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2화
반투명한 푸른빛의 아이 민수는 얌전히 소파 위에 앉아 있다.
“야! 그만 좀 처먹으라고.”
냉장고 옆에는 민수처럼 반투명한 푸른빛의 뚱뚱한 망령, 뚱보가 빵을 입에 욱여넣고 있다.
“오늘부터 니 상에 아무것도 안 올린다? 강제 다이어트 한번 해 볼래?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은 것도 아니고 말이야.”
“크크크. 뚱보, 못 먹고 죽은 귀신 맞잖아.”
또 다른 망령, 사기꾼이 인호의 책상 위에 있는 도자기를 만지작거리며 낄낄거린다.
“저 녀석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기억 안 나? 내 망령생 23년 동안 음식물 쓰레기통 뒤지고 있는 망령은 처음 봤잖아.”
“아씨, 그 얘기 하지 말라고 했지?”
남은 빵을 입에 넣으며 뚱보가 짜증을 부린다. 그러자 사기꾼이 눈을 부릅뜨며 뚱보를 쏘아본다.
“어쭈? 그러다 한 대 치겠다? 쳐봐, 쳐보라고!”
사기꾼이 윽박지르자 뚱보가 고개를 돌리며 외면한다.
“야, 인마.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고, 똥물에도 파도가 있는 거야. 어디서 이제 망령된 지 3년밖에 안 돼서 시체에 구더기도 안 낀 녀석이 하늘 같은 고참 망령한테 눈을 부라리고 짜증을 부려? 앙? 죽고 싶어?”
“죽이긴 누가 누굴 죽여? 니들 이미 죽었거든요? 그리고 너나 잘하세요. 내가 너 때문에 쪽팔려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내가 뭘 했다고…….”
인호가 소리를 치자 사기꾼이 딴청을 피운다.
“내가 모를 줄 알지? 지난번 가리봉동 연쇄 추돌 사고 났을 때. 갓 죽은 망령들한테 극락 보내준다고 사기 쳤다며? 그러니까 니가 승천을 못 하고 이승을 떠도는 망령이 된 거야. 망령이. 알아 몰라?”
“어떤 시러배 망령놈이 그래?”
사기꾼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왜? 알면? 가서 한 대 치려고?”
그때 창밖을 한가롭게 바라보고 있던 망령, 영감이 몸을 돌린다.
“내가 그랬다. 어쩔래? 나도 죽이려고? 죽여봐, 인마.”
“영감님도 참……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러세요.”
“그런 말? 내가 없는 말 지어서 했냐? 망령생 23년? 어디 사망기록부에 잉크도 안 마른 놈이 따박따박 말대꾸야?”
“23년이면 진즉에 잉크 다 말랐어요.”
“어쭈? 또 말대꾸하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인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끼어든다.
“잘한다. 잘해. 영감님. 그 나이 드시고 그러고 싶으세요? 왜? 어디 가서 60년 넘도록 승천도 못 하고 망령 노릇하고 있다고 광고라도 하시지?”
“내가 또 뭘 어쨌다고…….”
“좀 나가서 일을 하라고요. 요즘 흥신소 적자 나는 것 모르세요? 이러다 정말 젯상에 올릴 반찬 값도 모자라게 생겼어요. 영감님이 드시는 소고기뭇국은 어디 누가 공짜로 준답니까?”
“내 아들 녀석한테 돈 많이 삥 뜯은 거 내가 모르는지 알아?”
“뭐, 뭐라고요? 삥이요? 삥?”
인호가 뒷목을 잡는다.
“아, 화내면 안 되는데. 혈압 조심해야 해. 내가 삥을 뜯었어요? 그게 어디 삥입니까? 정당하게 대가 받은 거지.”
“도장 하나 찾아주고 1억이나 받아먹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 네 말대로 내가 이 나이에 길거리 헤매면서 길 잃은 망령들이나 찾아다녀야겠냐?”
“그 도장 못 찾았으면 영감님 재산 그대로 증발했어요. 영감님 자손들 지금 떵떵거리면서 사는 게 누구 때문이에요? 나 때문이라고. 1억? 내가 양심적이어서 그것만 받은 거지 다른 놈들 같았으면 절반은 떼먹었을걸?”
영감이 다시 창밖을 보자 인호가 인상을 와락 구긴다.
“야, 그거 비싼 거라고 말했지?”
사기꾼이 갑자기 자신에게 불똥이 튀자 어색하게 웃으며 도자기에서 손을 뗀다.
“에이, 우리 사이에 왜 그러실까? 동대문 골동품 가게에서 5만 원 주고 산 거 다 아는데.”
“5만 원이 뉘 집 개 이름이냐? 5만 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아?”
“아이고, 알았어요. 우리 인호 삐졌어요?”
“진짜 죽고 싶냐? 이참에 강제로 성불시켜줘?”
사기꾼이 두 손을 위로 들며 뒤로 훌쩍 물러서자 그의 몸이 벽을 통과해 사라진다.
머리를 쏙 내민 사기꾼이 도자기를 힐끔거리며 말한다.
“장난이잖아. 그런데 저거 5만 원짜리치고는 제법 그럴듯하단 말이야. 여기저기 이가 빠지고 누렇게 뜬 게 진짜 골동품 같거든.”
“그거 골동품 맞거든. 그 주인 양반이 모르고 그 가격에 판 거지.”
“그건 아닌 거 같고. 그거 밑에 보면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스티커 붙어있거든. 일단 그거 먼저 떼자. 그러면 돈이 주체할 수 없이 많아서 막 버리고 다니는 골 빈 놈들한테 제대로 한 건 할 수 있겠어.”
인호가 명패를 집어 들고 던지려고 했다.
“어떻게 된 게 넌 망령이 매일 같이 사기 칠 생각만 하냐? 그래서 승천하겠어?”
“하, 하하. 거 아까워서 던지지도 못할 거면서 액션 취하지 말지? 그거 부서지면 또 순간접착제로 붙이려고?”
인호가 눈을 부라리며 쏘아보자 사기꾼이 뚱보를 향해 소리친다.
“야, 인마. 그만 처먹고 빨리 안 나와? 일하러 가야 할 거 아니야.”
* * *
인호는 양손에 큼직한 봉지 두 개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도 냉방기기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실내 온도가 상당히 높았지만, 인호는 더위를 느끼지 못했다.
주방 탁자에 장을 봐 온 봉지를 올려두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손을 닦고 곧 사 온 식재료들을 손질한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친 후 무를 다듬어 국을 끓이고, 나물들을 삶아 무친다. 몇 가지 음식들을 준비한 후 몸을 돌릴 때였다.
“아, 깜짝이야.”
머리에 불이 붙은 화염병이 꽂힌 망령, 화염병이 새빨간 눈으로 인호를 쏘아보고 있었다.
“야, 화염병. 내가 그렇게 다니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걸어가다 화염병 맞고 죽은 게 뭐 자랑이라고 그렇게 하고 다니는 건데?”
화염병은 인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스레인지 위에서 끓고 있는 국통을 보며 묻는다.
“오늘도 무국이에요?”
“그렇게 쳐다보면?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오냐? 그래. 무국이다. 어쩔래?”
“벌써 일주일째 매일 무국인 거 알아요?”
인호가 화염병을 쏘아본다.
“그래서? 안 먹겠다고?”
화염병이 더 강렬한 눈빛으로 인호를 쏘아본다.
그 모습을 본 인호는 그대로 가스레인지로 가서 불을 꺼버렸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마. 니들이 안 먹으면 나도 돈 굳고 좋거든? 나도 부자 좀 돼보자. 니들 젯상 봐준다고 내 허리가 휘어요.”
인호가 화염병에게 눈을 부라린다.
“그래. 기왕 말 나온 김에 말 좀 하자. 올해 태풍이다 뭐다 해서 채솟값이 몇 배나 올랐거든? 야, 남들은 채솟값 비싸서 먹지도 못해. 어디서 호강에 겨운 소리를 하고 있어? 아, 몰라 다 집어치워. 나도 지겹거든?”
그때 얼굴은 멀쩡하지만 뒤통수가 훤하게 비어 있는 망령, 탕탕탕이 인호 앞에 나타난다.
“저는 아닙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국이 무국이에요. 군대에서 똥국도 삼 년 동안 먹었는데 고작 일주일 무국 먹는 게 뭐 대수라고 그러세요. 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탕탕탕을 보며 인호가 한숨을 내쉰다.
“구라도 적당히 쳐라. 너 인마 이등병 때 총기 자살했잖아. 그런 놈이 3년 동안 똥국을 먹어?”
“말이 그렇다는 거죠.”
인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실과 방에 십여 명의 망령들이 있었다.
“그나마 이 정도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라고. 어디서 불평질이야, 불평질이?”
인호가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탕탕탕이 외친다.
“국에 불은 키고 가야죠.”
인호가 인상을 쓰며 방으로 들어가자 탕탕탕이 화염병에게 인상을 쓴다.
“그러게, 내가 안 먹힐 거라고 그랬지?”
“아 씁, 다른 사람들한테 곧잘 먹히는데.”
화염병이 아쉽다는 듯 볼을 긁적인다.
“저놈이 보통 놈이냐? 독종이잖아, 독종.”
“야, 넥타이. 다 들리거든?”
목에 줄이 묶여 있는 망령, 넥타이가 흠칫 몸을 떨었다.
* * *
백 개가 넘는 위패가 계단 형식으로 놓여 있는 방.
양옆 벽에는 전체에 탱화가 그려져 있다. 향로에는 향이 타오르고 있다. 향로 앞에는 큰 상이 보였고 그 위에는 수많은 그릇들이 놓여 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상 앞에는 하얀 베옷을 입은 인호가 앉아서 먹을 갈고 있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인호의 눈에는 푸른빛, 귀화가 일렁인다.
그렇게 다 간 먹을 내려 두고 붓을 들어 먹물을 듬뿍 찍은 후 한지에 한자를 적기 시작했다.
박민수朴敏樹
오늘 극락 흥신소를 찾은 태경이의 친구 민수의 이름이다.
한지를 위패에 끼워 넣고는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 놓는다. 향을 하나 뽑아 불을 붙이고는 향로에 꽂는다. 지전을 꺼내 불을 붙이고 향로에 내려놓는다.
“비록 네가 어린 나이에 요절을 하였지만 너무 원통해하지 말거라.”
평소와는 달리 착 가라앉은 음성이다.
“사람이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상제께서 날 때부터 갈 날을 미리 정해 놓았으니 너 역시 그러한 것이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서 극락왕생하거라.”
말을 마치고는 눈을 감은 인호는 다시 주문과 비슷한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린다.
인호의 앞에 민수가 나타났다.
민수는 해맑게 웃으며 인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나 이제 그만 갈게.”
인호가 눈을 뜬다. 왜인지 슬픔이 가득한 눈이다.
“그래. 가는 길이 조금 멀고 험하더라도…….”
민수의 옆을 힐끔 바라본다. 그곳에는 검은 슈트를 입은 사내, 저승사자가 서 있었다.
“저 아저씨 손 꼭 잡고 가야 한다.”
“응, 아저씨.”
민수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승사자가 민수를 돌려세우고는 인호를 향해 눈을 부라린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아무런 말 없이 민수와 함께 위패 뒤쪽으로 사라진다.
한동안 민수와 저승사자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인호가 한숨을 내쉰다.
“크흑-.”
그때 인호가 신음을 토해낸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 인호의 얼굴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인호가 왼쪽 소매를 걷었다.
팔에는 검은색의 기이한 도식들이 한가득 새겨져 있었다.
마치 조직폭력배들의 문신을 보는 듯했다. 팔의 비어 있는 자리의 살이 꿈틀거리더니 그곳에 또 다른 도형이 나타난다.
이를 꽉 깨문 인호가 벽에 등을 기대고 몸을 떨었다. 시간이 지나고 떨림이 잦아들었다.
“하아-.”
인호가 깊은 한숨을 토해낸다.
“이것이 내 업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