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 대치동 살인사건의 범인은 놀랍게도 살해된 이 씨의 아들 윤 씨로 밝혀졌습니다. 윤 씨가 어머니를 살해한 이유는 재산을…….
인호가 티비를 끈 후 소파에 등을 기댄다.
윤재상이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범행을 극구 부인했으나 이금자가 주방에 숨긴 그의 시계가 발견되자 범죄 사실 일체를 인정했다.
“세상이 어째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돈이 뭐라고 낳아 준 어머니를 죽이냐?”
말을 한 사기꾼이 옆에 있는 이소미를 보고는 어색하게 웃는다.
윤재상이 돈 때문에 어머니인 이금자를 살해했다면 이소미는 그 돈 때문에 새어머니에게 살해당했다.
“할머니가 떠나시면서 아주 큰 선물을 주셨어.”
“그러게 말이다. 그 할멈이 대은 그룹 이철호 회장하고 잘 아는 사이일 줄 누가 알았겠누.”
“영감님. 수고하셨어요. 영감님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어요.”
영감이 이금자 곁에 없었다면 그녀는 인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금쪽같은 아들이 살인자로 밝혀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소미 씨. 지내기에 불편하지 않아요?”
“네, 괜찮아요. 다들 저한테 잘해 주시잖아요.”
“다행이네요.”
인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럼 다녀올게요.”
* * *
대은 그룹 회장실.
이철호는 인터넷 기사를 읽고 있었다.
“흐음-. 금자 누님.”
슬픔을 참는 듯 목소리가 잠겨 있다. 그는 옆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더니 오늘 아침에 온 문자를 확인했다.
- 이금자 할머니께서 회장님께 남긴 것이 있습니다.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였다.
누군가 장난을 치는 걸로 보이진 않았다.
이금자와 자신 사이에 친분이 있다는 것은 그녀의 아들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 회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온다. 계절에 맞지 않게 두꺼워 보이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이철호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마다 나오는 그의 버릇이다.
“자네가 금자 누님이 남긴 것을 가져온다는 사람인가?”
“네, 회장님.”
“나와 금자 누님 사이의 일을 어떻게 알지?”
“직접 들었습니다.”
“언제?”
“어제요.”
쾅-!
이철호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뭐 하는 놈인지 모르지만 장난을 치는 것이라면 상대를 잘못 골랐다.”
“제가 감히 대은 그룹 회장님께 장난이나 치겠다고 이렇게 찾아왔겠습니까?”
“금자 누님은 며칠 전에 죽었다. 그런데 어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장난이 아니다?”
이철호가 으르렁거렸다.
재계의 호랑이라고 불리는 남자다운 박력이다.
이철호가 인터폰 버튼을 누른다.
잠시 후, 구두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 네 명이 안으로 들어온다.
“지금부터 잘 생각하고 말해라. 네 혓바닥이 네 목줄을 끊어 놓을 수도 있으니.”
“어이쿠야. 무서워서 오금이 저리네요.”
남자가 장난스레 몸을 떤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철호가 인상을 찌푸린다.
“너 뭐 하는 놈이냐?”
“이런 놈입니다.”
남자가 명함을 꺼내 이철호에게 건넨다.
“극락 흥신소 소장 정인호. 대한민국 영매 협회 회장?”
“네, 회장님.”
인호가 살짝 고개를 숙인다.
“어처구니가 없군. 흥신소 소장에 영매 협회라니. 이러면서도 장난이 아니라고? 손 실장. 저 물건 치워. 마음 같아서는 잘근잘근 다져서 보내고 싶지만 정신 온전하지 않은 놈에게 손찌검했다는 소리 들을까 봐 그냥 보내 주는 거야.”
경호원들이 인호에게 다가온다. 손 실장이라 불린 사내가 인호의 팔을 잡으려 할 때였다.
“할머니께서는 당신께서 회장님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잠깐!”
경호원들이 인호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려는 순간 이철호가 짧게 외쳤다.
“다시 말해봐. 뭐라고?”
“회장님께서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 목숨을 구해 드린 적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이철호가 인호를 잠시 바라보다 경호원들을 향해 손짓한다.
“나가봐.”
경호원들이 인사를 하고 나가자 이철호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앉는다.
“누구에게 들었어?”
“할머니 말씀으로는 그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회장님과 할머니뿐이라던데요.”
그 말이 맞았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이금자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탐욕스러운 그 아들 녀석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
“영매 협회? 여긴 뭐 하는 곳인가?”
이철호가 인호의 명함을 들어 올리며 묻는다.
“말 그대로 영매들이 모인 협회입니다. 영매는 영혼과 사람의 통로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그 협회 회장이고요.”
“그러니까 네, 아니 자네 말은 자네가 금자 누님의 영혼과 만났다는 것인가?”
“할머니에게는 죄송하지만 그 아들 새끼 경찰이 잡을 수 있도록 해준 것도 접니다. 물론 언론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요.”
“그 망종이 드디어 일을 저질러 버렸어. 그냥 돈 줘 버리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듣지 않더니…….”
이철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금자 누님이 내 목숨을 어떻게 구했는지는 아나?”
“그 이야기까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저 가난했던 시절에 목숨을 구해드렸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때는 전부 가난했지. 우리 집도, 금자 누님 집도. 누님과 내가 살던 동네는 말 그대로 달동네였고, 판자촌이었어.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줄줄 비가 샜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는 나를 키우기 위해 안 하신 일이 없어. 새벽부터 일을 나가셔서 저녁 늦게까지 일하셨지.”
과거를 회상하는지 이철호의 눈빛이 아련해진다.
“아마 내가 아홉 살 되던 해 겨울이었을 거야. 한동안 내린 눈이 날이 따뜻해지며 녹았어. 당연히 집에 물이 샜지. 센 물이 쌓아둔 연탄을 적신 거야. 젖은 연탄은 버리는 게 맞지만 아까운 생각에 어머니가 그 연탄을 사용하셨지. 연탄을 갈고 어머니는 일터로 가셨어. 당연히 나는 자고 있었지. 젖은 연탄에서 연탄가스가 나왔어.”
“아-!”
“그때 금자 누님이 날 구해주셨지. 돈이 없어 먼 학교까지 걸어가려면 새벽에 집을 나서야 했는데 연기가 줄줄 흘러나오는 우리 집을 보고 들어와 날 업고 밖으로 나오신 거야. 후후, 금자 누님이 아니었다면 나도 없었겠지. 이 대은 그룹도 없었을 테고 말이야.”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철호는 인터폰으로 비서에게 커피를 내오라고 지시한 후 말을 잇는다.
“나는 악착같이 돈을 벌어 큰 부자가 되었어. 생명의 은인인 누님을 돕고 싶어 몇 번이나 말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하셨어. 상황이 바뀌었다면 나도 그랬을 거라면서 말이지. 거짓말처럼 누님도 부자가 되셨어. 돈이 조금 모이면 작은 땅을 사고, 또 돈이 모이면 땅을 사고 반복하더니 어느 순간 강남 복부인이 되어 있었지. 하아-, 그 썩을 돈이 문제야. 그 금수만도 못한 새끼가 돈 때문에 누님을-.”
이철호가 한숨을 푹 내쉰다.
“누님은 좋은 곳으로 가셨나?”
“네. 좋은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그래, 누님이 내게 남기신 것은 뭔가?”
“사실 할머니가 남기신 것은 없습니다.”
이철호가 의아한 듯 인호를 바라본다.
“오히려 제게 기회를 주셨죠.”
“기회라. 어떤 기회?”
“회장님을 이렇게 독대할 수 있는 기회요.”
“설마 금자 누님을 팔아 내게서 뭐라도 얻어내려는 건가? 그런 이유라면 조금 실망스럽군.”
“아닙니다. 회장님께 무언갈 얻어내려 하는 건 맞지만 할머니를 팔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뭔가? 생면부지의 자네에게 내가 뭔가를 줄 이유가 없지 않나.”
인호가 말하기 전에 자세를 바로 한다.
“이소미.”
“…….”
이철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우리 소미도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침묵이 흐른다.
비서가 커피를 가져왔지만, 이철호는 커피를 마실 생각도 하지 않고 인호를 쏘아봤다.
“설마 우리 소미도 금자 누님과 같은 경우인가?”
인호가 안타까운 듯 가벼운 한숨을 토해낸다.
“그렇습니다.”
* * *
오후 5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귀가한 이철호를 박미라가 의아한 듯 바라본다.
“일찍 오셨네요?”
평소에는 7시가 훌쩍 넘어서 귀가하는 이철호였다.
“그럴 일이 있었어. 차 한잔하지.”
“어떤 차로 드릴까요?”
“우전이 좋겠군.”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으니 곧 박미라가 차를 우려 내온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안색이 안 좋아요.”
“아니야.”
이철호는 말없이 차를 마신다.
30분 정도가 흘렀을 때 고용인이 다가온다.
“박 변호사님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요.”
이철호가 말을 하니 박미라가 묻는다.
“박 변호사 불렀어요?”
이철호의 법률문제를 대리해 주는 박한경 변호사가 들어와 꾸벅 인사한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앉지.”
그 말에 박한경이 자리에 앉는다.
이철호는 말없이 차를 마시며 박한경을 바라본다.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것인지 박한경이 어색하게 웃는다.
이철호는 차를 모두 마신 후 잔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박 변호사.”
“네, 회장님.”
“내가 유서 내용을 바꾼 게 언제지?”
“지난해 8월이니 딱 1년 지났습니다.”
“그렇지?”
이철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유서의 내용을 나와 자네 말고 다른 누군가가 알고 있을까?”
“아닙니다. 유서 내용은 회장님과 저밖에 모릅니다.”
“그렇지?”
“네, 회장님.”
“바뀐 유서 내용이 뭐였지?”
“회장님?”
박한경이 놀란 듯 이철호를 바라본다.
“왜? 집사람이 옆에 있어서?”
“그것보다…….”
“유서 내용이 집사람에게 안 좋은 거라서?”
박한경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이철호가 박미라에게 시선을 옮긴다.
“내가 작년에 유서 내용을 바꿨어. 내가 죽으면 모든 재산을 소미에게 물려주겠다는 내용이지.”
“그러셨어요? 잘하셨어요. 소미는 당신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잖아요. 당연히 소미가 물려받아야죠.”
“이해해주니 고맙군. 소미 소식은 아직 없나?”
“경찰에 실종신고 했으니 곧 연락이 있겠죠. 당신도 아시잖아요. 소미 가끔씩 말도 없이 며칠 동안 여행가고 그러잖아요. 곧 연락 올 거예요.”
“연락이 온다? 후후, 그러려나?”
이철호가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인다.
“당신 다시 담배 피워요? 정 박사 말 못 들었어요? 당신에게 담배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내 걱정해주는 건가? 고맙군.”
이철호의 건조한 반응에 박미라의 눈빛이 묘하게 변한다.
그때 고용인이 다가온다.
“회장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들어오라고 해요.”
잠시 후, 한 남자가 응접실에 들어섰다.
더운 날씨에도 두꺼운 겨울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박미리와 박한경이 들어선 남자를 바라본다.
“누구예요?”
이철호는 박미라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들어선 남자에게 말한다.
“자네가 직접 소개하지 그러나?”
남자가 박미라와 박한경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극락 흥신소 소장 정인호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