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3화
출고된 지 10년은 한참 더 지난 인호의 승용차가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야, 똑바로 안 보냐?”
“아 쫌! 보고 있잖아.”
“누가 지나가는 여자들 보래? 앙? 한 많은 망령들을 찾으라고 이 사기꾼아.”
조수석에 앉은 사기꾼이 구시렁거린다.
“오늘 내 차례도 아니고만. 대타 뛰는 것도 기분 안 좋은데 그만하지?”
“뚱보가 기분이 안 좋다잖아.”
“내가 알 게 뭐야?”
“너 그러는 거 아니다? 너도 나 처음 만나고 몇 년 동안은 죽은 날만 되면 우울해하고 그랬잖아. 어디 신입 망령 때 생각 못 하고.”
오늘은 뚱보가 죽은 날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하루종일 풀이 죽어 있다.
평상시라면 뚱보와 함께 망령들을 찾는 ‘일감 찾기’에 나섰겠지만 어쩔 수 없이 사기꾼과 함께 나설 수밖에 없었다.
“요즘 저승사자들 일 잘하나 봐. 망령 하나 보기가 힘들어. 이래서야 누군 밥이나 먹고 살겠냐고.”
“들으라고 하는 말이냐? 그리고 내가 굶으면? 니들도 굶는 거야. 그러니까 눈 똑바로 뜨고 잘 좀 보라고.”
“잘 보고 있다고.”
창밖을 보던 사기꾼이 흐뭇한 웃음을 짓는다.
“올해가 역대급 더위라더니 그렇긴 한가 봐.”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저기 봐. 아주 그냥 헐벗고 다니잖아. 오우야, 저게 입은 거야 벗은 거야?”
“또 여자 보고 있냐? 이걸 콱 그냥.”
“알았다고. 그런데 이쪽 길은 처음 아니냐?”
인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매일 다니던 길만 다니면 없던 망령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해? 안 다니던 곳도 다니고 해야지.”
“인호야. 저기.”
“응? 뭐?”
인호가 사기꾼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끼이익-
길가에 차를 멈춘 인호가 차에서 내려 바라본 곳에는 공사가 중단된 건물이 있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해서인지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뭔가 있지? 그렇지?”
인호가 말없이 공사가 중단된 건물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야, 같이 가.”
* * *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위험해 보이는 건물 안에 네 명의 여자가 둥글게 앉아 있었다.
교복을 입은 것을 보니 고등학생인 것 같다.
그녀들의 사이에는 네모난 종이가 놓여 있는데, 네 귀퉁이에는 초가 켜져 있고 가운데에는 둥그런 원과 기이한 도형이 그려져 있다.
“정말 이러면 귀신이 오는 거야?”
서가영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여자가 친구들을 보며 묻는다.
“그렇다니까. 3반 영미 알지? 영미가 얼마 전에 분신사바해서 귀신 불러냈잖아.”
이미선의 말에 친구들이 모두 깜짝 놀란다.
“정말 귀신이 오면 소원도 막 들어주고 그래?”
“맞아.”
“그래서 영미는 무슨 소원 빌었대?”
다른 친구의 물음에 이미선이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걔가 조금 찌질하잖아.”
“맞아. 걔 완전 개찌질해. 선혜 아니었다면 왕따 당했을걸. 선혜 얘기하니까 갑자기 빡치네. 지 남친이 학교 짱이면 짱이지 뻑하면 개지랄이야.”
이미선이 친구의 어깨를 툭 친다.
“됐고. 아무튼 영미가 분신사바로 불러낸 귀신한테 멋진 남친 생기게 해 달라고 했나 봐.”
“그래서? 정말 남친 생겼어?”
“생겨 봐야 똑같이 찌질한 놈이겠지.”
이미선이 비밀이라는 듯 작은 소리로 속삭이자 친구들이 모두 놀란다.
“명진 고등학교 최태운 알지?”
“명진고 킹카 최태운?”
친구들이 한목소리로 외친다.
“그래. 그 명진고 킹카 최태운이 영미한테 사귀자고 했대.”
친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미선을 바라본다.
“내가 거짓말 하고 있는 것 같아?”
“누가 그렇대? 그런데 정말 귀신이 그런 소원을 들어줘? 아니, 들어줬음 좋겠다. 그러면 나는 레이니 오빠들하고 사귀게 해달라고 할 텐데.”
“난 히어로 오빠들.”
“난 아무나 다 좋아.”
그런 친구들을 이미선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다.
“미친년들…… 하여튼 생긴 것도 내수용인 것들이 소원도 내수용이야. 귀신이 그런 소원도 진짜 다 들어주면 마이클 콜린이랑 사귀고 싶다고 할 거야.”
“요즘 가장 핫한 헐리우드 영화 배우?”
“졸라 잘 생겼잖아. 역시 미선이는 우리들하고 스케일이 달라. 그런데 너 영어 못하잖아.”
“배우면 되지 미친년아.”
잠깐 잡담을 하다가 이미선이 친구들을 바라보며 말한다. 조금 전과는 달리 차분한 음성이다.
“자, 이제 정말 시작하자.”
볼펜 하나를 꺼내 손에 쥐고는 종이 중앙으로 팔을 뻗는다. 그러고는 친구들에게 볼펜을 잡으라고 눈짓을 한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당근이지. 지금까지 분신사바해서 죽었다는 사람 못 봤거든.”
이미선이 어서 손을 잡으라는 듯 눈짓을 하자 친구들이 마지 못해 손을 잡는다.
“에이, 몰라. 그냥 하는 거지.”
두 명의 친구가 손을 잡고 서가영만 남았다.
“가영아. 너만 남았어. 어떻게 할 거야? 그렇게 겁나면 안 해도 돼.”
“난 그냥…….”
이미선이 서가영의 말을 자른다.
“대신 소원도 없는 거야. 얘들아. 그냥 우리끼리 하자.”
서가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뻗는다.
“누가 싫다고 했니? 그냥 조금 겁이 나서 그런 거지. 나도 하자.”
“미친년. 결국 할 거면서 빼기는…….”
이미선이 친구들과 눈을 맞추더니 천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분신사바 분신사바 오잇떼 구다사이.”
이미선의 선창에 친구들이 따라 주문을 외운다.
“분신사바 분신사바 오잇떼 구다사이.”
이미선과 친구들이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자 더운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촛불이 흔들리고 모두가 흠칫 몸을 떨었다.
공간이 일렁이는 듯한 느낌.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이미선과 친구들을 두고 한 바퀴를 도는 듯했다.
친구 중 한 명이 말을 하려 하자 이미선이 눈치를 준 후 말한다.
“오셨나요?”
여자들이 돌리고 있던 볼펜이 강한 힘에 멈춰 서고 중앙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여자들이 서로를 바라본다.
하지만 곧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볼펜이 천천히 움직여 그려낸 것은 ‘O’였다.
“저희들의 부름을 들으신 건가요?”
볼펜이 또다시 ‘O’를 그렸다.
긴장한 이미선이 친구들을 바라본 후 귀신에게 묻는다.
“남자분이신가요? 아니면 여자분이신가요? 남자분이시면 동그라미를 그려주세요.”
‘O’
“그러면 저희들이 바라는 것을 들어주실 수 있나요?”
‘O’
이미선과 친구들의 얼굴에 기대가 가득한 웃음이 걸렸다.
가장 먼저 소원을 말하기 위해 입을 뗀 것은 분신사바를 주도하고 있는 이미선이었다.
“제 소원은 말이죠.”
그때였다.
“거기까지.”
갑자기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이미선의 주문이 중단되었다.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슈트를 입고 있는 한 사내가 다가왔다.
인호였다.
그의 등장에 놀란 여자들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쥐고 있는 손에서 볼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볼펜이 손에 붙어있는 것처럼 강한 힘이 그녀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붙잡고 있었다.
“아저씨 누구세요?”
이미선이 적개심이 가득한 음성으로 묻는다.
“그러는 너는 누구세요?”
“그건 아저씨가 알 바 아니잖아요.”
인호는 이미선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온다.
중앙에 놓인 종이를 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묻는다.
“소원은 말했니?”
“이제 막 귀신님이 소원을 들어주시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아저씨가 방해한 거예요. 알겠어요?”
“아니, 모르겠는데?”
“이 아저씨가…….”
인호가 더 가까이 다가선다.
“다행이네.”
그는 자세를 낮추며 손을 뻗어 볼펜을 쥐고 있는 여자들의 손 위에 얹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나직이 중얼거린다.
“뭐 하는 거예요?”
인호는 이미선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주문을 외운다.
주문을 마치고 인호가 눈을 뜨자 그의 눈에 파란 귀화가 일렁였다.
여자들이 놀라 볼펜을 놓치며 뒤로 넘어졌다.
여자들이 넘어졌음에도 볼펜은 종이의 한가운데 위에 수직으로 서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인호가 여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위험한 장난이야. 그만 돌아가.”
“아저씨가 뭔데 우리들한테 이래라 저래라에요?”
이미선의 뾰족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 이 장난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저씨지. 그리고 돈도 안 되는 무료봉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살짝 빡이 친 아저씨기도 하고.”
“뭐래? 재수 없어.”
“그래. 난 재수 없는 아저씨고 성격도 더러운 아저씨야. 그러니까 이만 집으로 돌아가. 그리고 다시는 이런 장난치지 마.”
“아저씨가 우리들이 뭘 하던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가 분신사바를 하던 분신자살을 하던 우리 마음 아니에요?”
이미선의 말을 들은 인호의 표정이 싸늘하게 바뀐다.
“농담이라고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거 아니다. 말에는 힘이 있어. 그래서 어른들께서 항상 입조심하라고 그러시는 거다.”
“뭐래?”
인호가 한숨을 내쉰다.
“니들 기브 앤 테이크는 알지?”
“우리가 바본지 알아요? 그것도 모르게.”
“그래. 너희들 바보 아니지. 요즘 애들 똑똑하잖아. 아저씨 말 잘 들어봐라. 세상의 모든 것들은 기브 앤 테이크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즉, 그 말은 세상에 공짜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야. 일방적이기만 할 것 같은 부모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야. 물론 다른 것들에 비해 법칙이 적게 적용되기는 하지만 말이야. 부모님이 주신 사랑을 되갚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패륜아라고 부르며 손가락질을 하지.”
“뭐라는 거야? 하는 말이 꼭 우리 꼰대하고 똑같아. 재수 없어. 얘들아, 가자.”
인호가 여자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아저씨 말마저 듣고 가라.”
인호의 기세가 사나웠기에 여자들이 뒤로 물러서 인호를 바라봤다.
“너희들은 지금까지 테이크, 즉 받기만 해서 기브의 무서움을 모른다. 앞으로도 잘 기억해. 하나를 얻으면 그에 상당하는 무엇인가를 주어야 해. 분신사바도 마찬가지야. 귀신을 불러 귀신에게 소원들 들어달라고 하고, 그 귀신이 소원을 들어주게 되면 너희들 역시 귀신이 바라는 것을 들어주어야 해.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귀신이 요구하는 것을 너희들은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거야. 그것이 설사 너희들의 생명이라 해도 말이지. 그게 바로 영혼 계약의 무서움이야.”
“우리들은 영혼 계약인지 뭔지를 한 적이 없는데요.”
이미선이 따지듯 말한다. 인호는 그런 이미선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다.
“분신사바 분신사바 오잇떼 구다사이.”
인호가 이미선과 친구들이 외웠던 주문을 외우고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귀신님, 귀신님, 제 영혼을 가져가고 제 물음에 대답해 주세요.”
여자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설마 뜻도 모르고 한 거냐?”
여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신사바의 주문을 외우는 순간 너희들은 귀신과 영혼 계약을 시작한 거야. 그리고 귀신이 소원을 들어주는 순간 그 계약은 성립되지.”
떨리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여자들을 보며 인호가 손을 휘휘 젓는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집으로 가라. 그리고 다시는 이런 장난치지 말도록 해.”
여자들은 가방을 챙겨 빠른 걸음으로 떠났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앞까지 달려간 이미선이 몸을 돌리고는 인호를 향해 손을 내민다.
손이라도 흔들어 주려는지 알고 마주 손을 흔들려던 인호가 이미선이 곧게 편 가운데 손가락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저놈 시키가…….”
인호는 여자들이 놓아두고 간 종이와 양초, 볼펜을 한곳에 모아 태웠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리며 말한다.
“알 만한 망령이 이런 장난질을 하면 되겠어?”
인호가 피식 웃는다.
“아, 미안. 실수. 망령 아니고 악령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