 아귀가 몸을 날렸다. 뭔가 번쩍한다 느끼는 순간 눈앞에 칼날이 다가온다. 정확히 인호의 목을 노리고 있다.
인호가 슬쩍 몸을 틀고는 아귀의 손목을 향해 팔을 뻗는다. 황급히 칼을 회수한 아귀가 이번에는 배를 향해 칼을 찔러온다.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아귀의 팔을 발로 찬다. 아귀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진다. 아귀가 계속해서 인호를 향해 칼을 뻗는다.
하나, 하나가 모두 치명적인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공격이다. 조선족들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인호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의도가 담긴 공격이다.
인호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칼맛이 어때? 시큼하지?”
결국 아귀의 칼에 왼쪽 팔을 베이고 만다. 인호가 고개를 좌우로 꺾는다.
“칼맛은 모르겠고 네 덕에 정장은 새로 사야겠다. 죄목이 하나 늘었다. 내가 정말 아끼던 정장이었거든.”
인호가 자세를 낮추며 아귀에게 쇄도한다. 아귀가 칼로 견제한다. 목을 향해 날아드는 칼을 손등으로 쳐내고 그대로 아귀의 가슴을 어깨로 들이받는다.
짧은 신음과 함께 뒤로 물러서는 아귀. 인호가 그런 아귀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따라붙는다. 발로 아귀의 하체를 공격한다. 아귀가 발을 들어 방어하려 하지만 속임수 동작이었다.
퍽-
인호의 주먹이 아귀의 얼굴에 틀어박힌다. 아귀가 고개를 흔들며 뒤로 물러선다.
“주먹이 제법 맵네.”
“칭찬 고마워.”
벽을 밟고 그 반동을 이용해 인호를 향해 빠르게 다가서며 칼을 찌른다. 인호가 아귀의 손목을 낚아채 유도의 업어치기 기술로 지면에 메다꽂는다.
“컥-!”
시멘트 바닥에 등 먼저 떨어진 아귀가 고통에 몸부림친다.
챙-
인호는 아귀의 칼을 멀리 차버린다.
으득-
그 다음 아귀의 한쪽 발목을 으스러져라 밟아버렸다. 아귀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지만, 인호는 남은 다리와 팔마저 부러트려 버린다.
“크아악-!”
“아파? 지금까지 너한테 돈 빌린 사람들은 더 아팠을 거다. 네 별명이 아귀라고 했지? 별명을 아주 잘 지었어. 평생을 탐욕스럽게 산 자가 죽어 아귀가 된다.”
빠각-
인호가 아귀의 턱을 후려쳐 기절시킨 후 그를 들쳐메 차에 싣는다. 트렁크를 여니 입에 재갈을 물고 사지가 묶여 있는 중년의 여자가 있다.
김은주의 어머니 송연화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재갈을 풀어주자 송연화가 엉엉 울기 시작한다.
“전 나쁜 사람 아닙니다. 은주 씨가 보내서 온 사람이에요.”
“우리 은주는 멀쩡해요?”
“네. 괜찮습니다. 안전한 곳에 있어요.”
송연화를 조수석에 태운 후 차를 출발시킨다.
* * *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가 보면 알아.”
“너 경찰 아니지? 그냥 자수할 테니 경찰서로 데려다줘.”
“자수? 뭐 잘못한 것 있어?”
“그 아줌마 납치했잖아. 자수한다고!”
인호가 고개를 흔들며 조수석에 꽁꽁 묶여 있는 아귀를 보며 웃는다.
“넌 지금까지 사람들이 하는 부탁 모두 들어줬냐?”
“…….”
“그리고 나쁜 곳에 가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딜 가는데?”
인호가 아귀의 머리 위쪽을 바라본다. 검은 기운이 두려운지 계속해서 떨고 있다. 자의식이 없음에도 인호의 강한 기운에 반응하는 것이다.
“너한테 뭐가 붙은 건 알고 있냐?”
“무슨 헛소리야?”
“그래. 몰랐을 거야.”
기생령의 존재를 자각하는 이들은 흔치 않다. 이민정처럼 귀문이 열린 이들이라고 해도 기생령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이들은 손에 꼽았다.
“너한테 붙은 것 좀 떼어 내려고.”
“나한테 뭐가 붙었다고 그래?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설마 죽이려는 거냐?”
“내가 너 같은 줄 알아? 얌전히 있어라. 볼일 마치면 너 좋아하는 경찰서에 보내 줄 테니까. 아참, 네 부하들 다 잡혔다. 걔들이 아주 충성심이 강하더라. 보스 더 이상 죄짓지 말고 교도소에서 얌전히 살라고 지금까지 네가 잘못한 것 다 불었다고 하네.”
“이런 씨발…….”
인호가 차를 세운다.
“너 아주 나쁜 놈이더라. 높은 이자로 돈 빼앗고, 그 다음은 집 빼앗고, 그 다음은 목숨까지 빼앗았던데.”
“왔냐?”
목적지에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이가 인호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린다.
“일찍 오셨네요.”
“누구 부탁이라고. 하하, 그 사람이야?”
“네.”
차에서 끌려 내린 아귀가 기다리고 있던 남자를 보며 의아한 듯 말한다.
“신부?”
“신부님이라고 불러라. 영광인 줄 알아. 아주 유명하신 분이다.”
박주완이 피식 웃는다.
“유명하긴. 그나저나 나는 잘 모르겠는데?”
“신부님이 상대하신 악령들과는 다르니까요. 기생령이라고 이 녀석에게 빌붙어 사는 존재에요.”
“그래? 아, 인사해. 오늘 구마 의식을 보조해 줄 미카엘 신부님이셔.”
인호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미카엘 신부가 웃으며 손을 내민다.
“스테파노 신부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조현민이라고 합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아귀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뭐 하자는 개수작이야!”
“좀 시끄럽네.”
박주완이 웃으며 아귀에게 다가선다.
“사람들은 신부가 착한 일만 하는 줄 알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그래야 하지. 하지만 꼭 모두 신부가 그런 것은 아니야. 듣기로 아주 나쁜 놈이라고?”
“그래서 뭐 어…….”
빠각-
박주완의 주먹이 아귀의 턱을 돌려놓는다.
“후우-. 이제 조용해졌네.”
“여전히 과격하시네요.”
“이런 녀석들한테만.”
“하긴-. 그 무식한 십자가로 때리지 않은 게 어디에요.”
“무, 무, 무식한 뭐? 야! 그거 성물이야.”
“네, 네.”
인호가 박주완 뒤에 있는 허름한 창고 건물을 보며 묻는다.
“저 안에서 하실 거예요?”
“이미 준비는 다 해 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박주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아귀를 들쳐 매고 조현민과 함께 창고 안으로 들어간다.
“후우-.”
인호가 박주완에게 아귀의 구마 의식을 부탁한 이유는 이대로 교도소에 보내게 되면 그 안에서 또 다른 나쁜 짓을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기생령으로 얻은 힘은 기생령이 떠나게 되면 사라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고통을 겪게 되겠지만 평생 기생령을 달고 사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인호가 아귀를 잡으려고 노력한 이유는 김명호의 부탁을 받아 김은주를 돕겠다는 의도도 있었지만, 아귀에게 붙은 기생령을 떼어 내려는 목적이 더 강했다.
이대로 방치해 기생령이 더 강한 힘을 얻게 되면 아귀는 강력한 힘으로 더 나쁜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다.
창고 안쪽에서 아귀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유리창을 통해 흰빛이 번쩍이곤 한다. 구마 사제들이 지닌 힘, 성력이다.
박주완의 기도문이 들린다. 기도문이 절정을 향해 갈수록 아귀의 비명은 더욱 처참해진다.
“이번에도 한 건 했네요.”
“으악-!”
갑자기 들려오는 여자의 음성에 인호가 화들짝 놀란다.
“아-, 제발 조옴! 깜빡이 좀 키고 들어오세요. 부장님.”
부장이 환하게 웃고 있다.
“인호 씨 정도라면 제가 온 것 정도야 금방 눈치챌 줄 알았죠.”
“아니거든요. 방금 심장마비 걸릴 뻔했거든요. 이러다 저 잘못되면 부장님이 책임지실 거예요?”
부장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인호의 어깨를 두드린다.
“명부에 있는 인호 씨 초는 아직 많이 남았어요. 절대 심장마비 따위로 죽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전혀 위로가 안 됩니다.”
“위로하려고 한 말 아니에요.”
“그런데 갑자기 왜 오신 거예요?”
“열심히 일한 인호 씨를 위한 격려 차원?”
인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하, 하하. 그 말을 저더러 믿으라고요?”
“좀 믿어줘요.”
인호가 여전히 묘한 눈으로 바라보자 부장이 어깨를 으쓱한다.
“상제의 전언이 있어요.”
“…….”
인호의 눈빛이 거세게 떨린다.
하는 일 때문에 옥황상제, 혹은 염라대왕이라 부르는 존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어쩌면 인호의 남은 생을 결정지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그였다.
“잘하고 있어.”
“네?”
“들은 그대로예요.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셨어요.”
인호가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부장이 먼저 말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열심히, 잘하라고 하셨어요.”
“열심히-, 잘-.”
인호가 피식 웃는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