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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 흥신소-92화 (92/190)
  • 제92화

    “이번 시험 내신에 반영되는 중요한 시험인 거 알지? 준비 많이 했을 거라고 믿는다. 시험 잘 봐라.”

    담임 선생님이 나가고 학생들은 곧 시험을 볼 준비를 한다. 박선주는 눈을 감은 채 손가락 사이의 샤프를 돌린다.

    “선주야. 공부 많이 했어?”

    “내가 너니? 시험은 평소 실력으로 보는 거야.”

    친구가 ‘그렇지’하며 웃는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박선주가 잠도 자지 않고 공부를 했다는 것을.

    박선주는 성적에 대한 집착이 유난히 강했다.

    작년 전교 1등을 하던 김정아를 괴롭힌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시험이 시작된다.

    박선주는 어렵지 않게 문제를 푼다. 학원 1타 강사의 수업보다 질이 높은 학교 과목 선생들의 족집게 과외를 받은 탓이다.

    과외를 해 준 선생들이 직접 문제를 냈으니 어려울 것이 없다.

    다만…….

    “아, 씨발.”

    박선주가 작게 욕지거리를 뱉어낸다. 딱 한 명이 문제다.

    수학 선생은 교장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과외를 해 주지도 않고 예상 문제를 찝어 주지도 않았다.

    공부를 잘하는 편이기에 대부분의 문제는 어렵지 않게 풀었지만 걸리는 문제 몇 개가 있다. 공식을 대입해 풀었지만 정답인지 의심이 된다.

    “후우-.”

    샤프로 답을 체크하려 할 때였다.

    박선주는 이상하게 추위를 느꼈다. 창백한 푸른 기운이 품은 손 하나가 박선주의 어깨를 감싼다.

    그리고 누군가 박선주의 귀에 속삭인다.

    - 12번 답은 3번이야.

    소리를 지르려 하는데 입에 떨어지지 않는다.

    - 3번이라니까? 빨리 체크해. 그래야 전교 1등 되지.

    박선주가 손이 아래로 내려가 3번을 체크한다. 어깨를 감쌌던 손이 스르륵 사라진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박선주가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었다. 시험 중에 할 행동은 아니었지만 시험 감독을 하던 선생은 모른 척 딴청을 피운다.

    박선주는 잠을 자지 않아 피곤함 때문에 자기가 뭔가 착각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다시 문제를 푼다.

    다시 막히는 문제가 있었다. 문제를 푼 후 답을 체크하려 할 때였다.

    - 19번 답은 1번이야.

    다시금 느껴지는 싸늘함. 그리고 귀에 들려오는 음성.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눈동자만을 움직여 옆을 본다.

    “꺄아아악-!”

    그곳에는 고개가 옆으로 삐딱하게 꺾여 있는, 푸른 기운을 품고 있어 차가워 보이는 얼굴이 있었다.

    망령, 김정아가 웃으며 말한다.

    - 뭐해? 19번 답은 1번이라니까?

    * * *

    박성택은 조춘수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아 초조해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 사무관들에게 괜한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휴대폰으로 최신 뉴스 기사를 검색하기도 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온다.

    박성택은 들어선 남자를 보는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최근 들어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저승사자 불리는 서울중앙지검 정재훈 부장 검사였다.

    “박 의원님 안녕하세요.”

    “하, 하하. 정 검사님 아니십니까? 국회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볼 일이 있어서요.”

    “검찰이 국회에 볼 일이라. 무슨 일인지 궁금하네요.”

    긴장을 감추며 최대한 태연한 척 행동한다.

    “궁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금방 알게 되실 테니까요.”

    정재훈이 한걸음 옆으로 비켜서자 유 형사가 몇몇 형사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박성택이 빠르게 말한다.

    “무슨 이야기 듣고 오신지 모르지만 나 현역 국회의원이에요. 불체포특권 있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알지요. 그런데 불체포특권에 대해 자세히 아세요?”

    “…….”

    “국회의원은 현행범이 아닌 한 회기 중 국회의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이 되지 않는다. 회기 전이라 해도 체포, 또는 구금이 되었다 해도 국회의 요구에 의해 석방될 수 있다.”

    정재훈이 또박또박 말한다. 그리고 유 형사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린다. 유 형사가 수갑을 꺼내 앞으로 나선다.

    “그런데 박 의원님은 아쉽게도 현행범이 시네요. 박성택 씨. 살인교사 혐의로 체포합니다. 변호사를 선임할 수 …….”

    유 형사가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고 있을 때 박성택이 황급히 외친다.

    “살인교사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미 증거는 차고도 넘칩니다. 조춘수도 증언했고, 김문수 씨 죽이려고 갔던 용의자들도 현장 체포되어 모두 진술했습니다. 이제 됐지요?”

    박성택이 뭐라뭐라 발악하듯 고함을 빽빽 내지르며 유 형사와 형사들에게 끌려 나간다.

    정재훈이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간다.

    “불체포특권? 하, 하하. 어이가 없네. 법을 그렇게 좋아하면 지키면 되잖아.”

    * * *

    임현주는 재단 이사장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 날벼락을 맞고 말았다.

    “임현주 이사장님 되시죠?”

    “당신들 누구야?”

    갑자기 들이닥친 일단의 무리들을 보며 임현주가 빽하고 소리를 지른다.

    “내가 누군지 알아? 우리 남편이 누군지 아냐고!”

    “네, 네. 잘 알죠. 박성택 의원님 아내분 되시잖아요.”

    “그걸 알고도…….”

    “잘 아니 이러죠. 참 나쁜 짓 많이 하셨습니다.”

    유 형사가 체포 영장을 앞으로 내민다.

    “법원에서 정식으로 발부된 체포 영장, 압수수색 영장입니다. 임현주 씨는…… 뭔 죄목이 이렇게 길어. 기니까 잘 들으세요. 공금횡령, 배임, 정치자금법 위반, 뇌물 수수, 공문서 위조, 사학법 위반 등의 열두 항목에 의해 도주,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어 긴급 체포되시는 겁니다.”

    “내가 누군지…….”

    “아, 거참 안다니까요? 그러니까 순순히 가세요. 그렇게 자랑스러워하시는 남편분도 지금 서울중앙지검으로 가셨거든요. 부창부수라는 말 아시죠? 참 잘 어울리는 부부시네요.”

    유 형사가 고개를 까딱이자 다른 형사가 임현주를 끌고 간다. 유 형사가 이사장실을 둘러보며 말한다.

    “하여튼 빌어먹을 나라. 어떻게 나쁜 놈들은 죄다 이렇게 잘 살아. 에라이.”

    * * *

    “정아야. 우리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인호는 오늘 낮에 김정아로 추정되는 망령이 나타났다는 교실에 있었다.

    “나 나쁜 사람 아니야. 너희 부모님 잘 아는 사람이야. 아참, 박선주 부모님 오늘 검찰에 끌려갔다. 엄마, 아빠 믿고 너 괴롭혔던 박선주 이제 완전히 끈 떨어진 연 됐어.”

    인호가 천천히 몸을 돌린다. 교실의 뒷문에 김정아가 서 있다.

    “이리 와.”

    인호가 부르자 김정아가 천천히 다가온다.

    “너 신기한 재주 있더라? 어떻게 흔적을 안 남겨? 보통은 흔적이 남거든.”

    “잘 몰라요. 살아 있을 때도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그랬나 보죠. 그런데 조금 전 그 말 무슨 말이에요? 선주 부모님이 왜 끌려가요?”

    “선주 아빠는 너희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어. 살인교사 혐의로 체포 된 거지. 그런데 그거 말고도 죄가 아주 많더라. 그래서 처벌을 세게 받을 거야. 그리고 선주 엄마는 너도 아는 것처럼 이것저것 나쁜 짓 많이 했어. 마지막으로 널 괴롭혔던 박선주.”

    인호가 휴대폰을 꺼낸다.

    - 아니면 뭐? 너도 정아처럼 되고 싶어서 그래? 응? 자살할 때까지 괴롭혀 줄까? 지금은 내가 아주 착하게 대해주고 있잖아. 한 달에 50만 원 주는 거? 그거 어려운 일 아니잖아. 가끔 나 대신 봉사 활동 나가는 거? 그가 다른 애들도 다 하는 일이잖아. 내가 정아처럼 나체 사진을 찍었니, 아니면 담배빵을 놨니? …… 그러니 잘하자. 나도 너처럼 착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거든.

    김정아의 영혼이 거세게 흔들린다.

    - 정아 그년 죽었으니 오빠들한테 동영상 풀라고 할까? 그거 돈 좀 되지 않을까?

    인호가 김정아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진정해. 나쁜 생각하지 말고. 지금까지 잘 참았잖아.”

    죽은 지 1년이 넘었다. 그간 이곳에 계속 있었다면 박정아에게 복수할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미성년자라 큰 처벌은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이 남게 되겠지.”

    “왜 절 도와주세요?”

    “너희 부모님이 부탁하셨거든. 특히 아버지는 내게 고개까지 숙이면서 부탁하셨어. 제발 도와 달라고.”

    김정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설마 지금까지 박선주에게 아무 짓도 안 한 이유가 부모님 때문이야?”

    김정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선주에게 나쁘게 하면 그 애 부모님이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들을 괴롭힐 것 같아서요.”

    “하아-.”

    죽어서도 부모님과 남은 동생들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감사합니다. 미경이한테도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직접 말해.”

    인호가 턱으로 한 곳을 가리킨다. 교실의 앞문에 손미경이 서 있다. 인호가 손짓을 하자 손미경이 다가온다. 그녀의 어깨를 툭 친다.

    “저, 정아?”

    “그래. 미경아. 나야.”

    “정아야!”

    손미경이 김정아를 안아보려 하지만 허무하게 그녀의 몸을 통과하고 만다.

    “미경아 고마워.”

    “아니야. 내가 미안해. 우린 친구인데. 나보다 널 더 괴롭히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괜찮아. 나라도 그랬을 거야. 정말 괜찮아.”

    인호는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를 놔두고 교실을 벗어난다. 교실 앞에는 뚱보가 서 있었다.

    “시간을 조금 더 줘라. 부모님도 뵙지 못하고 가는데 친구하고라도 회포를 풀어야지.”

    * * *

    공원을 거닐며 인호가 피식 웃는다.

    - 극락 고등학교, 정인호.

    “극락 고등학교는 뭐냐? 차라리 저승 고등학교라고 하지.”

    집 침대 위에 걸린 교복이 떠오른 것이다.

    “좋은 곳으로 갔다니 다행이네.”

    김정아를 저승까지 안내하고 돌아온 뚱보가 환하게 웃으며 극락으로 갔다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김정아의 부모님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지만, 천기를 누설하는 것이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날씨가 많이 싸늘해졌네.”

    옷깃을 여미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한 시간가량 걸은 후 벤츠에 앉는다. 왼쪽을 힐끔 쳐다본 인호가 말한다.

    “왜 자꾸 따라다니시는데요.”

    인호가 앉은 벤츠 옆에 정장을 입은 중년의 망령이 서 있다.

    “자네가 이 근처 망령들에게 유명하다지?”

    “칭찬으로 들리지는 않네요.”

    “억울한 망령들에게 도움도 준다고?”

    “돈 안 되는 일은 사절입니다.”

    망령이 어색하게 웃고는 딴청을 피운다. 답답함을 느낀 인호가 망령에게 묻는다.

    “왜 그러시는데요?”

    “이봐. 내가 아주 참한 아가씨를 한 명 알고 있는데.”

    뒷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게 내 딸이야. 뭐 이런 이야기는 아니죠?”

    망령이 또 딴청을 피운다.

    “내가 살다 살다 망령이 중매를 서는 경우는 또 처음 보네요.”

    “내가 이렇게 생겼지만 우리 딸은 엄마 닮아서 정말 예쁘다니까.”

    “그러니까 곱게 키운 예쁜 딸을 왜 저한테 소개해 주려고 하는데요? 저도 제가 잘생긴 편은 아니라는 걸 잘 알거든요.”

    망령이 반대편을 보고는 은근한 투로 묻는다.

    “공원 앞에 세워놓은 차, 자네 것 맞나?”

    “하, 하하. 설마 제가 돈 많은 사람처럼 보여서 그래요?”

    “꼭 그렇다기보다는…… 딱 봐도 책임감 있게 생겨서 그렇지. 남자라면 모름지기 책임감이지.”

    “그렇게 책임감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어쩌다가 먼저 가셨습니까? 딱 봐도 지병이 있어 가신 건 아닌 것 같은데.”

    “교통사고였어.”

    “일없습니다. 다른 돈 많은 사람 찾아보세요.”

    인호가 일어나 걸음을 옮긴다. 걷던 인호가 멈춰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한다.

    “됐다니까요.”

    “지금 우리 딸이 저기 오고 있는데…… 미안하지만 집까지만 바래다주면 안 될까?”

    “거참 집요하시네.”

    인호가 몸을 돌린다.

    안절부절못하는 망령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로 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다. 뭔가 불안한지 뒤쪽을 힐끔거리고 있다.

    그 여자의 뒤를 본 인호가 가볍게 목을 비튼다.

    “도대체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도와는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인호의 시선은 여전히 여자의 뒤에 고정되어 있다.

    “그러게요. 갑자기 이유가 생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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