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아-, 머리야. 여긴 어디야?”
깨어나 보니 집이 아니라 모텔이었다.
인호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철호 회장을 집을 나온 이후의 일을 떠올려 본다.
기분이 너무 우울해 혼자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셨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땡초가 포장마차에 들리는 바람에 그와 함께 노블레스에서 또 술을 마셨다.
“필름이 끊겼네.”
인호는 평소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진 않는다.
가뜩이나 위험한 줄타기를 하듯 살아가고 있기에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신 이유는 이금자와 이소미의 일을 연이어 겪어서였다.
돈 때문에 어머니를 죽이고, 돈 때문에 의붓딸을 죽이는 세상이다.
맨정신으로 버티는 게 더 힘들었다.
드르륵-
침대 아래 떨어진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땡초였다.
- 해장이나 하자.
대충 샤워를 하고 1층 로비로 가니 땡초가 기다리고 있었다.
“뭔 술을 그렇게 마시냐? 원래 그렇게 안 마시잖아.”
“세상이 그렇게 만드네.”
“가자. 황태해장국 죽이게 하는 곳 있어.”
해장국 집은 모텔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땡초의 말대로 국물이 아주 시원했다.
“그때 그거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때? 그거? 도대체 내가 어느 부분에서 알아듣고 대답을 해야 하는 거요?”
“우리 가게 왔을 때 말이야. 너 들어오는데 뒷목이 서늘해지더라. 그때 같이 온 거지? 평소에 너하고 다니는 애들은 그런 느낌 안 들거든.”
악귀들에게 오랫동안 시달리며 귀문이 조금 열린 것이리라. 땡초가 평생 안고 가야 할 업보이기도 했다.
“맞아요. 그때 잡혀간 놈 있잖아요.”
“엄마 죽인 그 개자식?”
“네. 그때 나하고 함께 온 분이 그 새끼가 죽인 어머니예요.”
“아-!”
땡초가 소름이 끼치는지 몸을 가늘게 떨고는 황태해장국 국물을 떠넘긴다.
- 모 기업 회장의 딸이 관악산에서 사체로 발견됐습니다. 놀랍게도 범인은…….
“정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그러냐? 회장 마누라면 돈도 많을 텐데 왜 죽였데?”
“모르죠.”
인호는 이소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입에 좀 맞아?”
“국물 좋네요.”
“인호야.”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은근하게 불러요? 그리고 말했지만 형 부탁 안 들어줘요.”
“하여튼 틈이 없어요, 틈이. 알았다.”
“형도 이제 그런 사람들하고 인연 끊어요. 겨우 이어붙인 목숨줄 끊길 수 있으니.”
“밥 먹으면서 그런 재수 없는 얘기를 해야겠냐?”
땡초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말이에요.”
“알겠어. 나 이제 정말 건전하게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아주 안 만날 수는 없어.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는 사람이라지만 나 어려울 때 도움 많이 준 사람들이야.”
“그건 형이 알아서 하시고요. 먼저 일어납니다.”
“마저 먹고 가지.”
“됐어요. 속도 다 풀렸고. 다음에 봐요.”
* * *
사무실에 들어선 인호가 인상을 찌푸린다.
사기꾼과 뚱보가 정면에 서 있다. 두 손을 가지런히 허리에 얹고 있는데 인호를 보기 무섭게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며 노래를 시작했다.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인호가 싸늘한 눈빛으로 사기꾼과 뚱보를 바라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인지 두 망령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율동을 멈췄다.
“그런 걸로 장난치고 싶냐?”
“아니, 우리는 그냥-.”
“소미 씨 데리고 온 게 너희들이다. 한 남자의 사랑하는 딸이 죽었고, 그 딸은 아버지만 혼자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고. 아무리 망령이라도 제발 생각이라는 걸 좀 해라.”
혀 차는 소리가 들리며 영감이 한마디 한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하더니 한 소리 듣지.”
“아, 영감님.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 못 들어보셨어요?”
사기꾼이 발끈했다.
인호가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댄다.
“술 냄새 많이 나네. 많이 마셨냐?”
“네. 많이 마셨어요.”
“어떤 기분인지 이해하지만 그래도 몸 생각도 해라.”
“그래야죠. 별일 없었죠?”
“아까 누가 왔다 갔어. 노크 몇 번 하더니 반응 없으니까 그냥 가더라고.”
“누군지는 모르고요?”
“나가서 보긴 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 좋은 양복 입었더라.”
볼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 찾아올 것이다.
인호는 커피 한 잔을 타 소파로 돌아와 천천히 마신다.
사기꾼과 뚱보는 인호의 눈치를 보다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마음 추스르면 나하고 어디 좀 가자.”
“어디요?”
“금자 할멈이 알려준 것이 있어.”
“금자 할머니가요? 어딜 가는데요?”
“가보면 알아.”
“오늘은 조금 그렇고 모레나 가요. 오늘내일 힐링 좀 해야겠어요.”
영감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계룡산 박수에게 가려는 게냐?”
“네. 하루만 쉬고 오려고요.”
* * *
사람의 발길이 쉬이 닿지 않는 계룡산 깊은 곳에는 ‘만신당萬神堂’이라는 곳이 있었다.
인호가 휴식을 위해 찾은 곳이 바로 이 만신당이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두 시간이 넘게 걸어야 할 정도로 멀기도 했고, 인적이 뜸한 곳이라 길을 잘 아는 이가 아니라면 찾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아침부터 새들이 요란하게 지저귀더니 네놈이 올 것을 알고 그랬구나.”
얼핏 보면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평범한 남자.
박갑수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실제로는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로 대한민국 박수들 중 최고로 꼽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너하고 나야 서로 볼 일이 없어야 좋은 것 아니냐.”
“듣고 보니 그렇네요.”
박갑수와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어린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인호 삼촌이다!”
“인호 삼촌!”
열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은 나이대가 다 고만고만해 보였다. 아이들을 본 인호가 환하게 웃는다.
“욘석들. 잘 지냈어?”
“네!”
한목소리로 대답하는 아이들에게 등에 메고 온 짐을 풀어놓는다. 스케치북이며 크레파스 같은 것들이 한가득이다. 아이들은 인호가 가져온 선물이 마음에 드는지 가방째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저리 좋아하는 것을……. 자주 좀 오지.”
“그러게요. 앞으로 자주 와야겠네요. 아니, 그것보다 찾는 사람들도 많은데 좀 오기 편한 곳으로 옮기시면 안 돼요?”
“안 된다. 장군님께서 나는 계룡산 떠나면 객사한다고 하셨어.”
“거참, 그 장군님께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헐떡이다 숨넘어갈 거라는 말씀은 안 하세요?”
박갑수가 피식 웃는다.
“이놈아. 운동 되고 좋지. 들어가자.”
인호는 박갑수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신당을 제외하면 보통 사람들이 사는 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슨 바람이 불어왔을꼬? 면상이 꾸겨버린 종이 쪼가리 같은 것이 좋은 일로 온 건 아닌 듯하고.”
“면상이 뭡니까, 면상이.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도 등재되신 분이 교양 없게.”
“크크, 네놈 입에서 교양이라는 말이 다 나오는구나.”
박갑수는 인간문화제였고 인호가 말한 대로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도 등재가 된 사람이었다.
죽은 이의 한을 씻어주고 좋은 곳으로 보내는 ‘진오귀굿’의 대가이기도 했다.
“별일 없지요?”
“일은 무슨-. 아. 미선이하고 영미가 지리산으로 갔어.”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요? 어쩐지 오늘 안 보이더니.”
박갑수가 머무는 만신당에는 아이들이 제법 많았다.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보육원을 운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부모가 있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을 박갑수가 돌보는 이유는 아이들 모두가 신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신병은 말 그대로 무당이 될 사람이 앓게 되는 병으로 고치는 방법은 무당이 되는 것뿐이다.
가끔 신병이 저절로 낫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극소수였다.
박갑수는 신병이 걸린 아이들을 부모와 상의하여 데리고 왔다. 부모들이 금전적인 지원을 하긴 하지만 아주 적은 돈이었다.
신병은 민간에서 치료할 수 없다. 그렇기에 박갑수는 직접 그런 아이들을 거두어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수 있게 돕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행복한 미래를 약속해 줄 수는 없지만, 이유 없이 아프지 않은 것만 해도 아이들에게는 큰 선물이었다.
박갑수처럼 신병에 걸린 아이들을 거두는 이가 또 있는데 지리산에 머물고 있는 만신 이혜옥이다.
‘능운정사’의 주인인 이혜옥은 무당들 중 최고라 손꼽히는 이였다.
그녀 역시 박갑수와 같은 이유로 아이들을 거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이들을 거두고 시기가 되면 각자 여자아이는 지리산으로, 남자아이는 계룡산으로 보냈다.
박갑수와 이혜옥은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신통하다는 무당과 박수들이 부모처럼 따르는 존재였다.
“아, 맞다. 네가 도울 일이 있다.”
“무슨 일이길래 박박수께서 제게 도움을 다 청하실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아니 박박수를 박박수라고 부르는데 왜 그러세요?”
“이놈이!”
“하하, 농담이에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박갑수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진다.
“충남에 아주 유명한 땅부자가 있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최부자라고 부르지. 얼마 전에 최부자 딸이 죽었어.”
“딸이 한을 품고 죽었어요? 진오귀굿이라도 해달래요?”
“그래. 그리고 굿은 이미 했어.”
“굿도 했는데 제가 도울 일이 뭐가 있어요?”
박갑수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본 인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묻는다.
“제대로 안 된 거예요?”
박갑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 하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있네요. 천하의 박박…… 아니 박갑수 옹께서 해결 못 하는 일도 다 있네요. 이유가 뭔데요?”
“흐음-, 그걸 나도 잘 모르겠어. 분명 나는 진오귀굿을 제대로 했거든. 그런데 이상하게 딸의 한이 풀리질 않아.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이 풀린 것인지, 한이 있기는 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어.”
박갑수 정도 되는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문제가 있기는 한 것 같았다.
“지리산 만신도 아는 일이에요?”
“벌써 자문 구했지. 직접 오기도 했고. 그런데 그 여편네도 영 신통치 않아.”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저도 일단 한 번 봐야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 * *
“인호 삼촌!”
한 아이가 인호의 이름을 부르며 공을 던졌다. 인호는 그 공을 받아 다른 아이에게 던져주었다.
그는 아이들과 어울려 피구를 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아이들 주위로 망령들이 제법 보인다는 것이다.
신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이기에 귀문이 일반인에 비해 많이 열려있었다. 그렇기에 망령들이 달라붙은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망령들이 붙어있기는 해도 아이들에게 해코지할 망령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망령들이 있었다면 박갑수가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인호만큼 효율적으로 망령을 처리할 수는 없지만, 악귀 하나 요절내는 일 정도는 박갑수에게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다.
“삼촌.”
“아이쿠, 우리 민수구나. 이게 뭐야? 삼촌 그린 거야?”
민수라 불린 아이가 스케치북에 뭔가를 그려서 인호에게 내밀었다.
그림의 대부분이 검은색이다. 검은 옷을 위아래로 입고 있는 남자인 듯한데 누가 봐도 인호를 그린 것으로 보였다.
“이야, 민수 그림 너무 잘 그린다. 고마워.”
한 시간가량 아이들과 더 놀고 있을 때 하얀 베옷을 입은 박갑수가 다가오며 말한다.
“가자.”
* * *
잠시 후 도착한 최부자 집 앞에 차를 세운 인호가 박갑수를 보더니 묻는다.
“여기 뭐 하는 집이에요?”
“왜?”
“종합선물세트도 아니고 뭔 망령들이 이렇게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