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4화
분신사바를 하던 곳에는 몸 전체에서 짙은 붉은색 기운이 풀풀 흘러나오는 악령이 서 있었다.
기이하게 뒤틀린 이목구비를 가진 악령의 두 눈은 증오로 가득 차 붉게 빛났다.
살기 어린 눈빛으로 인호를 바라보는 악령은 몸에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인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인간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이라지만 빤스는 입어야 하는 것 아니냐? 너 이거 심각한 테러야. 빨리 내 눈한테 사과해!”
“낄낄낄! 내가 보이는 것 같네? 재미있는 놈이로구나. 그렇다면 내 일을 방해하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것쯤은 알 텐데?”
“잘 알지. 그래서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잖아. 이만 갈 테니까 선행 마일리지 차곡차곡 쌓아서 승천해라.”
인호가 몸을 돌리자 악령이 차갑게 외친다.
“그냥 가게 둘 것 같은가?”
그러자 인호와 악령 사이에 세찬 바람이 불었다.
공사 현장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던 작업 도구들이 바람에 날려 인호를 위협했다.
하지만 인호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보아하니 나쁜 짓 하다 복상사한 색귀인 것 같은데 아까 그 어린 애들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어?”
“알면서 뭘 물어? 어른들의 재미있는 놀이를 알려주려고 했지. 낄낄.”
“혼의 색이 시뻘건 것을 보니 이미 많은 악행을 쌓은 것 같은데 좋은 말년 보내기는 힘들겠어.”
색귀가 인호의 뒤를 힐끔 바라본다.
“함께 있는 잡귀를 믿고 천지분간 못하고 설치는 모양인데 그러다 험한 꼴 보게 될 거다.”
“아유, 무슨 그런 말씀을 다 하시나. 저는 아무 상관 없는 착한 망령이에요. 그러니 볼일 보세요.”
인호가 고개를 돌려 사기꾼을 바라봤지만, 그는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치사하기는……. 얼마 전 도서실 여고생 강간 살인사건. 그것도 너지? 뉴스를 보니 범인은 자신이 뭘 했는지도 몰랐다고 하던데.”
색귀가 묘한 웃음을 짓는다.
“나름 즐거웠지.”
“죄를 지었으면 응당 대가를 받아야지. 내가 살고 있는 낮의 세계에도, 그리고 네가 살아가는 밤의 세계에도 지켜야 할 법도가 있으니까.”
색귀는 두 팔을 벌리고 몸을 들썩이며 미친 듯이 웃는다.
그에 따라 그의 중심에 달린 것도 춤을 추듯 흔들렸다.
“크하하하. 누가 나를 심판할 수 있단 말이냐? 난 이미 큰 힘을 얻었는데.”
“아씁, 내 눈. 망령이 선행을 쌓게 되면 그 대가로 힘을 얻게 되지. 그래서 그 힘으로 승천을 하고 극락에 가게 되는 거야. 우스운 것은 악행을 쌓아도 힘을 얻게 된다는 거지. 하지만 그 힘이 과연 바른 걸까?”
“그런 것 따위 알 필요도 없지. 중요한 건 내가 큰 힘을 얻었고 네가 이곳에서 내게 죽게 된다는 거야.”
인호가 거만하게 말하는 색귀를 보다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황금색, 푸른색,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방울.
방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껴졌는지 색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인호에게 묻는다.
“뭘 하려는 거지?”
“내가 도력이 강하신 다른 영매님들처럼 강한 영혼을 불러오거나 하지는 못해. 하지만 딱 하나의 존재는 부를 수가 있거든.”
“크하하! 설마 옥황상제라도 불러오려는 거냐?”
딸랑- 딸랑-
인호가 손을 흔들자 영롱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진다.
“감히 악령 주제에 상제님을 함부로 입에 올려? 누굴 불렀냐고? 잠시 후면 알게 될 거야. 어둠보다 더 깊은 어둠에 사는 이여. 나의 부름에 응하소서. 이곳에 오셔서 양과 음의 조화를 깨려 하는 악령을 벌하소서. 어서 오소서, 어서 오소서.”
인호의 눈에 파란 귀화가 일렁이며 주변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모여든다.
“무, 무슨 개수작이야. 오긴 누가 온다고 그래!”
인호가 씨익 웃으며 색귀의 뒤쪽을 바라봤다.
“이미 오셨어.”
색귀가 뒤를 돌아보다가 깜짝 놀라 주저앉았다.
그곳에는 검은 슈트를 입은 저승사자가 서 있었다.
색귀는 도망치려 했지만, 저승사자가 손을 뻗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고통을 호소하며 몸부림쳤다.
저승사자가 무서운 눈빛으로 색귀를 쏘아봤다.
“이미 어둠이 된 네가 밝음을 쫓아 선행을 쌓고 극락에 가려 노력하지 않고 어찌하여 더 짙은 어둠이 되려고 하느냐?”
“죄, 죄송합니다.”
“네가 가야 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다. 네가 쌓은 악업이 너무도 커 저승 판관의 판결도 필요 없을 것 같구나. 초열지옥에서 영겁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혼이 재가 되고, 또 재가 될 것이다. 그곳에서 참회하여 새롭게 태어나거라.”
저승사자가 손을 흔들자 색귀 뒤쪽 공간이 일렁이며 지옥의 문이 열린다. 수많은 손들이 지옥의 문에서 나와 색귀의 몸을 잡아당긴다.
“아, 안돼! 제발 살려주…….”
색귀는 결국 지옥의 문 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인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저승사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색귀에게 말을 할 때 근엄했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불량스러운 표정이 저승사자의 얼굴에 자리했다.
“야, 이 씨방새야.”
“네? 네? 잘 못 들었습니다?”
“안 들려? 어떻게 막힌 귀를 뻥 뚫어줘? 응? 초열지옥에서 쇠꼬챙이 가져다 뚫어줘? 니가 정말 죽고 싶어 그러지?”
“무슨 말씀이신지…….”
인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딴청을 피우자 저승사자의 눈빛이 더 사나워진다.
“모르는 척하지? 그러면 모르는 채로 그냥 한 번 죽어봐.”
저승사자가 다가서자 인호가 황급히 뒤로 물러선다.
“압니다. 다 알아요. 항상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진정하세요. 아무리 사자님이라도 아직 갈 때도 안 된 생령을 죽이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고매하신 령격을 지니신 사자님께서 씨방새가 뭡니까, 씨방새가.”
“씨방새를 씨방새라고 하지 그러면 뭐라고 해? 고매하신 령격을 지닌 내가 너 때문에 상제님께 얼마나 깨졌는지 알아?”
인호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딴청을 피운다.
“오호라.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아, 쫌! 알겠어요. 그런데 그 자식이 죽은 건 제 책임이 아니잖아요.”
“네가 죽이지 않았어도 너 때문에 죽었잖아. 네가 망령의 원한을 풀어준다고 설치지만 않았어도 그 자식이 자살했겠어?”
“그러면 그 자식이 잘했다는 겁니까?”
인호가 따지듯 말한다.
“누가 잘했대? 그래. 네 말대로 그 자식 죽어 마땅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사람은 태어나는 날이 정해지며 가야 할 날도 정해져. 그런데 너 때문에 명계의 법칙이 어긋나고 있잖아. 지금까지야 내가 상제님께 말을 잘해서 넘어갔지만 이제 나도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
인호가 저승사자에게 다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한다.
“아이, 왜 이러실까? 그래도 제가 한 것도 많잖아요. 승천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 누가 승천시켰습니까? 다 제가 한 거 아닙니까?”
“그게 니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이유인 건 알고 있냐?”
“알지요. 다 알지요. 그러니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 됐어. 한 번 더 이런 일 생기면 아주 그냥…… 에이, 씨방새. 너 계속 그렇게 하다 정말 한 방에 훅 간다.”
그 말을 끝으로 저승사자의 모습이 흐릿해지며 사라진다.
저승사자가 사라진 곳을 잠시 보고 있던 인호는 그대로 뒤로 돌아 사기꾼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야, 이 씨방새야. 뭐? 어쩌고 어째? 상관하지 말고 그냥 볼일 보라고? 씨방새야. 오늘 너 나한테 한 번 더 죽자.”
* * *
“괜찮으세요?”
인호의 물음에 조수석에 앉아 있는 영감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바라본다.
“매년 이맘때면 가자고 하셨잖아요.”
영감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제 며칠 후면 영감의 제사였다.
영감은 매년 제사 때가 되면 인호에게 부산에 가자고 했었다.
일 년에 단 하루 자신의 후손들을 보는 날인 것이다.
영감을 비롯한 인호 주변의 망령들은 활동 영역이 정해져 있다. 인호의 곁에서 일정 범위 이상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영감이 부산에 가려면 인호도 함께 가야 한다.
“작년에 다 봐놓고 뭐 하려고 그런 말을 해.”
“후손들이 제사 안 챙겨서 삐치셨어요?”
“삐치기는 누가 삐쳐? 그냥 별로 가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삐친 거 맞네.”
작년에도 인호는 사무실 망령들을 이끌고 부산에 갔었다.
그런데 재작년까지 제사상을 잘 차리던 영감의 후손들이 갑자기 작년에는 제사상을 차리지 않은 것이다.
후손들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이유야 뻔하다.
귀찮아서.
“이럴 줄 알았으면 도장 찾아주지 말 걸 그랬어.”
“후손들 가난하게 사는 거 보면서 가슴 아파했잖아요.”
“그랬지. 좀 먹고 살게 됐다고 조상 섬기는 걸 귀찮아하는 괘씸한 놈들인지 알았으면 도와주지 않았을 거야. 일 년에 단 하루잖아. 그 하루도 귀찮아하는 게 말이 되냐?”
애써 덤덤하게 말하고 있지만 목소리가 기운이 없고 풀이 죽어 있다.
“요즘은 제사 약식으로 치르거나 생략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러니 영감이 이해해요.”
“나 아무렇지 않아. 사실 말은 안 했지만 부산까지 내려가는 것도 귀찮았어.”
“정말요?”
“정말이라니까. 나 일해야 하니까 말 그만 시켜.”
영감이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말한다.
“잘 좀 찾아봐요. 계속 요즘 같으면 정말 힘들어요.”
최근 인호는 매일 힘들다, 힘들다 떠들고 다녔다.
인호 주변의 망령들은 인호가 하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주변에 떠도는 망령들을 위해 매일 같이 상을 차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돈도 돈이지만 웬만한 노력과 정성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요즘 다른 녀석들도 계속 돌아다니고 있어.”
인호 역시 알고 있었다.
영감을 비롯한 사무실 망령들은 인호를 떠나서는 이승에 머물 수 없다.
매일 같이 투닥거리지만 누구보다 인호를 생각하는 망령들이었다.
“큰 건수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죠.”
“큰 건수가 그렇게 막 잡히겠냐? 돈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객사하겠냐고.”
“그건 또 그래요. 진짜 추잡해서 안 하려고 했는데 다시 장례식장을 돌아야 할까 봐요.”
영감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거기 가면 머리 아파.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아주 오만 망령들이 다 들러붙어서 하소연하잖아. 너도 그게 싫어서 장례식장에 발 끊은 거 아니냐.”
“그렇죠.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요.”
“조금만 더 버텨보자.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고 언젠가 좋은 날 오겠지.”
낮이라 그런지 도로에 차가 많지 않다.
“뭔 놈의 기름값이 이렇게 비싼지 모르겠어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다시 출발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영감이 인호를 부른다.
“인호야. 저기.”
차를 길가에 세운 후 영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다.
횡단보도 앞에 한 여인이 쪼그려 앉아 있다.
희미한 푸른 빛을 내는 것을 보니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망령이다.
여자 망령은 하염없이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다.
인호와 영감이 여자 망령의 시선을 쫓아 횡단보도 반대편을 확인한다.
“아, 이번에도 무료봉사해야 할 것 같은 강한 기분이 드는 건 저만 그런가요?”
영감이 피식 웃는다.
“나도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