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화 (111/112)

<외전 4화>

“새틴, 해봐. 새틴.”

“그래. 엄마, 하지 말고 새틴 해 봐.”

“새애, 티이…….”

불분명한 발음이었지만 의미는 확실했다.

“네 이름이 새틴인 걸 벌써 아나?”

“그러게? 어떻게 알았지? 아…….”

놀라움은 잠시였다. 새틴은 이내 탄성을 질렀다.

루블리에 덕분이었다. 의식해서 말하는 엄마나 아빠와 같은 단어보다는 주위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부르는 호칭이 훨씬 많았다.

마님, 새틴 님, 주인님, 팔라딘, 카 딜론 경, 때에 따라 두 사람을 부르는 무수한 호칭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루블리에는 아이 앞에서 새틴의 이름을 수백 수천 번은 불렀다. 세상 다시 없을 다정한 목소리와 충실한 눈빛으로.

새틴. 그건 아이가 가장 많이 들었을 엄마의 이름이었다.

재빠르게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시 말해 봐. 새틴. 새티인.”

“아빠 이름은? 루브, 해 보자. 응?”

“우우…….”

신기했다. 말하고, 움직이고, 웃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별것 아닌 행동들인데, 내 아이가 한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특별했다. 엄마와 아빠를 부르고, 부모를 닮은 얼굴로 자라나겠지.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이 너무도 기다려졌다.

문득 배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새틴은 스르르 눈을 떴다. 루블리에가 세심하게 배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정신이 빠르게 돌아오지 않았다. 새틴은 멍하게 물었다.

“……아이는?”

“응?”

“분명 품에 안고 있었잖아. 우리…….”

아이를.

말을 하다 말고 새틴은 깨달았다. 꿈이었다. 아마 꿈을 꾸었나 보다. 예쁘고 고요한 긴 꿈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새틴은 말을 잃었다.

그런데 뒤에서 새틴을 끌어안은 루블리에가 나직이 속삭였다.

“꿈에서 널 닮은 우리 아이를 봤어.”

“꿈에서?”

“너를 엄마라는 말 대신 새틴이라고 부르더라고. 발음은 다 새어서 새소리 같더라. 가슴이 다 간지러웠는데, 눈을 뜨고 보니 꿈이지 뭐야. 이 꿈이 진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새틴의 배를 어루만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더없이 따스한 손길로.

어쩐지 가슴이 복받쳤다. 새틴은 천천히 몸을 돌려 루블리에와 마주 보듯 누웠다. 어지러이 흐트러진 은색의 머리카락이 얼굴로 쏟아져 시야를 온통 가렸다. 루블리에의 손가락이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틈을 파고들어 부드럽게 걷어냈다.

루블리에의 표정을 보는 순간 새틴은 직감으로 느꼈다. 지금 그와 저는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같은 꿈을 꿨나 봐.”

꿈을 공유했다. 기억이 같았다. 말을 맞추어 볼수록 놀라웠다. 서로 함께했다고 말할 수 있는 미래를 무의식 속에서 살다 왔다.

“예지몽인가?”

새틴과 루블리에, 거기에 배 속의 아이까지 포함해 무려 세 사람의 예지몽이었다. 마귀니 악령이니 하는 거짓말 같은 놈들을 겪었던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는 대단한 기적이라고 하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우연의 일치라고 여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새틴과 루블리에에게는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루블리에는 한참 동안 손을 떼지 못했다. 손끝의 온기가 오래도록 머물렀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동그마니 부풀어가는 배를 루블리에는 늘 신기해했다. 사실 조금씩 아이의 존재가 묵직하게 불어갈수록 새틴도 신기했다. 안에서 툭툭 걷어차거나 저나 루블리에의 목소리에 반응해 구물거릴 땐 특히나 신기했다.

이 아이가 태어나면, 꿈속의 그 아이인 거겠지.

감상에 젖어 있던 새틴이 괜히 뾰로통한 눈빛을 보냈다.

“나 애 낳을 때 엄청 고생하나 보던데.”

“……미안해.”

좋은 의사를 구했고 사용인들의 경험이 풍부하더라도, 현실의 산고는 타인이 나누어질 수 없는 문제였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아프고 싶다.”

루블리에의 음성에서 공포가 묻어났다. 꿈속에서 그는 새틴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낱낱이 목격했다.

새틴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금도 선연히 떠올랐다. 낯선 고통, 당장 자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 같이 울던 남자, 부부뿐이던 가족이 아이까지 포함된 새로운 가정으로 재편되던 순간의 감동.

“무섭다면 정말 무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으로 본 미래의 어느 날이 너무도 황홀해서, 참으로 그리워서 새틴은 눈가가 시큰해졌다.

“나 진짜 기대돼. 알아? 그냥 다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실제로 결국 견뎌냈잖아?”

기실 대단치 않은 일상이었다. 훨씬 극적인 날들을 살아봤다. 인생의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했고, 불리했던 판세를 뒤집기도 했다. 이름이 오래오래 남을 만한 변화도 겪었다.

가히 인생이 바뀌었다고 할 법했다. 그러나 아이로 인해서는 정서가 바뀌었다. 평온을 찾았고, 행복을 찾았다. 이건 인생을 두 번 변하게 해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가치였다.

발갛게 혈색이 올라 있던 하얀 뺨, 고집스레 찡긋거리던 눈썹. 저를 꼭 닮은 형상을 어렴풋이 더듬어가다 새틴은 루블리에에게 물었다.

“딸이었지?”

“응. 널 꼭 닮은 예쁜 딸이었어.”

“이름을 미리 지어둬야겠네.”

새애, 티이. 어눌한 발음으로 제 이름을 부르던 딸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떠올랐다. 부디 이 꿈의 기억이 오래오래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기를.

새틴은 속삭였다.

“빨리 만나자.”

아엘라.

새틴은 첫 딸의 이름을 아엘라로 지어 놓았다. 루블리에는 예지몽이 진통과 산고에 대한 경고를 남긴 게 아닌가 하며 걱정했으나, 새틴은 그다지 겁먹지 않았다. 미래의 딸과 재회하는 날이다. 곧 현실이 될 꿈을 떠올리면 무엇이든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다.

자연스레 시간이 흘러,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던 만남의 날이 다가온 순간 새틴은 그리움과 감격에 젖어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았다. 막 세 사람으로 완성된 일가족의 얼굴이 죄 눈물로 엉망진창이었다.

“아엘라 델 마레.”

마침내 입 밖으로 내어 부를 수 있게 된 이름에 가슴이 벅찼다. 새틴은 뺨을 맞대며 소곤거렸다.

“우리 다시 만났네.”

이 년 후, 새틴과 루블리에는 아이는 하나로 족하다던 기존의 다짐을 깨고 둘째를 낳았다. 낳아서 키워보니 출산의 기억이 잊힐 만큼 자신들의 피를 이은 아이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던 까닭이다. 두 사람은 태어날 둘째가 딸이어도 좋고 아들이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딸이어도 예쁠 거고 아들이어도 예쁠 터였다.

둘째는 아들이었다. 델 마레 가문의 유명한 유전 형질이 확실히 남다르기는 해서 첫째와 둘째 모두 새틴의 은발과 하얀 피부를 물려받았으나, 이목구비를 찬찬히 뜯어보면 은근히 루블리에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첫째의 이름은 새틴이 지었기에 둘째의 이름은 루블리에가 지었다. 실비오. 아들의 이름이었다.

후일담

오늘 또 엄마한테 혼났어요. 근데 사실 사고는 누나가 쳤거든요? 누나가 책상 밑에서 해적선 놀이를 하자고 해서요. 누나가 하자고 조르지 않았으면 전 안 했을 거예요. 누나 말을 들으면 항상 엄마한테 야단맞는걸요.

하지만 누나가 저보다 힘이 세서, 저는 억지로 누나한테 끌려 들어갔어요. 어쨌든 우리끼리 램프를 가지고 들어가 해적 놀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 붙어버린 거예요.

결국 한쪽 벽이 홀랑 타버렸죠. 나중에 유모가 말하기를 벽을 새로 칠한 지 얼마 안 된 방이라 불이 금방 옮겨붙은 거래요. 그래도 방이 더 크게 타버리기 전에 일찍 불을 끌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어요.

아무튼 유모는 부랴부랴 엄마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어요.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밖에서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기에 누나랑 고개를 삐죽 내밀었더니, 엄마의 마차가 휘장을 펄럭이며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더라고요.

엄마는 마차가 멈추자마자 뛰어내렸어요.

“아엘라! 실비오!”

밖에서부터 우리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우린 죽었다, 이제.”

누나는 제 귀에 소곤거렸어요. 누나가 놀자고 해서 그런 거잖아, 라고 말하면 누나가 때릴 것 같아서 저는 입을 다물었어요.

“걱정 마세요. 아가씨와 도련님은 무사하세요.”

엄마를 마중 나간 유모가 재빨리 위로했지만, 엄마는 유모를 제치고 달려왔어요.

“맙소사, 너희 다치지 않았어?”

우리는 쭈뼛쭈뼛 엄마를 맞았어요. 엄마는 우리를 확 끌어안더니 막 울 것 같은 얼굴로 이리저리 살펴봤고요. 한참 동안 누나와 제가 다치지 않은 걸 확인한 엄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이 엄격해지더니 벌을 서라고 했어요.

전 좀 억울했어요. 놀자고 한 사람은 누나인데요…….

하여간 누나랑 같이 엄마가 일을 보고 있는 서재 문 앞에 꿇어앉아 한참 벌을 서는 중에 저녁이 돼서 아빠가 퇴근했어요.

아, 우리 아빠는 신성 기사단의 팔라딘이에요. 남들은 팔라딘인 아빠가 엄하지 않냐고, 무서울 것 같다고 하는데요. 솔직히 우리는요, 엄마가 제일 무서워요.

누나랑 칼싸움하다가 제 팔이 부러졌을 때도, 모험 놀이를 하느라 타고 오르던 선반이 무너져 포도주 통들을 전부 박살 내는 바람에 지하실에 포도주 강이 흘렀을 때도, 축사의 문을 열어놨다가 말들이 전부 뛰쳐나갔을 때도 머리끝까지 화가 난 사람은 엄마였거든요. 그때마다 엄마는 곧장 아빠를 소환했어요.

“우리 애들은 아무래도 너를 닮은 게 분명해. 나는 어릴 적에 굉장히 얌전했단 말이야. 이렇게 스케일 큰 사고는 친 적이 없어.”

“그러게. 우리 애들은 다 날 닮았나 봐. 생긴 건 널 닮았는데 왜 하는 짓은 나일까.”

그럼 아빠는 매번 미안하다고 사과하고요.

오늘도 아빠는 익숙하게 벌을 서고 있는 우리를 보고 한숨을 푹 쉬었어요.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이 녀석들아.”

아빠는 서재로 들어갔어요. 엄마가 화를 내면 대부분 아빠가 중재를 하거든요. 아빠의 중재에 따라 엄마가 금방 마음을 풀고 용서를 해 주기도 해서 우리는 문에 귀를 쫑긋 맞대고 앉았어요.

“애들이 1층 방에 불을 냈어. 금방 잡아서 망정이지 큰 화재로 번지면 어쩔 뻔했어? 열 살 여덟 살 애들이 허구한 날 망아지처럼 뛰어노니 감당이 안 돼. 이러다 집에 남아나는 세간이 없겠다구. 도대체 누굴 닮아 이러는 거지?”

우리는 당연히 아빠가 엄마한테 사과할 줄 알았죠. 그냥 늘 그래왔으니까요.

“음, 다른 건 다 나를 닮았다고 쳐도 불장난은 새틴, 너를 닮은 것 같은데.”

“…….”

저 말을 하자마자 아빠는 엄마한테 쫓겨났어요. 누나와 저는 기가 죽어 아빠를 올려다봤어요.

“어떡해요? 엄마가 화 많이 났나 봐요.”

“엄마 무서워요.”

믿던 아빠마저도 엄마한테 쫓겨난걸요. 그렇지만 아빠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어요.

“아빠가 살면서 터득한 중요한 사실 하나 알려줄게. 너희들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엄마가 화를 내면 그건 괜찮아. 싹싹 빌면 엄마는 용서해 줄 거야. 너희가 진짜로 걱정해야 할 때는 엄마가 화를 내지 않을 때다. 그땐 정말로 큰일 난 거거든. 제일 무서운 경우지. 물론 사고를 치지 않는 게 제일 좋지만 말이다.”

아빠는 이상해요. 보통은 화를 내는 엄마가 제일 무서운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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