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강서구 3선 국회의원 박성택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앞에 서 있는 김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산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서울에는 왜 온 거야? 일이 있으면 빨리 처리하고 갈 것인지 나한테 연락은 왜 해?”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김문수는 이를 꽉 깨물고 참았다.
“일하는 곳에 문제가 있습니다. 기존에 있던 직원들 텃세가 굉장히 심합니다. 저보다 직급이 낮은 직원들도 절 무시합니다.”
“그런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거 아니야? 자기가 못나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을 왜 나한테 와서 하소연을 하냐는 말이야.”
“부산 의원님하고 친하신 것 알고 있습니다. 한마디만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박성택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 정아가…….”
쾅-!
박성택이 책상을 세게 내려친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자살한 딸 이야기를 왜 꺼내?”
“정아의 죽음이 알려지면 재단의 이미지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흥!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자네가 저지른 비리는? 그 알량한 공무원 옷도 벗고 싶어서 그래? 당장 전화 돌릴까?”
“네, 그러십시오.”
김문수의 반응에 박성택이 눈을 가늘게 뜬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작년에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하고 부산으로 내려간 김문수가 이렇게 뻗댈 수 없으리라.
“지금 그런 자세 참 마음에 안 들어.”
“저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뭘 알고 있는데? 잘 생각하고 말해야 할 거야. 자네가 알고 있는 무언가가 과연 내 목줄을 잡고 흔들 수 있겠어?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장담하지. 자네가 가진 모든 것이 해변의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거야. 아내와 자식들도 비루한 삶을 살게 되겠지.”
김문수가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 박성택에게 건넨다. 종이를 펼친 박성택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어디서 구했지?”
“그런 것도 말씀드려야 합니까?”
“이건 나 하나 죽고 끝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여기 관련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나? 누구 하나 지우는 것에 죄책감 같은 걸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야.”
김문수는 말없이 박성택을 바라본다. 그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돌아가 있어. 곧 연락하지.”
김문수가 고개를 숙인 후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박성택이 묻는다.
“바로 부산으로 내려 갈 건가?”
“아닙니다.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서 술 한잔하기로 했습니다. 부산은 내일 내려갈 겁니다.”
“알겠어.”
김문수가 사라지자 박성택이 어디론가로 전화를 건다.
“어, 나야. 해 줘야 할 일이 하나 있는데.”
* * *
손미경은 4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곧바로 매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몇 가지를 구입해 따로 떨어져 있는 체육관으로 들어간다.
체육관의 비품을 보관하는 창고 안은 일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바로 간다고 갔는데 줄이 조금 있어서.”
손미경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하자 박선주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됐고. 사온 거나 내놔.”
손미경이 손에 든 봉투를 건네자 박선주가 내용물을 확인하다 빽 소리를 지른다.
“왜 이것밖에 안 돼?”
“앞에 애들이 먼저 사가서…….”
“아, 씨발. 이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니가 매점 쏜다고 해서 우리 밥도 안 먹었어. 고작 이거 먹고 배고파서 공부 못하면, 그래서 성적 떨어지면 니가 책임질 거야?”
손미경이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문다. 그 모습을 본 박선주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왜? 기분 나빠?”
“아, 아니야. 기분 안 나빠.”
“그런데 왜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일까? 분해서 죽을 것 같아? 당장 우리들 죽여 버리고 싶지?”
“정말 아니야.”
박선주 주변의 일진들이 피식 웃는다. 박선주의 본격적인 괴롭힘이 시작되려 함을 아는 것이다.
“자-, 때려봐.”
박선주가 얼굴을 내민다. 손미경이 한걸음 물러선다.
“왜? 때리고 싶잖아. 정말 괜찮아. 보복 같은 거 안 할 테니까 그냥 때려. 평소에 때리고 싶었을 거 아니야.”
“아니야. 정말 아니야.”
“때려보라니까?”
박선주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하더니, 그대로 손미경의 뒷머리를 잡아챘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미경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찰싹- 찰싹-
“선주야. 적당히 해. 그러다 선생님한테 이를라.”
“이르라지.”
어머니가 재단 이사장이다. 학교 선생들 모두 박선주의 눈치를 봐야 했다.
“미경아.”
“으, 응.”
“잘 하자?”
“알겠어.”
짝-
박선주는 기어코 손미경의 뺨을 한 대 더 때린 후 잡고 있던 머리채를 놔준다.
“정말 잘 해야 할 거야. 정아 그년이 왜 죽었는지 알지?”
“…….”
“그 괘씸한 것이 허락도 없이 자살해? 내가 얼마나 예뻐해 줬는데.”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은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정아는…….”
손미경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입을 닫는다.
“정아가 왜? 말을 하려면 끝까지 해? 내가 죽은 애 얘기하니까 기분 나빠? 너랑 정아랑 제일 친했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그건 아닌데.”
“아니면 뭐? 너도 정아처럼 되고 싶어서 그래? 응? 자살할 때까지 괴롭혀 줄까? 지금은 내가 아주 착하게 대해주고 있잖아. 한 달에 50만 원 주는 거? 그거 어려운 일 아니잖아. 가끔 나 대신 봉사 활동 나가는 거? 그가 다른 애들도 다 하는 일이잖아. 내가 정아처럼 나체 사진을 찍었니, 아니면 담배빵을 놨니?”
손미경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박선주가 웃으며 말한다.
“그러니 잘하자. 나도 너처럼 착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거든. 그만 가봐.”
손미경이 고개를 끄덕이고 창고 밖으로 나간다. 나가기 직전 박선주가 말한다.
“정아 그년 죽었으니 오빠들한테 동영상 풀라고 할까? 그거 돈 좀 되지 않을까?”
* * *
김문수는 서울에 오랜만에 올라왔기에 친구들에게 연락해 술자리를 가졌다. 친구들에게는 지방으로 발령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이사 갔다고 이야기해 둔 상태였다.
친구들과 2차에 걸쳐 제법 많은 술을 마신 후 예약해 둔 모텔로 향했다. 모텔로 들어가 객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문을 닫으려는데 누군가 문을 확 잡아당긴다.
“누, 누구-.”
퍽-
김문수의 몸이 뒤로 밀려나다 침대에 부딪혀 쓰러진다. 두 명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근다.
“아유-, 술을 얼마나 드셨길래 몸까지 못 가눠요?”
“누, 누구십니까?”
“우리가 누군 게 중요해요? 잠시 후 김문수 씨가 어떻게 될지가 중요하지.”
남자가 말을 하며 품속에서 주사기와 액체가 담긴 앰플을 꺼낸다. 그러자 다른 남자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웃는 낯으로 말한다.
“괜한 반항할 생각 말아요. 얼굴에 흉터 남으면 서로 곤란해지니까.”
주사기에 액체를 담은 남자가 다가온다.
“잠깐 따끔할 거예요. 뭐 마약 같은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심장에 조금 자극을 주는 거예요. 심장도 근육인 거 아시죠. 이 주사 맞으면 심장이 잠깐 동안 제대로 일을 못 해요.”
남자가 주사기를 좌우로 흔들며 웃는다.
“심장마비 알죠?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남자가 눈짓하자 남은 남자가 김문수를 뒤에서 제압한다.
“정말 금방이에요. 자-, 따끔!”
주사를 김문수의 팔에 꽂으려 할 때였다.
“거기까지.”
“누구?”
빠각-
주사기를 들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반대로 돌아간다. 침대 밑에 숨어 있던 유 형사가 몸을 일으키며 남자의 얼굴을 팔꿈치로 후려친 것이다.
반대편에서도 형사 한 명이 불쑥 튀어나와 김문수를 잡고 있는 사내를 제압한다.
유 형사가 둘을 제압한 후 전화를 건다.
“모두 제압했습니다. 네. 녹음도 확실하게 했습니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 * *
황제 클럽.
논현동의 유명한 업소인 황제 클럽과 주변 몇몇 유흥 시설을 관리하는 중앙파의 보스 조춘수는 맞은편 소파에 앉은 민머리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땡초 형님. 그간 격조했습니다.”
“서로 볼 일이 없었잖아. 잘 지냈고?”
땡초가 사체업을 하긴 했지만 그런 것치고도 조직들과 인연이 상당한 편이었다. 중앙파의 보스 조춘수는 그가 다른 조직의 행동대원으로 지낼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저야. 늘 잘 지냈죠.”
“그래? 위험한 짓 많이 하고 다니던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이 바닥에서 손 털고 나가신 분이 그런 말씀 하시면 기분이 조금 그렇습니다.”
“이해해. 은퇴한 퇴물이 이런 말 하면 기분 나쁠 만해. 그래도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데 잘못될 걸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할 수 있어야지.”
“무슨 말씀이세요?”
조춘수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묻는다.
“요즘 여의도 놈들 뒤 닦아 주고 있다며?”
“누가 그래요?”
“누가 그러긴 니가 그랬지. 춘수야.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있겠냐? 그리고 저기 위에 계신 씹새님들은 키우던 개를 절대 곱게 풀어주지 않아. 너도 알잖아.”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오랜만에 보는 형님한테 나쁜 짓 하고 싶진 않으니 적당히 하고 가시죠.”
땡초에게 전화가 온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땡초가 조춘수에게 말한다.
“너 오늘 동생들한테 김문수 작업하라고 보냈지?”
“…….”
조춘수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다.
“왜 나도 제끼려고? 크크, 현역이 은퇴한 퇴물 제껴서 뭐 하려고?”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방금 전화 받았잖아. 서울중앙지검 정재훈 검사라고 알아? 특수 5부 부장인데. 그 친구한테 온 전화야.”
“하아-. 원하는 게 뭡니까? 그리고 정치하는 새끼들 뒤 닦는 나나 검사하고 붙어먹은 형님이나 다를 게 뭡니까?”
“당연히 다르지. 넌 현역이고 난 일반인이니까. 원래 대한민국 국민은 잘못된 일을 보면 경찰에도 신고하고 검찰에 제보도 하고 그래.”
으득-
조춘수의 이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린다.
“춘수야. 박성택이 이미 끈 떨어진 연이야. 의리 지킬 필요 없어.”
“그래서요?”
“너 그놈들하고 통화하면 모두 녹음하잖아.”
“그런 거 안 합니다.”
“아, 우리 춘수가 왜 이럴까? 여우 조춘수. 니가 도망칠 구멍 하나 파놓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없다니까요.”
“일단 내 얘기 다 듣고 결정해. 녹음파일 넘기면 잡힌 동생 두 명만 처벌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끝까지 버티잖아? 너도 같이 가는 거야. 박성택이 잡아넣을 증거? 정 검사한테 한 움큼 있어. 멍청하게 의리 지킬 생각하지 말고 적당히 하자?”
땡초가 환하게 웃는다.
“춘수야.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조춘수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땡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조춘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형님. 현역으로 돌아오신 것으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그런 살벌한 말 하지 마라. 나 완전히 은퇴했어.”
“은퇴를 하셨으면 이러시면 안 되죠.”
“너 도와주려고 그랬다니까? 나 아니었어봐. 너도 같이 엮였지. 이번에 또 들어가면 너 다 늙어서 나올 거 아니야? 고맙다는 말은 안 하고…….”
땡초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깡패한테 착하게 살란 말은 안 할게. 대신 지금보다 조금만 덜 나쁘게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