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 나는 정아라고 해.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뒤쪽으로 향한다.
교실의 가장 뒷자리에 한 여학생이 앉아 있다. 푸른 기운이 일렁이고 있는 망령이었다. 인호가 그녀에게 다가가려 몸을 일으킨다.
그러자 여학생 망령은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춘다. 인호의 시선이 빠르게 주변을 훑는다.
“뭐야?”
감쪽같이 흔적이 사라졌다.
“이게 말이 돼?”
망령들은 머문 자리에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아주 흐릿하게라도 그 기운이 남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학생 망령이 앉아 있던 의자에도 그런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인호가 몸을 돌리며 말한다.
“학교에 와서 괴담 영화 하나 찍게 생겼네. 모두 찾아. 민정이는 나하고 같이 움직이고.”
“네.”
망령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아직 학교 안에 있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지.”
교실을 벗어나 다른 교실들을 살핀다. 하지만 망령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교무실도 들려보고 숙직실과 화장실도 확인한다.
2층에 올라 교실들을 차례로 확인한다.
“신기하네. 어떻게 흔적이 남지 않았지?”
3층, 4층을 모두 확인했지만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뭐 좀 찾은 거 있어?”
사기꾼과 영감이 고개를 흔든다. 마지막 기대를 품고 뚱보를 바라본다.
뚱보는 이 중에 망자의 기운을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저승사자였다.
“아무것도 없어.”
인호와 일행이 학교를 벗어난다. 여기저기 수색한다고 시간이 제법 흘렀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벗어나기 전 인호가 몸을 돌려 학교 건물을 응시한다.
인호의 고개가 천천히 좌측으로 기운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학교의 옥상이었다. 그곳에는 인호처럼 고개를 좌측으로 기울이고 있는 망령이 있었다.
“또 보게 될 것 같다.”
* * *
방문했던 학교를 조사해 보라는 지시를 받은 이민정은 아침부터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 2학년 유XX 학생 수학경시대회 우승.
- 자랑스러운 육상부 전국체전 100미터 우승.
검색되는 것은 이런 것들 뿐이었다.
“휴우-.”
이민정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댄다.
“나오는 게 없어?”
“네.”
“기사 말고 미튜브나 그 학교 다니는 애들 SNS를 확인해 봐.”
이민정이 다시 조사를 시작한다.
“나는 좀 나갔다 올게.”
사무실을 벗어난 인호는 차를 몰아 어제 갔던 학교로 다시 간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조카가 이 학교에 전학 오게 됐는데 저더러 한 번 가서 봐 달라고 해서요.”
인호가 대은 그룹 기획조정실 명함을 수위에게 건넨다.
“좋은 회사 다니시네요. 차도 좋으시고. 금방 나오실 거죠?”
“네. 저도 일이 바빠서요.”
수위의 허락을 받고 학교로 들어간다.
일부러 점심시간에 맞춰 왔기에 운동장에 학생들이 제법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대화하며 환하게 웃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운동장을 거닐다 마주 걸어오는 한 남학생에게 다가간다.
“학생.”
“네?”
“뭐 좀 물어보려고.”
“네. 물어보세요. 그런데 새로 오신 선생님이세요?”
“그건 아니고. 혹시 최근 몇 년 사이에 학교에 이상한 일 없었어?”
“이상한 일이요?”
학생이 모르겠다는 듯 인호를 바라본다.
“괴담이라던가. 누가 자살을 했다던가. 뭐 그런 것 있잖아.”
“잘 모르겠는데요.”
짧게 대답한 학생이 몸을 획 돌린다.
“저 녀석 뭐야?”
누가 봐도 자리를 피하는 느낌이었다. 인호는 다른 학생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글쎄요?”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
몇 명에게 물어봤지만 성과는 없었다. 인호는 처음 물어봤던 학생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이제 그만 돌아갈 생각에 몸을 돌리던 순간.
“저기요.”
누군가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다. 한 여학생이 서 있었다.
“나 부른 거야?”
“…… 네.”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는 여학생.
“왜? 할 말 있어? 참고로 나 이 학교 선생님 아니다.”
“알아요. 저…… 3348 XXXX.”
여학생은 빠르게 말한 후 몸을 돌려 달려간다. 인호가 이상하다는 듯 여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불러 준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한다.
* * *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평범한 학교인데요. 보통 학교에 괴담 같은 것 하나 정도는 있게 마련인데 너무 깨끗해요. 그래서 더 이상해요.”
이민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요즘은 학교 이미지 좋게 만든다고 이사회에서 별의별 짓을 다 하잖아.”
인호가 사기꾼을 바라본다.
“남들은 교육 재단이 좋은 뜻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엄연히 사업이거든. 그거 알아? 학교에는 세금이 안 붙어. 고작해야 직원들 4대 보험하고 사학연금인가? 아무튼 그거 정도만 낼 걸? 그것도 안 내서 국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충당하잖아. 대신 지원금은 따박따박 받아가지. 좋은 이미지의 학교를 만들어야 학부모들 사이에 명문이라고 알려질 테니까 웬만한 사건들은 모두 묻어 둔다고.”
“넌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아냐?”
인호가 신기하다는 듯 묻는다.
“살아있을 때 돈 벌어서 사학재단 하나 만들려고 했거든. 크크크.”
“니가 만든 학교에서 애들한테 뭘 가르칠지 궁금하긴 하다. 아무튼 니 말은 안 좋은 일이 있어도 학교에서 덮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잖아.”
“그렇지. 그런 일을 알아보는 가장 빠른 방법은 당연히 내부자들에게 정보를 얻는 거지.”
“내부자?”
사기꾼이 고개를 끄덕인다.
“선생, 수위 그리고…… 학생.”
* * *
학교에서 가까운 학원가 인근 분식집.
인호는 한 여학생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여학생은 시켜놓은 떡볶이에 손도 대지 않았다.
“항상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다녀?”
“…….”
여학생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다 인호와 눈이 마주치다 다시 고개를 숙인다.
“이름이 뭐야?”
“손미경이요.”
“몇 학년?”
“2학년이에요.”
인호가 떡볶이 하나를 입에 넣고 묻는다.
“나한테 전화번호 왜 알려 준 거야?”
“아저씨가 애들한테 물어보는 걸 들었거든요.”
“그래?”
“애들한테 물어봐도 아무도 대답 안 해줄 거예요.”
“어째서?”
손미경은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혹시 집단 따돌림 같은 것 당하니?”
손미경이 흠칫 몸을 떤다. 이해했다는 듯 인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떡볶이 접시를 손미경 앞으로 밀어준다.
“먹어. 이런 것 한참 좋아할 나이잖아.”
“잘 먹겠습니다.”
손미경은 떡볶이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어째서 학생들이 말을 안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애들 때문에요.”
“그 애들? 혹시 뭐 일진 그런 것 말하는 거야?”
손미경이 고개를 끄덕인다.
“저하고 같은 학년인데 3학년들도 함부로 못 건드려요. 거기 있는 애 엄마가 우리 학교 재단 이사장이거든요. 아빠는 국회의원이고요.”
사기꾼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권력을 쥔 이가 소유하고 있는 사학재단이라는 뜻이다. 그런 학교의 일진 패거리에 딸이 포함되어 있으니 그들이 나쁜 짓을 저질러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안 무서워? 나한테 이런 얘기한 것 누가 알기 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어차피 왕따인데요 뭘.”
손미경이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말한다. 인호가 손미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처음과는 달리 반쯤 들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름답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모난 곳 없는 준수한 미모다.
“넌 왜 왕따를 당하는 거야?”
“정아 친구였거든요.”
“응? 누구?”
“정아요. 김정아.”
정아라는 이름을 들은 인호가 손미경에게 묻는다.
“그 정아라는 학생 혹시 죽었어?”
“몰라요.”
“몰라? 친구라며?”
“어느 날 갑자기 전학을 갔어요. 아니, 갔대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인호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손미경을 바라본다.
“정아가 갑자기 학교를 나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며칠 후 선생님이 정아가 전학 갔다고 말해 주셨어요. 그런데 아무도 그 말 안 믿어요.”
갈증이 나는지 손미경이 물을 마신다.
“애들이 화단에 핏자국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1교시 마치고 가봤더니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날부터 한동안 학교 분위기가 굉장히 이상했어요.”
“그게 언제지?”
“작년이요.”
“친구였다며. 집에는 가봤어?”
“가 봤는데 이사 갔더라고요.”
인호는 어제 학교에서 봤던 여학생 망령이 앞에 앉은 손미경의 친구 김정아라고 확신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을게.”
손미경이 인호와 눈을 맞춘다.
“정아는 왜 일진들한테 찍힌 거야?”
* * *
학교 체육관 뒤쪽 공터.
“1등하니까 좋아? 학원도 안 다닌다며? 설마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뭐 그런 거야?”
남학생과 여학생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다. 몇몇 여학생들이 한 여학생을 앞에 두고 인상을 윽박지르고 있다.
“말해봐. 너 담탱이한테 줬지?”
“…… 뭘.”
“그거 있잖아. 그거.”
여학생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여학생이 맞은편 여학생을 위아래로 훑는다.
“돈 없는 흙수저가 무언갈 얻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잖아. 담탱이한테 대주고 시험문제 미리 본 거야?”
“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어떻게 학원도 안 다니는데 전교 1등을 할 수 있는데? 오호, 집에서 과외라도 받아? 얼마짜리 과왼데? 니네 엄마 식당에서 일하지 않나? 월급 많이 받나 보네?”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여학생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진다.
“그런 말? 어떤 말?”
“…….”
“말을 해. 말을 해야 알잖아.”
“엄마 이야기.”
“아-. 효녀셨어? 내가 엄마 이야기하니까 기분 나빴어? 그래서? 기분 나빠서 뭐 어쩌려고?”
여학생이 손에 든 담배를 상대 여학생의 얼굴 쪽으로 가져간다. 흠칫 몸을 떠는 여학생을 보며 담배를 든 여학생이 환하게 웃는다.
“왜? 예쁘게 눈물점 하나 찍어주려고 하는데.”
여학생이 담배를 튕긴다. 담배가 날아가 상대 여학생의 교복 상의에 부딪힌 후 떨어진다.
“계속 열심히 공부해. 다음에도 또 전교 1등 해야지. 안 그래, 정아야?”
* * *
“일진 녀석들한테 괴롭힘당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선생들까지 합세했다고 하더라.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피운다고 몰아세우고 교실에서 뭐가 없어졌다고 도둑 취급을 했다네.”
“씨발.”
뚱보가 답지 않게 욕지거리를 토해낸다.
“일진들 대가리 여자애가 재단이사장 딸이래. 아버지는 3선 국회의원이고. 작은아버지는 현역 검사에, 외삼촌은 명성 그룹 차남이란다.”
“금수저 납셨구만. 아니지. 그 정도면 다이아몬드 수저지.”
“다음 시험도 전교 1등을 빼앗기니 괴롭힘의 강도가 심해졌데. 그러던 어느 날 정아라는 학생이 학교를 나오지 않았데. 선생들은 정아가 전학을 갔다고 했고.”
“우리가 봤던 여학생이 그 정아라는 학생이다?”
인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우리 이제 뭘 해야 해?”
사기꾼의 물음에 인호가 휴대폰을 들고 말한다.
“정아 부모님을 만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