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인호가 산을 오르고 있다.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네.”
인호의 뒤를 따르는 사기꾼을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양심은 얼어 죽을. 그런 것이 있었다면 이미 할머니한테 이야기해 줬어야지.”
영감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처음에는 그 사람 말처럼 협박이 무서웠을 겁니다. 그다음은 욕심 때문이죠. 친구의 죽음을 모르는 척한 대가로 받은 오백만 원이 오천만 원이 되고 오억 원이 되었을 테니까요. 나눠주고 싶지 않았겠죠.”
인호는 읊조리듯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필성이 딱 하나 잘한 것이 있다면 김정국의 시신을 화장해 그 뼈를 그들의 고향 인근 산에 묻었다는 것이다.
“저긴가 보네.”
관리가 잘 된 무덤 세 개가 보인다.
인호는 그 무덤에서 조금 더 올라간다. 벽돌 두 개 크기의 비석이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비석.
이곳이 이필성이 김정국의 뼈를 묻은 곳이었다.
인호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과 함께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정말 다행이네요.”
인호의 눈에 무덤 옆에 앉아 산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 망령이 보인다. 망령이 인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김정국 씨죠?”
“내가 김정국은 맞는데 누구십니까?”
인호가 환하게 웃는다.
“아내분께서 보내서 온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인지는 대충 아시겠죠?”
인호가 좌우에 서 있는 사기꾼과 영감을 바라본 후 말한다. 김정국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미향이 아직 살아있습니까?”
인호가 고개를 흔든다.
“아쉽게도.”
“갈 때가 되기도 했지요. 이곳을 벗어나 저 아래, 미향이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죠.”
대부분의 망령들이 자신이 죽은 곳, 자신이 묻힌 곳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인호 주변의 망령들은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미향이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내가 없어서 많이 힘들었지요?”
“아니요. 행복하셨다고 하네요. 매일, 매일 남편분을 기다리며 행복하셨다고 하네요.”
인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바보 같기는. 착하기만 해서 재혼도 안 했을 거예요. 맞지요?”
“네, 할머니는 평상 남편분만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퇴계원역에서 남편분을 기다리셨죠. 그리고…….”
인호가 최대한 환하게 웃는다.
“지금도 기다리고 계세요.”
인호가 품속에서 부적 한 장을 꺼낸다.
“아내분 보러 가셔야죠.”
혹시라도 김정국의 망령이 저승에 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을 대비해 준비한 부적이다.
“잠시 동안 이 안에 머무실 수 있을 겁니다.”
인호가 부적을 쥔 손을 내민다.
김정국이 환하게 웃으며 그 손을 잡는다.
* * *
밤 10시가 넘은 시간의 퇴계원역.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인호가 담을 훌쩍 뛰어넘어 역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고는 여전히 켜져 있는 플랫폼의 끝 전등을 향해 걸어간다.
“수고 많았어.”
“오셨어요.”
이민정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줬다.
“수고 안 했어요. 할머니하고 얼마나 재미있었는데요.”
인호가 의자에 앉아 있는 유미향에게 웃으며 고개 숙인다.
“할머니. 다녀왔습니다.”
“왔어요? 그동안 고생 많았죠? 그-.”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선뜻 입에 떼어지지 않는 듯하다. 인호는 그런 유미향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유미향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괜찮아요. 수십 년도 더 지났잖아요. 사람 찾는 것 어려운 일인 걸 저도 알아요.”
“…….”
“그래도 소식은 듣지 않았을까요?”
마지막 희망일까?
유미향이 고개를 들며 묻는다. 인호는 유미향의 눈에서 간절한 소망을 읽을 수 있었다.
남편의 마지막 소식이라도 듣고 싶은 간절함이다.
인호가 품속에서 부적을 꺼낸다.
“남편분 보고 싶으시죠?”
“당연하죠. 죽기 전 마지막 소원도 그거였구요. 이승에 미련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청승 떨고 있는 이유도 그거에요.”
인호의 손에 들린 부적이 잠시 푸른 빛을 낸다.
“남편분 만나시면 어떤 말 하고 싶으세요?”
“어떤 말……. 전에는 참 하고 싶은 말이 많았어요. 왜 그랬냐고 묻고 싶었어요. 나하고 애들만 남겨두고 왜 오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었어요. 하지만 세월이 지나다 보니 원망도 사라지더라고요. 지금 남편을 보면 이 말은 꼭 하고 싶어요.”
그때 손 하나가 유미향의 어깨를 두드린다. 흠칫 몸을 떤 유미향이 천천히 몸을 돌린다. 그곳에는 젊은 시절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김정국이 서 있다.
유미향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유미향은 김정국의 손을 쓰다듬고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한다.
“보고 싶었어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나도-. 나도 당신 많이 보고 싶었어.”
유미향이 김정국의 품에 안겨 오열한다. 김정국이 유미향의 등을 토닥인다.
“우리 마누라는 여전히 곱네.”
“놀리지 말아요. 당신은 예전 그대로인데 나만 쭈그렁 할망구가 됐어요.”
“아닌데.”
김정국이 품속의 유미향을 떼어내며 얼굴을 바라본다.
“내 눈에는 여전히 고운데.”
유미향이 환하게 웃는다.
그때 주름으로 가득하던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주름이 사라지고 굽었던 허리가 펴진다. 하얀 머리가 검게 변하더니 젊었을 때의 모습으로 변한다.
“우리 마누라 정말 곱다.”
인호와 이민정, 망령들은 수십 년 만에 만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둘을 보며 웃고 있었다.
“종민이 하고 희수는 잘 컸어?”
“네, 잘 컸어요. 가난한 부모 만나 힘들게 살고 있긴 하지만 남들한테 해 끼치지 않고 살아요.”
“그래. 그거면 된 거야.”
김정국과 유미향이 인호를 향해 몸을 돌린다.
“정말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인호는 나란히 선 둘을 보며 말한다.
“어르신. 이필성에 관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필성이.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그놈은 잘살고 있습니까?”
“어르신 돌아가신 걸 숨긴 대가로 돈을 받아 천금을 가진 부자가 되었습니다.”
“예전부터 필성이 그놈이 셈이 빨랐어요.”
이필성이 원망스럽지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인호는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만 배로 갚겠다고 하더군요.”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인호를 바라본다.
“그래서 받아내려고 합니다.”
인호가 입을 닫자 뚱보가 앞으로 나선다.
“망자 김정국. 망자 유미향.”
“네.”
“네.”
“가야 할 시간이네요. 갈 길이 멀어요. 그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 실컷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서로의 손을 꼭 잡은 두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잘 모셔다드려.”
인호가 뚱보의 어깨를 두드린다.
* * *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설거지와 청소를 마친 김희수는 오전 열 시가 넘어서야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1층에 내려가 우체통에 꽂혀있는 공과금 용지를 가지고 돌아온 김희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이번 달도 빡빡하겠네.”
남편의 월급이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서울에서 고등학생 아이 둘을 키우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했다.
다른 집처럼 아이들에게 좋은 학원을 보내주지도, 고액 과외를 시켜주지도 못함에도 매달 구멍이 나려는 생활비 걱정이 태산이다.
“얘들 신발도 사줘야 하는데.”
휴대폰으로 생활비 계좌를 확인하니 다시 한숨이 나온다.
“다음 달은 보너스 달이니 숨통이 좀 트이려나?”
커피 한잔을 타 소파에 앉는다. 리모컨으로 티비를 켠다. 일찍 잠을 자는 편이라 보지 못했던 드라마 재방송을 멍하니 바라본다.
하루 중 김희수가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아이들 학원비 때문에 오후에는 파트타임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효, 내가 저럴 줄 알았지. 그래서 아는 사람이 더 무서운 거야.”
드라마를 보며 막 몰입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휴대폰 벨소리가 들린다. 발신자를 확인한 김희수가 고개를 갸웃한다. 모르는 번호였다.
보이스 피싱이다 뭐다 해서 말이 많은 시대이기에 받지 말까 잠시 고민해 본다.
하지만 결국 김희수는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 김희수 씨 휴대폰이죠?
“네. 제가 김희수인데요.”
- 안녕하세요. 전 정인호라고 합니다.
“아, 네. 무슨 일로 전화하셨죠?”
- 일단 먼저 드려야 할 말이 있어요. 믿으실지 모르시겠지만 전 김희수 씨 어머님, 그러니까 유미향 할머니와 잘 아는 사람이에요.
“엄마요?”
- 네. 아주 오래전에 김희수 씨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친구분에게 돈을 빌려주셨어요.
“네? 우리 엄마가 돈을 빌렸다고요? 그리고 아버지요? 야-! 너 사기꾼이지? 우리 엄마가 누구한테 돈을 빌려!”
김희수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 아니요. 어머님이 돈을 빌리신 게 아니라…….
“사기꾼. 너 당장 전화 끊어.”
- 김희수 씨? 제발 말을 끝까지 들어보세요. 유미향 할머니가 돈을 빌리신 게 아니라 빌려주셨다고요.
“아-! 엄마가 돈을 빌려줘요?”
김희수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인호가 말을 잇는다.
- 네. 돈을 빌려주셨어요. 아버님이 서울 가신 후에 돈을 많이 버셨어요. 그 돈을 친구에게 빌려주신 거죠.
“전 우리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데요.”
- 네, 알고 있어요. 저도 할머니 돌아가신 후에 연락을 받았어요.
“그런데 돈을 얼마나 빌려주셨을까요?”
김희수가 조금은 기대가 되는 음성으로 묻는다.
- 놀라지 마세요.
“우리 엄마 형편 뻔히 아는데 놀라긴요. 금액이 적어도 안 놀랠 테니 그냥 말해 주세요.”
- 250억 원이요.
“250만 원이요? 우와, 우리 엄마 남들한테 만 원도 잘 안 빌려주는데. 크게 쓰셨네요.”
- 250만 원이 아니라 250억 원이요.
“네?”
김희수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되묻는다.
“250억 원이요?”
- 네. 250억 원이요.
“야! 사기꾼 맞네. 뭐 이런 거냐? 그 돈 받으려면 얼마 정도 보내라고? 야, 임마! 내가 먹고 죽으려고 해도 돈 없거든. 그러니까 사기 치려면 다른 곳에 알아봐라. 끊어!”
- 저기, 저기요? 김희…….
김희수는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우리 엄마 이름하고 내 이름은 어떻게 안 거야? 휴대폰 해킹이라도 당했나?”
아들이 그랬다.
휴대폰으로 이상한 곳 가입하면 개인 정보가 유출된다고. 아무래도 그랬던 것 같다.
“하아-. 250억? 정말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 태호하고 민하 가고 싶은 학원도 보내주고 어학연수도 보내주고 그럴 텐데.”
쓰게 웃던 김희수가 인상을 와락 구긴다.
“아씨. 사기꾼 때문에 중요한 장면 놓쳤잖아.”
그때 휴대폰에서 ‘띠링’ 소리가 들렸다.
- 쉽게 믿지 못하는 것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행히 유미향 할머니께서 따님이신 김희수 씨 계좌번호를 알고 계셨어요. 참고로 세금 문제는 돈을 빌린 쪽이 다 해결 했습니다. 그냥 마음 편하게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조금 전 전화가 왔던 번호다.
“이런 미친놈이!”
- 띵동.
다시 한번 휴대폰이 울렸다.
“응?”
문자가 오는 소리가 아니라 통장에 돈이 입출금될 때 나는 소리였다.
메시지를 확인한 김희수의 입이 쩍 벌어진다. 그녀가 처음 보는 자릿수의 금액이 입금된 것이다.
- 25,000,000,000
그날 어려운 형편에 두 명의 고등학생 자녀를 둔 김희수와 생선 가게를 운영하며 4남매를 키우던 김종민은 돈벼락을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