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하아.”
사무실에 도착해 소파에 앉은 인호가 한숨을 토해낸다.
정말 스펙타클한 하루였다.
“믹스? 따둥?”
“따둥은 뭐냐?”
“따뜻한 둥글레차?”
“따둥으로.”
이민정이 뜨거운 물에 둥글레차 티백을 하나 넣어 앞에 내려놓는다.
“왜 퇴근 안 했어?”
“다 외근하는데 저 혼자 퇴근하는건 상도의가 아니죠.”
“하하, 그래? 사기꾼하고 영감은?”
“아까 들어왔다가 나갔어요.”
지하실에 들어가기 전에 인호가 위험할 수도 있으니 먼저 돌아가 있으라고 했다.
“일은 어때?”
“나쁘지 않죠. 손님 많이 없죠. 가끔 들어오는 일은 완전 재밌지. 갈구는 상사도 없지. 아-, 불만이 딱 하나 있네요.”
“뭔데?”
“차! 나하고 너- 무 안 어울려. 업무용 차 좀 바꿔 주면 안 돼요? 돈도 많이 벌었으면서.”
“응, 안 돼.”
인호가 호로록하고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신다.
평소라면 차보다는 커피를 마셨을 테지만 오늘은 일찍 잠들고 싶었다.
“많이 힘드셨나 봐요. 뱀파이어 직접 보셨어요?”
“봤지.”
“어때요? 정말 잘 생겼어요? 영화에서 보면 뱀파이어들이 씩 웃어주면 여자들이 피 빨아 먹으라고 목 내밀고 그러잖아요.”
“평범한 아저씨던데.”
“아씨. 정말요? 이래서 애니 보고 실사판은 보면 안 된다니까. 환상이 완전 깨져.”
“됐고. 퇴근이나 해라.”
“어머! 이 소장님 보소. 이 깜깜한 밤에 가녀린 여직원을 혼자 보내려고요? 밤길에 누가 확-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아직 버스 다니는데? 너 사는데 버스 정류장 바로 앞이잖아. 그리고 민정아 미안한 말이지만 너는 절대 가녀리지 않아.”
“아니거든요! 나는 완전 가녀림 그 자체거든요!”
“그렇다고 하자.”
이민정이 가녀린 것은 맞다.
물론 눈으로 봤을 때 이야기다. 가녀리기만 하겠나 외모도 상당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민정이라는 여자를 잘 알고 있는 인호의 눈에는 땡초가 데리고 있는 건달들보다 이민정이 더 무섭게 보였다.
“소장님. 나 궁금한 거 있어요.”
“좀! 퇴근하라니까.”
“진짜 섭섭하네. 내가 명품백을 사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궁금한 거 물어보는 것도 안 돼요?”
“그래. 알았어. 뭔데?”
이민정이 묘한 눈빛으로 인호를 바라보며 묻는다.
“소장님은 왜 결혼 안 해요?”
“…….”
둥글레차를 마시려고 잔을 들던 손이 멈춘다. 잠시 멈칫했던 손이 입으로 향한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인호가 말한다.
“나 같은 놈이 또 있다고 생각해봐.”
고개를 들어 이민정을 바라본다.
“힘들지 않겠냐?”
“…….”
이민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인호가 사무실 벽에 걸린 사진들을 힐끔 바라본다.
“누군지 알지?”
“네. 소장님 아버지, 할아버지, 또 그 위에 아버지, 할아버지.”
“그래. 그렇게 몇 대 째 대물림되고 있는 이 짓을 내가 하고 있지. 그런데 내 자식한테도 이 짓을 시키라고?”
인호가 쓰게 웃는다.
“내가 하는 일. 누군가 해야 하는 꼭 필요한 일인 건 알겠어. 그런데 민정아. 굳이 이 일을 내가 정말 사랑하는 내 새끼가 해야 한다면…….”
인호가 남은 차를 단숨에 비운다.
“너라면 시키겠어?”
* * *
챙-
잔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인호는 잔을 가득 채운 호박색 액체를 단숨에 비운다.
“인호야. 그거 아냐?”
“뭘요?”
“나는 말이야. 니가 갑자기 술 마시자고 전화하면 무서워.”
땡초의 말에 인호가 피식 웃는다.
“형은 좀 그래도 돼요. 지은 죄가 있잖아.”
“아씨. 착하게 산다고.”
“착하게 산다고 했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안다고. 그래서 조심하고 있다고.”
땡초가 인호의 잔을 채워준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술을 다 마시자고 하냐?”
“그냥요. 생각이 많네요.”
“머리 복잡할 때는 이게 명약이지.”
땡초가 잔을 들어 앞으로 내민다. 인호가 잔을 부딪친 후 단숨에 비운다.
“형은 왜 깡패가 됐어요?”
“응?”
“왜 깡패가 됐냐고요.”
“하, 하하.”
땡초가 헛웃음을 짓는다.
땡초는 자신의 잔을 채워 단숨에 비운다.
“아주 오래전에 똑같은 질문한 놈이 있었어.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마시던 술병으로 그 새끼 머리를 찍었다.”
인호가 때리라는 듯 머리를 내민다. 땡초가 씨익 웃고는 인호의 잔을 채워준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그때 그놈이 한 말이 자꾸 떠오르더란 말이지. 내가 왜 깡패짓을 하고 있지? 나도 어렸을 때는 과학자, 대통령 되는 게 꿈이었거든.”
“아-, 형이 과학자처럼 하얀 가운 입는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안 어울려.”
“나도 알아. 나이 들고 생각을 해 보니까 딱 하나더라고.”
인호가 땡초를 바라본다.
땡초가 수박을 한입 베어 물고는 씁쓸한 듯 말한다.
“그때는 그것 밖에 할 게 없었어.”
인호가 땡초의 잔을 채워주고는 잔을 앞으로 내민다.
챙
“그래도 형은 좋겠네.”
“응?”
땡초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인호를 바라본다.
술을 비운 인호가 수박을 먹고 우물거리다 씨를 손바닥 위에 뱉는다.
“이 작은 녀석도 꿈이 있거든. 싹을 틔우고 열매가 되겠다고. 형이 그런 것처럼 말이야. 과학자? 대통령? 좋잖아요. 꿈을 꾸는 순간은 행복하니까. 그런데 나는요.”
말을 끊은 인호가 눈을 감는다.
언제나 혼자 아파 끙끙거리던 아버지의 모습.
철이 들기 전 친구들보다 망령들과 먼저 친해졌던 기억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했던 마지막 말.
- 인호야. 미안하다.
그리고 눈을 감으시던 모습.
“하-.”
인호가 고개를 뒤로 젖힌다.
“분위기 어색해지게 갑자기 왜 그러냐?”
땡초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나는요.”
인호가 잔에 술을 채워 단숨에 비운다.
“꿈이라는 걸 꿔 본 적이 없거든요.”
“무슨 말이야?”
인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꿈을 꿔 봐야 매번 악몽이었거든.”
* * *
과음한 탓인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 오후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술을 얼마나 퍼마신 거냐?”
얼굴이 푸석한 인호를 보며 사기꾼이 한마디 했다.
“여기요.”
이민정이 믹스 커피를 타 인호의 앞에 내려놓는다.
“죄송해요.”
“갑자기 뭐가 죄송해?”
“어제요. 제가 한 말 때문에 술 드셨잖아요.”
“그런 거 아니야.”
이민정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무슨 일 있었어?”
영감이 옆에 앉으며 묻자 인호가 고개를 흔들고는 커피를 마신다.
“민정아. 손님 없었지?”
“네. 오늘은 조용하네요.”
“조용하면 좋은 거지. 나 찜질방 좀 다녀올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인호가 밖으로 나가자 사기꾼이 묻는다.
“무슨 일인데?”
“아, 몰라요.”
“모르긴 뭘 몰라. 어제 무슨 얘길 했길래?”
영감도 궁금한지 이민정을 바라본다. 이민정이 울상을 짓고는 말한다.
“소장님한테 왜 결혼 안 하냐고 물어봤거든요.”
“하, 하하.”
“이런-.”
사기꾼과 영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제가 큰 실수한 거죠?”
영감이 한숨을 내쉰 후 말한다.
“나는 인호 아버지 때부터 이곳에 있었어. 그래서 인호가 어떻게 자랐는지 잘 알지. 녀석은 자기가 겪었던 어린 시절을 자식에게 대물림하기 싫어서라도 결혼을 하지 않을 거야.”
“소장님도 그러시더라고요.”
사기꾼이 혀를 찬다.
“쯧. 아니, 애가 눈치라도 좀 있어야지. 생각을 좀 해 봐라. 니가 인호라면 결혼하고 싶겠냐?”
“그냥 궁금할 수도 있잖아요. 소장님 잘 생기셨잖아요. 좋다는 여자들 많았을 것 같은데요.”
“암-, 많았지.”
영감이 벽에 걸린 사진들을 본다.
“저 집안 남자들이 다 잘 생겼어. 특히 인호가 인물은 제일 좋지. 인호 좋다던 여자들 많았어. 하지만 인호는 절대 결혼 안 해. 인호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정말 죽을 정도로 사랑하기 때문일 텐데.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 잘못된 선택을 할 녀석이 아니야.”
영감의 말에 이민정이 놀라 묻는다.
“죽어요? 왜요?”
“몰라도 돼. 그런 것이 있어. 그리고 절대 인호에게 어머니 얘기는 묻지 마. 알겠어?”
* * *
인호는 찜질방에서 나와 해장국을 먹은 후 흥신소로 돌아가기 위해 걸었다.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의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벽에 붙은 ‘인절미를 찾습니다’라는 종이가 눈에 띈다. 잃어버린 반려견을 찾는 전단지다.
인호가 피식 웃는다. 일거리가 없을 때 이런 비슷한 일을 한 적도 있었다.
“이름 귀엽네. 절미야 집으로 돌아가라.”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걷고 있을 때였다.
“복이 참 많으세요.”
인호가 걸음을 멈춘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띤 중년 여자가 다가온다. 전형적인 ‘도를 아십니까’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제가 복이 많아요.”
“네. 저하고 좋은 이야기 좀 나눠 볼래요?”
“제가 왜 복이 많아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 좀 해 보자고요. 아주 좋은 말이에요.”
인호가 피식 웃는다.
“아주머니. 고마워요.”
여자가 의아한 눈으로 인호를 바라봤다.
“덕분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거든요.”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걸음을 옮긴다.
“내가 복이 많구나.”
흥얼거리듯 중얼거린다.
“애도 아니고 말이야. 이런 일에 일희일비하네. 정인호. 아직 멀었다, 임마.”
* * *
며칠 동안 극락 흥신소를 찾는 손님이 없었다.
오늘도 한가하게 사무실에서 휴대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소장님. 저 들어가요.”
“어, 왔어.”
유 형사가 들어온다. 검은 봉지를 들고 왔는데 떡볶이와 순대를 잔뜩 사 왔다.
“뭘 그런 걸 사 오고 그래.”
“제가 아직 식전이라서요. 같이 드시죠. 많이 사 왔어요.”
“나는 됐어. 그리고 그게 많아?”
인호가 소파에 앉아 유 형사가 들고 온 검은 봉지를 열정적인 눈빛으로 바라보는 뚱보를 힐끔거린다.
“누구 코에 붙이겠다고.”
“아-! 하하, 모자라면 더 사 오죠. 뭐.”
“떡볶이 먹을 곳이 필요해서 왔을 리는 없고 왜 온 거야? 근무시간 아니야?”
인호가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알려드릴 것이 있어서요.”
유 형사와 인호가 말하는 동안 뚱보는 검은 봉지를 전투적으로 해체하고 있었다.
“이것 좀 보세요.”
유 형사가 휴대폰을 인호 앞에 내민다.
“이게 뭔데?”
“밀실 살인 관련 자료입니다. 그때 CCTV가 다 작동 안 됐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사건 당일 근처에 서 있던 차를 찾았어요. 그래서 블랙박스를 확인했죠. 열일곱 명이 찍혔어요. 그중에 열네 명은 신원 파악됐고요.”
“나머지 세 명은?”
“직접 보세요.”
유 형사의 휴대폰에 한 남자가 보인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얼굴을 식별할 수 있었다.
“요즘 블랙박스 좋네.”
“전문가가 손댄 거죠.”
“딱 봐도 노숙자네.”
“네.”
두 번째 사람은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있어 얼굴을 식별하기 어려웠다.
마지막 사람을 확인하는 인호의 눈이 가늘어진다.
어두운 길에서 차를 향해 다가오는 키가 작은 아이가 보였다.
“근처에 사는 아이일까 싶어 수소문 해 봤지만 다들 모른다고만 하네요.”
영상 속 아이는 무언갈 먹는 듯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유 형사.”
“네, 소장님.”
인호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묻는다.
“밀실에서 죽은 사람…… 새끼손가락이 잘렸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