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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화 (112/112)

<외전 5화>

엄마가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야단을 치면 소름이 쭈뼛쭈뼛 돋는다고요. 그런데 아빠는 엄마가 화를 안 내면 무섭대요. 심지어 존댓말을 할 땐 진짜 세상에서 제일 무섭대요.

저는 아빠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엄마는 아빠한테 존댓말을 쓰지 않거든요. 오히려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엄마가 아빠에게 너무 격 없이 대한다고 그러시던데요. 그런데 격 없는 게 무슨 뜻이에요? 뭐가 없다는 걸까요?

“오늘 하루는 말썽을 부릴 만큼 부렸으니 둘 다 일찍 자라. 너희 잠들 때까지 아빠가 들여다볼 테니까.”

아빠는 누나의 방에 들어가 먼저 누나를 눕혀주고 이마에 뽀뽀했어요. 그다음은 제 방이었고요. 아주 어릴 땐 유모가 같이 잤지만 이제는 혼자 잘 나이가 되어서 누나와 저는 커다란 침실을 혼자 써요.

그리고 이건 우리 집만의 밤 인사 순서인데요. 매일 밤 엄마와 아빠는 항상 차례차례 우리 방에 들어와서 꼭 안아 주고 뽀뽀를 해 줘요. 하지만 오늘 뽀뽀해 주는 사람은 아빠뿐이었어요.

저는 아빠에게 매달려 종알종알 물었어요.

“엄마가 내일까지도 화가 안 풀리면 어떡해요?”

“내일 아빠하고 같이 가서 엄마에게 다시 사과하자.”

“엄마는 아까 아빠한테도 화를 냈잖아요.”

“음……, 그럼 아빠도 너희랑 같이 벌 좀 서지 뭐.”

“아빠도 벌을 서요?”

“물론이지. 아빠도 잘못하면 엄마한테 혼나야지.”

아빠는 턱 밑까지 이불을 덮어주곤 토닥토닥 두드려줬어요.

저는 얼른 자려고 눈을 감았고요. 아빠 발소리가 멀어졌어요. 그리고 조금 더 지나니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누나 목소리가 들렸어요.

“야, 너 자?”

저는 눈을 떴어요.

“아니.”

“그럼 빨리 일어나.”

“왜…… 왜?”

저는 공처럼 몸을 말고 이불 밑에 숨었어요. 밤에 안 자고 돌아다녔다가 또 혼나면 어떡해요?

“엄마한테 가 보게.”

누나는 이불 밑으로 손을 밀어 넣고 저를 잡아끌었어요. 저는 억지로 질질 끌려 내려왔고요.

“아빠가 일찍 자랬는데…….”

“잠깐 엄마 기분 어떤지만 엿보고 금방 올 거야. 엄마가 밤 인사 안 해 준 날은 오늘이 처음이잖아.”

누나는 진짜 힘도 세고 고집도 세요. 저는 어쩔 수 없이 누나를 따라 침실을 빠져나갔어요. 조용한 저녁 시간이라 유모와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들도 쉬러 들어가서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우리는 발뒤꿈치를 들고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었고요. 부모님 침실로 가야 하나 했는데, 엄마가 있던 서재 쪽에서 불빛이 반짝거렸어요. 엄마는 아직까지도 서재에 있었나 봐요.

“새틴, 애들은 재웠어.”

아빠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빠도 서재로 엄마를 찾으러 온 것 같았어요. 우리는 얼른 안 들키게 문 뒤에 숨었어요.

“여태 일한 거야? 피곤하지?”

“응.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전혀 몰랐네.”

우리 집은요, 엄마가 항상 바빠요. 델 마레라는 아주 대단한 가문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바쁠 수밖에 없다고 아빠가 말해준 적이 있어요.

엄마는 집안도 돌봐야 하고 법황 성하를 도와 나라도 돌봐야 한다고요. 사람들이 델 마레를 가장 믿고 따르는 데다가 엄마도 옛날부터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라 어떤 일도 허투루 하지 않는대요. 또 법황 성하가 엄마를 많이 의지하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아빠가 어쩌다가 일찍 집에 돌아온 날에도 엄마는 밤늦게까지 일하고 있을 때가 많아요. 그런 엄마를 아빠는 항상 걱정하고요.

“우리 아엘라가 엄마의 노고를 알아줘야 할 텐데. 안전한 칼데브란카와 최고로 번성한 델 마레를 물려주기 위해서 엄마가 얼마나 불철주야 노력하는지 말이야.”

우리는 문틈으로 서재 안을 슬그머니 들여다봤어요. 아빠는 엄마의 뒤에서 엄마를 끌어안더니, 엄마의 어깨를 토닥토닥 주무르기 시작했어요.

한참 후에 아빠가 다정하게 물었어요.

“새틴, 아까는 많이 놀랐지?”

맞아요. 아까 엄마는 울려고 그랬어요. 저는 누나를 쳐다봤어요. 누나도 속으로는 미안했는지 계속 서재 안쪽의 눈치만 봤어요.

“난 나중에 다 정리된 이야기나 들었지만, 먼저 화재 소식을 들은 네가 얼마나 놀랐을까 생각하니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더라.”

엄마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내가 먼저 들었어야 했는데. 그래서 우리 귀여운 말썽꾸러기들이 두 번 다시 위험한 장난은 하지 못하게 타이르고, 네가 돌아올 시각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널 마중 나갔어야 했다고.”

“온 집안에 탄내가 가득한데 날 속이려구?”

“속이겠다는 게 아니라, 네 걱정을 좀 덜어주고 싶다는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아빠가 무서운 사람일 거라고 믿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아빠는 하나도 무섭지 않거든요. 바쁜 엄마 대신 아빠는 아빠 어렸을 적 했던 놀이 방법도 가르쳐줬고 우리에게 항상 다정한걸요.

“내 걱정이 누구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해? 아일라가 실비오의 팔을 부러뜨렸던 날에 검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줬던 사람은 너였지, 루브? 천방지축인 애들에게 모험가 책을 읽어줘서 애들이 지하실을 습격했고, 승마를 가르친 시기에는 우리 모르는 사이 축사를 열어젖혔잖아. 도대체 뭘 어떻게 가르친 거야? 난 가끔 내 자식이 세 명인가 싶더라니까.”

엄마가 투덜거렸어요. 별로 화난 목소리가 아니어서 다행이었어요. 아빠는 엄마의 불평에 웃음을 터뜨렸어요.

“우리 애들이 배움이 빠르지.”

“거기다 너는 애들한텐 절대 야단 한 번을 안 치더라.”

“야단을 치고 싶어도 우리 애들이 널 너무 닮았잖아. 널 닮은 얼굴들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야단을 쳐?”

저 이야기는 아빠에게서도 종종 들었어요. 아빠는 우리가 엄마를 닮아서 너무너무 좋대요. 특히 누나는 엄마를 정말 많이 닮았어요. 아빠는 가끔 누나를 ‘작은 새틴’이라고 불러요. 그러고는 학교에서 엄마를 만났던 이야기를 꼭 하고요. 아빠는 첫눈에 엄마가 요정인 줄 알았대요. 지금까지 열 번도 넘게 들은 것 같아요.

결국 엄마가 웃음을 터뜨렸어요. 아빠는 엄마가 웃자 그제야 안심했어요.

“새틴, 애들에게 많이 화났어?”

“……화난 건 아니었어.”

엄마 목소리가 낮아졌어요.

“무서웠어.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첫마디로 듣는데, 집에 남아 있는 애들 얼굴이 떠오르면서 눈앞이 캄캄한 거야. 제대로 데리고 대피했을까 걱정도 되고. 집에 돌아왔더니 탄내가 자욱해서 옛날 기억도 막 떠오르더라. 아, 그때 네가 나한테 왜 위험한 짓을 나서서 했냐고 화를 냈잖아? 네 그 심정이 딱 이해됐어.”

무슨 이야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빠와 엄마의 분위기 때문에 누나도 좀 미안해 보였어요. 저도 기분이 이상했고요.

엄마는 한숨을 지었어요.

“우리 자식들이 이렇게 말썽꾸러기로 자라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야.”

“그래도 네가 엄마고 내가 아빤데 뭐가 걱정이야. 나는 아직도 아엘라와 실비오가 태어나던 날의 기억이 선명해. 우리 둘 다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지.”

“그건 나도 그래.”

“난 여전히 하루하루가 기적처럼 느껴지고 너와 결혼을 못 했으면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어. 아침에 눈을 뜨면 네가 옆에 잠들어 있고, 퇴근하고 돌아온 집에서 너를 만나고, 말썽을 피운 우리 아이들이 너에게 혼나고 있는 일상마저 소중해.”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아빠가 엄마에게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새틴, 다음 생에도 나와 결혼해 줄래?”

“다음 생?”

“이번 생의 경험을 토대로 다음 생에는 너와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때는 시작부터 힘든 일 없이 온전히 행복할 거야. 그렇게 되도록 내가 반드시 너를 먼저 찾아낼게. 약속해.”

그러고서 아빠는 엄마에게 뽀뽀했어요. 그런데 보통 뽀뽀는 뺨이나 이마에 하잖아요? 아빠는 엄마 입술에다 뽀뽀했는데, 우리한테 할 때보다 훨씬…… 아주 많이 길게 했어요.

누나는 내 손을 잡고 눈짓했어요.

“가자.”

“왜?”

“기억 안 나? 유모가 그러는데 아빠랑 엄마가 둘만의 세상에 있을 땐 방으로 돌아가서 문을 꼭 닫고 있으라고 했잖아.”

“둘만의 세상이 뭔데?”

“나도 몰라. 어쨌든 얌전히 돌아가랬어.”

엄마한테 야단맞은 날이라 그런지 누나가 착해졌어요. 우리는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방으로 돌아갔고요.

그러고 보니 아빠는 우리가 작은 소리만 내도 잘 듣는데, 오늘은 우리를 전혀 못 봤나 봐요. 우리가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우릴 부르는 목소리가 전혀 안 들렸거든요.

여름이 끝날 무렵에 온 가족이 둘러앉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엄마가 몸이 좋지 않아서 밥을 안 먹겠다고 했어요. 아빠도 식당으로 내려오지 않고 엄마 옆에 있었고요. 나는 누나를 쳐다봤어요. 누나도 불안해져서 유모에게 물었어요.

“엄마가 어떤데요?”

“의사를 불렀으니 곧 무슨 일인지 아실 수 있을 거예요. 너무 걱정 말고 식사하세요.”

우리끼리 밥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음식이 맛이 없게 느껴졌어요. 누나도 마찬가지였는지 평소보다 반 넘게 음식을 남겼고요.

불려온 의사는 부랴부랴 부모님 침실로 달려갔어요. 누나랑 나란히 앉아 진찰 결과를 기다리는데, 잠시 후 아빠가 먼저 나왔어요. 우리는 쪼르르 아빠를 붙잡고 물었어요.

“엄마는 병에 걸린 거예요?”

“우리가 자꾸 엄마 속 썩여서 그래요?”

아빠는 쪼그려 앉아서 우리를 차례차례 안아줬어요. 엄마가 몸이 안 좋으면 아빠도 항상 엄마 곁에 있으면서 간호하는데, 지금은 아빠의 표정이 몹시 이상했어요.

“의사 아저씨가 뭐래요?”

“엄마는 말이다. 당분간 너희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기 힘들 거고, 밥을 잘 먹지 못할지도 몰라. 그래도 아엘라와 실비오가 많이 컸으니 너희끼리 잘 놀고 공부할 수 있지?”

아빠의 말에 누나는 덜컥 겁을 먹었어요.

“왜요? 엄마가 많이 아파요?”

“의사 아저씨도 모르는 병이에요?”

“아냐. 아는 증상이야. 두 번이나 겪어서 아주 잘 아는 증상이지.”

아빠가 빙그레 웃었어요.

“몇 달만 지나면 너희들에게 아주 큰 선물이 생길 거야.”

우리는 깜짝 놀랐어요.

“선물이요? 무슨 선물?”

“아주 작고 예쁜 동생을 만나게 될 거다. 예상치 못한 소식이긴 해도 엄마는 지금 무척 기뻐하고 있어. 새틴은 외동으로 자라서 종종 아이들을 복작복작하게 낳아 키우고 싶다고 했거든. 둘 다 들어가서 엄마를 꼭 안아드려라.”

우리의 등을 밀어주면서 아빠가 부드럽게 소곤거렸어요.

“그리고 동생이 태어나면 너희들도 짓궂은 장난은 그만두고 철들어야 한다.”

우리는 멍하게 서 있다가 엄마가 있는 침실로 달려갔어요. 침대에 앉아 있던 엄마는 우리가 와아 소리 지르며 들어오니까 깜짝 놀라 우리를 쳐다봤고요.

우리는 침대 위로 펄쩍 뛰어올랐어요.

“엄마, 우리 동생 생겨요?”

“동생 어디 있어요?”

누나와 내 질문 공세에 엄마는 빙그레 웃었어요.

“벌써 아빠에게 들었니? 너희 동생은 바로 여기 있어.”

엄마는 배에 손을 얹었어요.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엄마의 배는 어제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데, 이렇게 좁은 데에 동생이 있다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거든요.

엄마가 말했어요.

“아직은 동생이 아주 작아서 느껴지지 않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알 수 있을 거야.”

“정말요? 그럼 동생은 언제 나와요?”

누나의 물음에 엄마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어요.

“너희가 철들어 얌전해지면 나오지.”

“우린 오늘 아주 얌전했는걸요!”

“오늘뿐만이 아니라 내일도, 매일매일, 계속해서 그래야 해.”

“……네에.”

“소란을 피우면 안 돼. 그럼 동생을 더 늦게 보게 될 거야.”

“절대 안 그럴 거예요.”

우리는 엄마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어요. 엄마는 우리에게 어떤 동생이 태어났으면 좋겠냐고 물었어요. 누나는 남동생은 이미 하나 있으니, 여동생이 갖고 싶다고 했고요.

생각해봤는데 저는 여동생이든 남동생이든 다 좋을 것 같아요. 전 누나와 달라서 동생이 생기는 게 처음이니까요.

누나와 저는 동생에게 아주 잘 대해줄 거예요. 아빠에게 검술을 더 열심히 배워서 칼싸움도 가르쳐주고, 호수에서 수영하는 법도 가르쳐 줄 거예요. 또 미끄러지지 않고 나무를 멋지게 기어오르는 방법도 가르쳐 줄 거고요.

왜 나무냐고요? 누나와 저는 요즘 몰래 커다란 나무 위에 우리들만의 아지트를 만들고 있거든요.

쉿, 엄마와 아빠에게는 비밀이에요.

완결.

<결혼식장에서 남편을 바꿨다>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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