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돈이 없을 때는 돈만 있으면 막 쓰면서 행복할 것 같았거든. 그런데 막상 돈이 생기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틀이나 엄청나게 쓴 거 같은데 2천만 원도 못 썼어.”
운전을 하며 말하는 인호를 보며 사기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래서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는 말이 나온 거야. 돈도 써 본 놈이 쓰는 거지.”
“그런 것 같다.”
“강아지 사고, 사료 사고, 가전제품 몇 개 사고. 고작 그 정도잖아. 그래서 차는 안 바꿀 거야?”
사기꾼이 허름한 차 내부를 보며 툴툴거렸다.
“금자 할머니가 남겨 주신 돈이다. 나 사치 부리라고 주신 돈 같냐? 그리고 이 차 잘 굴러다니거든?”
“운행 거리가 40만 킬로미터다. 이제 그만 얘도 쉬어야 하지 않겠냐? 너 지금 이 차한테 가혹행위 하고 있는 거야.”
“크크, 미친놈.”
“그나저나 우리 어디 가는 거냐?”
“금자 할머니 유언 지키러 간다.”
“저 뒤에 차는 뭐고? 뭐 아이들 나눠 줄 간식이라도 들은 거야?”
인호의 차 뒤에는 박스를 적재한 1톤 트럭이 뒤쫓고 있었다.
“간식은 아니고. 그보다 아이들이 더 좋아하는 거.”
“장난감? 요즘 애들 장난감 별로 안 좋아해. 그냥 현금 주는 걸 좋아하지.”
사기꾼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도곡동 광혜원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광혜원을 운영하는 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수녀복을 입고 있는 정송화 수녀였다.
인호는 오기 전에 광혜원 홈페이지에서 본 그녀의 세례명을 기억했다.
“안젤라 수녀님?”
“네, 안녕하세요.”
“정인호라고 합니다. 수녀님에게 이런 명함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명함을 받은 정송화 수녀가 환하게 웃는다.
“기분 안 나쁘세요?”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인호를 꺼림칙하게 여겼다.
“정인호 씨-. 인호 씨와 비슷한 분을 알고 있거든요.”
“네? 저하고 비슷한 사람이요?”
“네, 그런 분이 있어요. 마침 이곳에 오셨으니 인연이 되면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인연은 그 자리에서 바로 이어졌다. 그런데 인호가 이미 알고 있던 인연이었다.
“야, 임마! 니가 여길 어디라고 와! 썩 안 꺼져?”
검은 사제복을 입은 덩치 큰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인상을 와락 구기고 인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아시는 분이세요?”
정송화 수녀가 의아한 듯 묻자 인호가 어색하게 웃는다.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신부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살아있으면 잘 지낸 거지.”
“바티칸에 계신 거 아니었어요?”
“볼 일 있어서 왔다. 그런데 여기 왜 왔어? 내가 있는데 이상한 것들이 여기 있다는 헛소리는 할 생각하지 말고.”
박주완 신부.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그는 유명한 구마사제였다.
구마사제란 악한 기운과 싸우는 이들로 수많은 영화에서 소재로 쓰기도 했다.
인호와는 이미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사납게 으르렁거리고 있긴 해도 박주완이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인호였다.
“그래서 왜 왔는데?”
“전해 줄 선물이 있어서요. 저기요.”
인호가 트럭 기사에게 말한다.
“상자 내리죠.”
상자를 내려 차곡차곡 쌓은 후 트럭 기사가 떠나갔다.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나는 상자인데?”
“역시 개코시네요. 그런데 어쩝니까. 이 고약한 냄새가 이곳을 살릴 건데요.”
인호가 상자들 중 하나를 개봉했다.
“어머!”
상자 안에 가득 담긴 돈을 본 정송화가 화들짝 놀란다.
“익명의 독지가가 광혜원 아이들이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해 드리라고 준 돈입니다. 여기 건물 가격이 450억 원이라면서요?”
정송화가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20억씩 스물두 개, 그리고 10억짜리 하나. 450억. 분명히 전해 드렸어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정송화를 뒤로한 채 박주완이 인호를 잡아끈다.
“얘기 좀 하자.”
“아, 좀 놓고 가요.”
광혜원의 건물 뒤 후원에는 아이들이 가꾼 텃밭과 정원이 있다. 넓지 않지만 제법 잘 꾸며 놓았다.
“저거 무슨 돈이야?”
“말했잖아요.”
“독지가? 어디서 약을 팔아? 누가 450억이나 되는 돈을 선뜻 내놔?”
“그런 분이 있어요.”
“사실대로 말해라. 네가 하는 일 썩 바람직한 일 아니잖아. 그 일로 번 돈으로 우리 애들 살 집 사는 것 옳지 않아.”
“언제부터 광혜원 아이들이 신부님 애들이 된 겁니까?”
박주완이 어이가 없다는 듯 인호를 바라본다.
“너 정말 모르는구나.”
“네?”
“광혜원 만든 사람이 나다. 알겠냐?”
“아-, 정말요? 하는 짓만 보면 깡패 같아서 그냥 깡패 신부님인 줄 알았는데 좋은 일도 하시네요?”
“이런 미친-! 아무튼 설명해봐.”
인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이금자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박주완에게 들려주었다.
이금자 할머니에 대한 기사는 박주완도 읽은 것인지 쉽게 수긍한다.
“매년 아주 큰 돈을 후원해주시는 분이 한 분 있다고 들었는데 그분인가 보구나. 좋은 분이시니 하느님 곁으로 가셨을 거다.”
박주완이 성호를 그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듣기로 이탈리아에 급하게 볼 일 있다고 가셨다고 하던데.”
“이탈리아 일은 해결했어. 오랜만에 바티칸에 머물며 성직자답게 지내려고 했는데 한국에서 급한 연락이 와서.”
“문제가 있나 보네요.”
박주완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아. 토마스가 실패했다네.”
토마스 신부는 박주완과 같은 구마사제로 명성이 높은 신부였다.
“토마스가 반 시체가 돼서 바티칸에 왔어.”
인호가 놀란 듯 박주완을 바라본다.
토마스 신부가 박주완보다 실력이 조금 떨어진다고 하지만 저들 세계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신부였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구마사제들의 일이다.
비슷한 일을 하는 것 같지만 하는 일의 영역과 처리하는 방식이 달랐다.
괜한 참견은 좋지 않다.
“그나저나 좋겠다?”
“네? 제가요?”
“그래. 50억이나 챙겼다며.”
“하하, 그렇죠.”
박주완이 인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은근한 투로 묻는다.
“좋은 일 한번 하지 않을래?”
* * *
“아니, 박 신부 괜찮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순 도둑놈이었네.”
사기꾼이 짜증 섞인 음성으로 말한다.
“아니. 450억이나 줬는데 또 뜯어내? 이야, 칼만 안 들었지, 완전 강도야, 강도. 성직자라는 사람이 그래도 되는 거야?”
“적당히 해라. 좋은 일 하고 왔잖아.”
“좋은 일? 왜 니가 광혜원 리모델링 비를 내는데? 그리고 컴퓨터를 스무 대나 사줘? 침대며 가구도 다 바꿔 주고?”
“애들을 위한 거잖아.”
“450억 줬잖아. 그랬으면 됐지.”
“그 돈은 광혜원 매입하는 데 모두 써야 하잖아. 신부님 말 들어보니 광혜원이 많이 힘든가 봐. 예전만큼 후원도 많지 않고. 건물은 너무 낡아서 아이들이 위험할 수 있데.”
“자기 돈으로 하면 되잖아.”
“신부님이 돈이 어디 있냐?”
“그렇다고 30억이나 떡 하니 내놔? 아이고, 성인 나셨네. 야, 임마. 네 코가 석 자야.”
인호가 피식 웃는다.
“지금까지도 돈 없이 잘 살아왔다. 그리고 아직 20억이나 남았잖아.”
“그 돈이라고 멀쩡하겠냐? 안 봐도 뻔해. 남들 좋은 일에 다 쓰겠지. 그렇잖아?”
“알면서 묻기는 왜 물어.”
“그런데 박 신부님 왜 오셨데? 나는 박 신부님 보면 무서워.”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뚱보가 묻는다.
“일이 있어서 왔단다. 그런데 너는 박 신부님이 왜 무서워? 나처럼 널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 광혜원 출신이거든.”
“응?”
인호가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듯 되물었다.
“나 광혜원 출신이야.”
“그런데 왜 같이 안 갔어?”
광혜원에 갈 때 뚱보에게도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더니 싫다고 해서 사기꾼만 데리고 간 것이었다.
“그냥 옛날 생각날 것 같아서.”
“신부님도 잘 알겠네?”
“당연하지. 나 처음 광혜원 갔을 때는 신부님이 직접 운영하고 계셨으니까. 수녀님은 몇 년 후에 오셨고.”
“아-, 그래? 너 잘못 많이 해서 신부님한테 혼난 적 많구나.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아니거든.”
“그러면 왜 무서워해?”
뚱보가 남은 샌드위치를 한입에 털어 넣더니 말했다.
“사실 무섭다기보다는 미안했어. 내가 좀 많이 먹잖아.”
“좀이 아니라 아주 많이 먹지.”
“우씌! 아니거든.”
뚱보가 사기꾼을 쏘아봤다.
“내가 많이 먹으면 다른 애들이 조금 먹어야 하잖아. 그런데 신부님이 자기가 먹을 걸 나한테 주시곤 했어.”
“신부님은 네가 이렇게 된 것 알고 있냐?”
뚱보가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말하지 마. 분명히 나 저승 보내려고 할 거야.”
“히히, 내가 말해야지.”
사기꾼이 뚱보의 볼을 폭폭 찌른다.
“우씌! 그러면 나도 니가 인호 이름 팔아서 망령들한테 사기 치고 다닌 거 다 말할 거야.”
사기꾼이 뚱보의 입을 틀어막는다.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니 인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쏘아보고 있었다.
“내 이름을 팔아 사기를 쳐? 어떤 사기?”
“아니야. 오해야, 오해. 내가 막 사기 치고 그런 망령 아니거든. 정말 오해야.”
“너 계속 그러고 다니다 큰일 치른다. 그것도 다 업으로 쌓이는 거야.”
사기꾼이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운다.
한심하다는 듯 사기꾼을 바라본 인호가 창문에 고개를 쏙 내밀고 있는 영감에게 묻는다.
“영감님, 뭐 하세요?”
“그냥-, 바깥 경치 구경하고 있어.”
“그쪽은 좁은 골목이거든요? 너무 외져서 사람들도 잘 안 다니는 길 풍경은 뭐 한다고 봐요.”
“넌 뭘 할 때 꼭 이유가 있어서 하냐?”
영감이 소파로 와 앉는다.
“영감님 덕에 큰돈도 벌었으니 제가 한턱쏠게요.”
“한턱은 무슨.”
“최고급 유골함으로 바꿔 드릴게요.”
“나도. 나도 바꿔줘.”
사기꾼이 인호의 옆에 바짝 붙는다.
“지금 쓰는 유골함 너무 낡았어. 조만간 벌레도 끼겠어.”
“야. 내가 계속 관리하고 있는데 벌레가 왜 끼냐?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아니, 그렇잖아. 우리도 소미 씨 데리고 왔잖아. 그런데 왜 영감님 유골함만 바꿔줘? 우리도 바꿔줘. 이번에 새로 나온 유골함이 끝내준다더라. 납골묘 망령들 이야기 들으니 아름다운 외관과 안락함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았다고 하더라고.”
“아름다운 외관하고 안락함?”
인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그래. 좋아. 열심히 일했으면 보상이 있어야지.”
“아싸!”
이미 죽은 망령에게 유골함이 뭐 대단한 것이라고 저리들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뚱보야.”
“응?”
자르지 않은 김밥을 통째로 들고 물어뜯던 뚱보가 인호를 바라봤다.
“그런데 어쩌냐?”
“뭐가?”
“오늘 신부님 여기 오시기로 했는데.”
뚱보의 작은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안절부절못한다. 결국 김밥을 집어 던진 뚱보가 소파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도망치려 했다.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우씨! 그런 농담하지 마. 정말 무섭단 말이야.”
인호가 웃으며 소파에 등을 기댈 때였다.
똑- 똑- 똑-
인호와 망령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