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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 흥신소-88화 (88/190)
  • 제88화

    샤프를 든 손이 시험지로 향한다.

    문제를 꼼꼼히 읽고 답에 체크를 하려 할 때였다.

    - 12번 답은 3번이야.

    귓가에 들려오는 속삭임에 1번에 체크하려던 손이 아래로 내려간다.

    * * *

    “소장님은 고등학교 때 어떠셨어요?”

    휴대폰으로 뉴스 기사를 검색하고 있던 인호가 이민정을 힐끔 보고는 말없이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이민정이 자리에 일어서며 말을 하려 할 때 그녀의 앞에 사기꾼이 훅하고 나타난다.

    “인호 고등학교 안 다녔어. 중학교가 끝이야.”

    이민정이 입 모양으로 ‘진짜요’하고 묻는다.

    “인호 사정 뻔히 알면서 뭘 물어. 어렸을 때부터 우리 같은 망령들이 주위에 있었잖아. 인호 아버지가 이것저것 많이 가르치기도 했고.”

    “나는 소장님이 외국어 잘하시길래 학교 다닐 때 공부 엄청 잘하셨나 했죠.”

    속삭이듯 말하는 이민정에게 인호가 말한다.

    “다 들린다. 속삭일 거면 안 들리게 속삭이던가. 그리고 감추고 싶은 마음 없어. 부끄럽지도 않고. 덕분에 일찌감치 개인사업 시작했잖아.”

    “그러면 소장님은 친구도 없겠네요?”

    인호가 사기꾼과 영감을 보고 피식 웃는다.

    “저기 있잖아. 설마 얼마 전에 친구 없다는 말 했다고 그러는 거냐?”

    “꼭 그런 건 아닌데. 소장님이 친구분 만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맞아. 나 친구 없어.”

    영감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인호를 바라본다.

    “인호 니가 친구가 왜 없냐? 성엽이 있잖아.”

    “아이고 7년 동안 연락 한 통 없는 놈이 무슨 친구예요? 죽었다는 소식 들리면 가서 절이나 하고 잘 가라고 인사나 하는 사이지.”

    이민정이 사기꾼에게 ‘성엽이가 누구예요’라고 조용히 묻는다.

    “성엽이라고 인호 어렸을 적 친구 있어. 끼리끼리 논다고 걔 어머니가 무당이었지 아마?”

    “다 들린다고. 그냥 얘기하라고.”

    인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서려 한다.

    “어디 가세요?”

    “똥 싸러. 똥 싸러 가는 것도 보고하고 가야 하냐?”

    “아니에요. 시원하게 싸고 오세요.”

    인호가 나가자 이민정이 사기꾼에게 묻는다.

    “성엽이라는 분은 왜 7년 동안 연락이 없으신 거예요?”

    “그건 나도 모르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가 엄청 추운 겨울이었거든. 그때 근처 망령들하고 수다 떤다고 무슨 얘길 했는지는 잘 모르는데 성엽이가 헤어지기 전에 인호에게 미안하다고 했어.”

    “아-, 소장님한테 뭔가 잘못하고 미안해서 연락 못 하는 건가 보네요.”

    영감이 고개를 흔든다.

    “그건 아닐 거야. 성엽이가 인호한테 정말 잘했거든. 인호에게 실수했어도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할 정도의 실수를 할 녀석은 아니야.”

    “그래요? 좋은 친구였나 보네요.”

    “그랬지. 처지도 비슷했고. 성엽이 어머니도 일찍 죽었거든.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할까? 둘이 서로 많이 의지했었어.”

    * * *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화장실에 가겠다던 인호는 옥상에 있었다. 인호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뜬 인호가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낸다. 사진 속에서 십 대 중반의 두 소년이 환하게 웃고 있다. 인호는 오른쪽 소년을 보며 말한다.

    “하아-, 잘 살고 있냐? 나는 잘 사냐고?”

    손가락으로 친구 윤성엽의 얼굴을 툭 친다.

    “당연하잖아. 그 힘든 시간을 견뎌냈던 나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그게 그렇게 미안했냐? 그래. 그때는 나도 화가 나긴 했어. 우리 어렸었잖아.”

    인호가 서글픈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성엽아. 니가 너무 보고 싶다.”

    인호가 윤성엽의 사진을 지갑에 넣는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안 어울리게 웬 청승이냐?”

    “청승은요. 그냥 기분이 꿀꿀해서 그래요. 영감님도 자식들이 제사 안 지내겠다고 했을 때 그랬잖아요.”

    “기분이 꿀꿀하면 기분 전환이라도 하고 와. 시계태엽 감듯 매일 똑같이 반복하니 더 그런 거야.”

    “어딜 가서 기분 전환할까요? 여자 끼고 술이라도 마실까요?”

    “니가 참도 그러겠다.”

    “그러면 놀이동산이라도 갈까요? 그리고 보니 놀이동산을 한 번도 못 가봤네.”

    영감이 인호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러지 말고 인호야 우리 학교 가자.”

    “네? 뭐라고 하셨어요?”

    “학교 가자고, 학교.”

    “하, 하하. 최근 10년 사이에 영감님이 하신 농담 중에 가장 재미있었어요. 학교. 학교래. 하하.”

    한참을 웃다 영감을 보는데 표정이 너무 진지하다. 인호가 웃음을 거두고 말한다.

    “학교 가면요. 가서 철봉이라도 하고 올까요?”

    “공부하면 되지.”

    “저 공부 엄청 싫어해요.”

    “아닌데. 내가 아는 인호는 공부 너무 좋아하는데.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선교사 쫓아다니며 영어 배웠는데.”

    “그건…… 아, 그리고 공부하고 싶다고 혼자 합니까? 뭐, 동아 전과라도 사서 혼자서도 잘해요. 그렇게 해요?”

    “여기 있잖아.”

    “있긴 뭐가 있어요?”

    영감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내가 너보다 배움은 짧지만 조금 더 살았잖아. 인생 선생님. 어때?”

    인호가 피식 웃는다.

    “인생 선생님 좋죠. 그런데 저 학교 가면 수위 아저씨한테 쫓겨나요.”

    “밤에 가면 되지. 문 닫혀 있으면 담 넘으면 되지. 너 중학교 때 놀리던 녀석들 싫다고 담 많이 넘었잖아.”

    “밤에 학교라. 하하. 학교 괴담 한 번 찍는 겁니까?”

    인호가 일어나 영감을 보고 환하게 웃는다.

    “고마워요. 덕분에 기분 전환 좀 됐네요.”

    * * *

    “아니, 유성엽이 아니라 윤성엽. 그래 윤. 천천히 알아봐도 되니까 꼼꼼히 좀 알아봐. 다음에 같이 소주 한잔하자.”

    차에서 내린 인호가 건물로 들어가려다 걸음을 멈춘다.

    “얌마!”

    골목에서 빠져나온 학생들이 빠르게 달린다.

    “담배꽁초는 주웠냐?”

    달리다 멈춘 학생들이 일제히 몸을 돌린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학생들.

    “짜식들. 철이 조금 들었나?”

    학생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손을 올린다.

    “이런!”

    고개를 든 학생들이 이내 중지를 올리더니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달려 나간다.

    “그래. 그럴 때가 좋은 때다. 교복 멋있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팡- 팡-

    “깜짝-.”

    “와아아아-!”

    머리 위에서 하얗고, 빨갛고, 파란 종잇조각이 눈처럼 떨어진다. 이민정이 다가와 인호의 머리에 고깔모자를 씌워준다.

    “축하합니다.”

    “갑자기?”

    “셋, 둘, 하나!”

    -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인호. 생일 축하합니다.

    사기꾼과 영감, 뚱보. 그리고 위층의 지박령들까지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단체로 뭘 잘못 먹었어? 오늘 제밥에 소금 대신 설탕을 넣은 거야?”

    “소장님. 생일 축하드려요.”

    “하아, 민정아.”

    “네, 소장님.”

    “갑자기 뭐 하자는 시츄에이션인지 모르겠는데 내 생일 3월달이다.”

    이민정이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아니요. 오늘 맞아요. 소장님의 서른, 마흔, 일곱 살 생일을 축하드려요. 이건 선물.”

    이민정이 큼직한 상자를 내민다. 빨간 리본이 달린 상자다. 인호가 눈을 가늘게 뜬다.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모두가 너무 진지하다.

    “그래. 알았어. 내가 뭘 해야 하는데?”

    “고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됐잖아요. 그러니까 어서 선물 풀어 보세요.”

    “뭐 하자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장단은 맞춰 줄게.”

    리본을 풀고 포장지를 벗긴다. 상자의 뚜껑을 여니 곱게 접힌 옷이 한 벌 들어있다. 인호가 옷을 꺼낸다.

    “하, 하하. 이게 뭐야?”

    “뭐긴요. 교복이죠.”

    “그러니까 왜 교복을 선물로 주는데?”

    이민정이 고개를 돌려 망령들을 바라본다.

    그러자 망령들이 한목소리로 외친다.

    - 인호야 학교 가자!

    * * *

    “아직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네요.”

    “준비한 사람 생각해서 그냥 받아들여.”

    인호가 차를 세운다.

    조수석에서 내린 이민정이 걸음을 옮긴다. 교문 앞에 선 이민정이 인호에게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얌마. 이 시간에 교문이 열렸겠냐? 저쪽 담이 조금 낮네.”

    끼이익-

    쇠가 부딪히는 소리에 인호가 고개를 돌린다. 이민정이 교문을 열고 있었다.

    “거참. 오늘 왜 이런데? 이 시간에 교문이 열려 있다고?”

    “낮에 와서 수위 아저씨한테 오늘 저녁에 학교에서 동창회한다고 문 좀 열어두시면 안 되냐고 부탁했죠.”

    “그러다 나쁜 녀석들 들어가면 어쩌려고?”

    “걱정도 팔자시네.”

    사기꾼이 인호 앞에 쑥 나타난다.

    “내가 경비 서고 있었지.”

    영감이 인호의 어깨를 툭친다.

    “가자. 고등학교 첫 등교인데 지각하면 안 되잖아.”

    “오랜만에 내기 한 번 할까요? 꼴찌로 오는 사람 오늘 청소 당번!”

    사기꾼이 달리기 시작한다.

    “치사해!”

    이민정이 그 뒤를 쫓는다. 인호를 보며 어깨를 으쓱한 영감이 달린다. 뚱보가 뒤뚱거리며 그 뒤를 쫓다 멈춰서 헉헉대더니 영체로 변해 달려간다.

    “이 사람들 보소.”

    인호가 히죽 웃는다.

    “같이 가!”

    * * *

    - 오늘의 지각생 : 정인호

    이민정이 꼴찌로 들어오는 인호를 보며 칠판에 이름을 적는다.

    “반장.”

    “네.”

    교탁 앞에 선 영감이 반장을 부르자 사기꾼이 손을 든다.

    “인사하자.”

    “차렷! 선생님께 경롓!”

    제일 앞자리에 앉은 인호가 ‘안녕하세요’하며 고개를 숙인다.

    “흐음, 출석을 부르…… 필요가 없겠네. 네 명 다 왔군. 자-, 1교시는-.”

    “우우우우-!”

    이민정과 사기꾼이 야유를 보낸다.

    “첫 시간부터 공부가 웬 말인가요?”

    “그러면 뭐 할까?”

    “선생님 첫사랑 얘기해 주세요.”

    영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인석들이 내 첫사랑이 이미 뼈도 다 삭아서 흙이 됐어.”

    “그러면 상큼 상큼한 얘기해 주세요.”

    “상큼은 모르겠고 시큼한 얘기는 잘 알지. 그나저나 저 녀석은 왜 이렇게 조용해? 모범생인가?”

    영감이 인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네, 모범생입니다. 법 없이도 살 사-, 학생이죠.”

    “좋았어. 1교시는 끝났으니 2교시 시작하자.”

    “벌써요?”

    인호의 물음에 영감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2교시는 자기소개 시간. 어쩌면 평생을 함께해야 할지도 모르는 친구들이잖냐. 친구에게 자기를 어필해봐.”

    사기꾼이 벌떡 일어난다.

    “내 이름은 외 자야. 짜.”

    “짜?”

    “그래. 짜. 성은 사. 사짜라고 해 반갑다.”

    인호가 크게 웃는다.

    “웃어? 내가 웃겨? 어쭈? 눈 안 깔아? 내가 누군지 알아?”

    이민정과 뚱보가 차례로 자기소개를 한다.

    “모두 반갑다.”

    인호의 차례다.

    “내 이름은 정인호. 지구를 정복할 남자지.”

    “미친 거 아니야?”

    “쟤 좀 이상한 것 같아.”

    “우리 아부지가 그랬거든. 꿈은 크게 가지라고. 지구정복쯤은 돼야 꿈이 크다고 할 수 있지. 그런 눈으로 보지들 마라. 내가 지구 정복하면 나라 하나 뚝 떼어줄게.”

    인호가 웃으며 자리에 앉는다.

    영감이 인호를 보며 피식 웃는다.

    “2교시 끝. 3교시는…….”

    - 나는 정아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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