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원래도 루블리에와 성격이 아주 잘 맞는 편은 아니었다. 둘 다 좋은 가문 외동딸과 장남으로 자라 성격이 강했다. 오래 알고 지냈다면 성향을 대충 파악해서 적당히 절충하며 살 텐데, 함께 지낸 시간보다 각자 살아온 시간이 훨씬 길기에 아직도 알아가야 할 부분이 많았다.
분명 언젠가는 또다시 투닥투닥 싸우는 날도 나올 것이다. 트러블 없이 조용히 살기에는 기요른과 비슷하게 자기 의견이 드물고, 대체로 무던하며 델 마레의 이름에 경외감을 느끼는 남자가 나았다. 그런 남자를 찾자면, 충분히 찾을 수도 있었다.
루블리에의 입장도 마찬가지일 테다. 그가 이혼하고 혼자 되었던 시기, 카 딜론 가문에는 루블리에와 결혼하고 싶다는 여자들이 줄을 섰다고 들었다. 그 역시 새틴을 잊고 평탄하게 살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던 셈이다.
새틴에게 있어 루블리에는, 더불어 루블리에에게 있어 새틴은 가장 비효율적인 상대였다. 그러나 그 비효율을 기꺼이 감당하게끔 하는 것이 또 사랑이었다.
“난 아마도 너한테 무언가의 일로 화를 낼 거야. 그렇게 먼 미래도 아닐걸? 장담해.”
새틴의 첨언에 루블리에가 픽 웃었다.
“그래.”
“넌 내가 화내면 어떤 날은 눙치면서 넘어가고, 어떤 날은 사과하고, 또 어떤 날은 속으로 괴로워하겠지.”
“새틴. 넌 벌써 나에 대해 아주 잘 알게 됐는데?”
“오늘보다 더 사이가 좋은 날도 있을 거고, 사이가 나빠진 날도 있을 거고, 나에게는 가문의 일이 있고 너에게는 기사단의 일이 있으니 바빠서 얼굴을 못 보는 날도 꽤 많겠지…….”
법황청은 신성 기사단에 무척 의지한다.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소집되는 이들이 기사단이었다. 루블리에는 결혼식을 치르자마자 장기 출장을 떠났고, 수해에도 동원되었다.
새틴은 새틴대로 훗날 델 마레를 이어받아 가문을 지키고, 파수꾼 가문으로서 법황을 보조하는 역할도 해야 했다. 이렇게 함께 진종일을 꼭 붙어 머리를 비우고 시간을 보내는 날이 남은 인생을 통틀어 아주 많진 않을 터였다. 둘 다 짊어지고 있는 의무가 너무도 무거웠다.
“그래도 우린 아주 괜찮을 거야.”
루블리에가 이마를 맞댔다. 새틴도 동의했다.
“맞아. 괜찮을 거야.”
“사이가 좋은 날에는 네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어제보다 더 사랑하게 되겠지. 사이가 나빠진 날에는 너와 어떻게 하면 화해할 수 있을까 고민할 거야. 네가 화를 내면 지금은 그 문제가 무엇일진 몰라도 분명 내 잘못일 테니까. 멀리, 오래 출장을 가야 하는 날이 많아서 가슴은 괴롭겠지만 대신 돌아오는 날이 정말 설레고 기다려지겠지. 그날에는 너를 가장 먼저 만나러 올게. 그래, 우리가 살면서 늘 좋은 일만 있을 순 없겠지. 나쁜 일, 힘든 일도 분명 겪어야 할 거야. 그래도…….”
루블리에가 차분히 속삭였다.
“너 없이 혼자 행복한 것보다는 힘든 일, 나쁜 일이 벌어져도 너와 함께 헤쳐가는 편이 훨씬 좋아. 아니, 그편이 나에겐 더욱 행복할 테지.”
그의 말이 맞다. 아무리 힘든 일, 나쁜 일이 벌어지더라도 루블리에가 곁에 있다면 겁을 낼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그러한 시기를 한바탕 헤쳐오지 않았던가.
새틴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맞닿아 있던 이마가 부드럽게 스쳐 간지러웠다. 이마를 문지르고 코끝을 비볐다. 맞닿은 살결마다 그의 체온이 어린다. 감각에도 온도가 있다면 바로 이런 거겠지.
어딘가에선 가슴이 타도록 불타오르는 사랑을 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새틴이 느끼는 사랑의 온도는 그리 델 만큼 뜨겁지 않았다. 심장이 저릿하도록 차갑지도 않았다. 정확히 이 온도였다.
적절하게 따스한 사람의 체온. 하여 오래도록 머물며 닿아 있어도 다치지 않고, 익숙해지면 문득 있는지 없는지 헷갈리기도 하겠지만, 정작 사라졌을 땐 서늘한 허전함을 느끼게 될 바로 그 온도.
더는 어떠한 미사여구도 필요 없었다.
사랑이고, 행복이다. 그걸로 충분했다.
2.
루블리에는 천천히 흑마를 몰았다. 새틴은 루블리에의 가슴에 기대어 터벅터벅 오르내리는 말의 움직임을 느꼈다. 전면의 풍경은 말의 걸음만큼이나 느리게 다가왔다. 어쩐지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어 새틴은 고개를 꺾고 루블리에를 올려다보았다.
“항상 전속력으로 달리는 줄 알았어.”
“그런 날이 많았지.”
루블리에가 미소하며 대답을 이어갔다.
“거기에 네가 있었으니까.”
네가 있어서 전속력으로 달려왔다고 말하는 남자를 어찌하면 좋을까.
새틴은 눈을 감았다. 속도가 뺨을 스쳐 날아갔다. 다시 눈을 뜨자 익숙한 풍경이 한층 선명했다. 두 사람의 신혼집이다. 집의 지붕과 앞뜰로 떨어지는 석양의 붉고 노란 색채가 아련해 꿈결 같았다.
“어서 오세요.”
두 집주인을 맞으러 나온 사용인들이 일렬로 늘어섰다. 새틴이 외출하는 날이면 사용인들도 으레 둘이 만나서 함께 돌아오겠거니, 했다.
델 마레 본가에서는 그녀가 다시 집에 들어와 가까이에서 가문을 돌보며 생활하기를 바랐지만 새틴은 다소의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내하면서 신혼을 시작했던 저택을 지키는 중이었다. 그건 루블리에도 매한가지였다.
아직은 좀 더 두 사람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마님, 조심하세요.”
유모의 품에 안긴 아이가 조그만 손을 꼬물거렸다. 새틴은 얼른 아이를 받아 안았다. 아이 때문에라도 둘은 몇 년은 더 이 저택에 더 머물 계획이었다. 아무래도 본가에서 생활하게 되면 아이는 새틴의 뒤를 이을 델 마레 후계자로서 일찌감치 여러 규칙이나 교육에 내던져질 것이다.
새틴은 그 시기를 가능한 한 늦춰주려 했다. 규율이 깐깐하던 델 마레와 달리, 비교적 자유롭게 자란 루블리에는 어린아이는 넓고 시원한 전원에서 뛰어놀아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새틴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아가. 엄마 왔어.”
새틴이 아이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부터는 다른 의미로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오늘도 아기씨께선 잘 먹고 잘 노셨어요.”
유모가 뿌듯하게 첨언했다.
라리가 몇 번이고 주장했던 대로, 육아실은 새틴의 예전 침실에 꾸며졌다. 악령이 머물렀던 방인 만큼 내력을 기억하는 일부 사용인들이 찜찜한 내색을 했으나 새틴은 걱정하지 않았다. 라리가 지켜줄 것이다. 실제로 아이는 그 방에서 아주 잘 지냈다. 유모가 가위에 눌리는 일도 없었다.
“아이들은 정말 금방금방 크나 봐.”
얼마 안지도 않았는데 벌써 손목이 시큰거렸다. 새틴이 편하게 자세를 바꾸려 하니 아이가 으아앙, 칭얼거렸다.
오로지 아이만 전적으로 도맡아 돌보는 유모들이 이 집에만 도합 다섯이다. 델 마레 본가에는 더욱 많았다. 본가의 부모님은 아주 가끔 찾아오는 아이를 위해서 경험 많은 유모들을 여럿 고용했다. 전문적으로 아이를 키울 유모들이 이리 많은데, 델 마레의 가주로서 바쁜 생활을 하고 있는 새틴이 육아에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틈이 없었다.
“이리 줘.”
루블리에가 새틴에게서 아이를 데려갔다.
“아기씨를 안고 어르는 건 팔라딘께서 더 능숙하세요.”
유모가 웃음 지었다. 새틴은 샐쭉해졌다.
“그야 당연하지. 난 아팠잖아?”
임신 기간 내내 새틴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장하게 버텨 주었던 아이는 출산에 임박하여 심술을 부렸다. 예상일보다 빠르게 나올 기미를 보였던 것이다.
출산 날짜를 대충 계산해 기나긴 신혼여행을 마치고 귀로에 올랐던 새틴은 마차 안에서 예상치 못한 진통을 느꼈다. 통증과 두려움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새틴을 끌어안고, 루블리에는 다급히 인근의 민가 하나를 수배해 새틴을 옮겼다.
진통은 꼬박 하루 동안 이어졌다.
산모에 따라 다르지만 원래 그런 것이다, 초산이셔서 오래 걸릴 것이다, 기다리시면 무사히 아이를 안아보실 수 있다, 산실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은 의사의 만류에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루블리에는, 진통을 앓는 새틴의 비명이 까랑까랑 울려 퍼지자 식겁하여 곧장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하루 내내 새틴의 손을 꽉 그러쥐고 있었다. 새틴은 울다, 화를 내다, 기진맥진해서 늘어지기를 반복했다. 환자처럼 허옇게 질린 루블리에는 새틴이 울면 같이 울었고, 바락바락 화를 내면 사과했고, 기운이 빠져 축 늘어지면 덜컥 겁을 먹었다.
“나쁜 놈아! 너 때문에 내가 이게 무슨 고생이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두 번은 안 낳을 줄 알아!”
“그래, 두 명은 낳지 말자, 응.”
스스로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른 채로 둘 다 울먹거렸다. 나중에서야 루블리에는 솔직하게 밝혔다. 자기 자신이 그토록 무력하게 느껴지던 시간도 없었노라고.
친구에게 씐 마귀를 대적했을 때보다도, 피비린내 자욱한 산실에서 마냥 산고를 지켜봐야만 했던 그 하루가 더욱 막막했다고. 아내가 아파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그만큼 무서운 것인지 미처 몰랐다고 고백했다.
다행스럽게도 동행한 의사와 출산 경험이 있는 사용인들은 노련했다. 산모의 몸이 약하고, 아이는 크게 자라 쉽지 않은 케이스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마침내 첫아이를 품에 안았다.
새틴과 루블리에는 근방에 있던 카 딜론 영지로 이동해 몸을 추슬렀다. 전신이 시큰거려 새틴은 아이를 오래 안아보지도 못했다. 새틴이 몸조리에만 신경 쓰는 동안 아이를 들여다보고 공부하는 건 루블리에의 몫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루블리에의 손을 훨씬 많이 탔다. 허약해진 팔이 아이를 단단히 안지 못하고 떨어뜨릴까 봐 무서워진 새틴은 루블리에가 아이를 안고 있으면 뺨을 슬쩍 건드려 보거나 손가락을 살그머니 쥐어보는 게 전부였다.
예전의 건강을 회복하기까지는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새틴과 루블리에는 귀환 날짜를 무기한으로 미루고 영지에 머물렀다. 루블리에는 첫 아이의 감개무량함과 새틴에 대한 죄책감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네 피와 살과 뼈로 아이가 태어났어. 너에게 너무 미안하다.”
그는 새틴의 몫까지 아이를 안았고, 동시에 새틴을 간호했다.
하지만 마냥 힘든 일만 있진 않았다.
어느 날은 루블리에와 같이 마아, 바아, 옹알이도 들었다. 둘은 엄마를 말한 거네, 아빠를 말한 거네 들떠 있다가 아이가 처음 소리 내기 쉬워서 한 별 의미 없는 옹알이라는 설명에 실망하기도 했다.
언제쯤 엄마라고 확실하게 부르는 걸까.
이젠 장거리를 여행해도 문제가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아 신혼집으로 돌아온 후, 일상으로 복귀한 요즘도 새틴은 아이의 흐린 옹알이가 엄마인 자신을 부르는 것인지 무의미한 혼잣소리인지를 구분하려 애쓰고 있었다.
루블리에가 아이를 어르는 동안 새틴은 그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기사단에는 언제 돌아가기로 했어? 슬슬 복귀해야 하지 않아?”
“아직은 괜찮아. 부관이 대리직을 잘 수행하고 있어. 요즘 열병이 유행이라던데 델 마레 영지들에는 별일 없지?”
“안 그래도 계속 소식 올라와서 걱정이야.”
“그래서 말인데, 새틴…….”
“새애.”
그때였다. 아이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옹알거렸다.
루블리에와 새틴은 동시에 입을 딱 다물었다.
“응?”
“애애, 새애.”
“얘 지금 나 부른 거야?”
새틴이 휘둥그레 루블리에를 쳐다보았다. 루블리에도 긴가민가하다가 아이를 빤히 들여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