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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화 (109/112)

<외전 2화>

“루블리에 카 딜론. 그대는 그대 유일한 부인을 존중하며 생이 다하는 날까지 사랑하겠습니까?”

사랑해서 겪었던 지난 일들이 있었다. 사랑해서 겪어야만 했던 지난 감정들이 있었다. 한때는 사랑이 행복인 줄 알았다. 설렘인 줄 알았다.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 게, 목소리만 들어도 즐거운 게 사랑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랑해서 괴로울 수 있었고, 사랑해서 미울 수도 있었다. 사랑하면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는다. 효율적이지도 않다. 하여 이제는 사랑이 반드시 긍정적인 감정이 아님을 안다. 날아오를 땐 끝도 없이 떠오르고 추락할 땐 바닥도 없이 추락했다. 그렇게 고락을 겪고도,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돼서 결국 이 자리에 섰다.

루블리에는 새틴과 얼굴을 마주했다.

“저는 저보다 더 새틴을 신뢰합니다.”

알아듣지 못한 하객들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새틴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 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추기경이 새틴을 응시했다.

“새틴 델 마레. 그대는 이 자리에 그대 스스로의 의지로 섰습니까?”

어쩐지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지난 결혼식에서, 새틴은 자의로 결혼식장에 입장하지 않았다. 양 가문의 부모님들이 일찌감치 맺은 정혼이었기에, 물리기에는 결혼식이 너무도 코앞이라서, 딜라일라의 신분과 위치는 새틴에 비하면 보잘것없으니 걱정 말고 용인하라는 타의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려 했다.

신랑이 난데없이 바뀐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얼떨결에 받아들이긴 했으나 기실 그건 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사태였다. 새틴은 그에게 삼 개월 후 합의 이혼을 요구했고, 그는.

그는…….

새틴은 빙그레 웃었다.

그 남자와, 다시 결혼한다. 이번에는 확실히 저 스스로의 의지로.

“네.”

“새틴 델 마레. 그대는 그대 유일한 남편을 존중하며 생이 다하는 날까지 사랑하겠습니까?”

새틴의 언어는 신뢰였고 루블리에의 언어는 사랑이었다. 언뜻 다른 의미 같지만 하나도 다르지 않다. 신뢰할 수 있기에 사랑하고, 사랑하고 있기에 신뢰하는 것이다. 새틴은 그의 언어로 대답했다.

“네. 사랑합니다.”

“신의 이름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합니다.”

추기경이 두 사람의 성혼을 공표했다. 엄숙한 선언이 교당에 울려 퍼지자마자 루블리에는 그대로 새틴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민망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해서 입술을 꾹 잠그고 열어 주지 않으려는 새틴을 다독여 입술을 열고 그 안을 탐했다.

하객들 중 고지식한 일부는 눈을 반쯤 감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구경했다. 아우성이 쏟아지는 결혼식장 안에서 신임 법황은 귀빈석에 앉아 누구보다 크게 박수를 쳤다.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지만, 신임 법황이 자리에 올라 공식적으로 인장을 찍은 첫 서류는 두 사람의 재혼 승인이었다.

새틴과 루블리에는 교외의 저택에 두 번째 신접살림을 차렸다. 말은 신접살림이되 살던 집에 그대로 사는 것이라 달라진 점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지인들도 수시로 편지를 보내어 근황을 궁금해하고 모임이나 파티를 주최해 불러댔다. 매일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관심에 집에서 편히 쉬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아이가 안정기에 접어들기를 기다려, 새틴은 뒤늦은 신혼여행을 구실로 신혼집을 떠났다. 물론 남편인 루블리에도 함께였다.

1.

메에에. 메에에에. 울음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하얀 양 떼들이 구물구물 움직이고 있었다.

새틴은 기다란 안락의자에 앉아 등을 가볍게 흔들었다. 넓게 설치한 차양 덕분에 그늘이 짙게 깔려 생각만큼 덥지 않았다.

얼굴 옆으로 시원한 음료수가 불쑥 등장했다. 잔에 서린 냉기가 뺨을 차갑게 식혀주었다. 새틴은 팔만 뻗어 잔을 받아 들었다.

“전원생활이 마음에 들어?”

“응. 일생 중 한 번쯤은 조용하게 살아보고 싶었거든. 도시는 생기 넘치고 화려하지만, 복잡하고 시끄럽잖아.”

어차피 델 마레의 저택이 수도에 있는 한, 새틴은 평생을 시끌벅적한 수도에서 살아가야 했다. 파수꾼 가문에서 태어난 이상 고요하고 한적한 삶을 살 팔자가 아니었다. 그건 팔라딘 위를 유예 중인 루블리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여행 기한을 넉넉하게 잡고 집을 떠나왔다. 언제 돌아올 거니, 묻는 부모님에게 새틴은 질리도록 놀고 쉬다가 때가 되면 돌아오겠다는 대답을 했다. 수도를 벗어나면서 그간 많이 지쳐 있었구나, 싶어 스스로도 놀랐다.

헤아려 보면 아이를 가진 뒤로 편안하게 태교할 시간 자체가 거의 없었다. 임신한 줄도 모르고 기요른에게 시달리다 루블리에와 이혼했고, 입덧인 줄도 모르고 감옥에서 끙끙 앓았다. 몸 상태를 겨우 알게 됐더니, 그때부터는 재판이 시작된 데다 법황청으로 끌려가 감금당했다.

정말 뭐가 이런가 싶을 정도로 다사다난한 겨울이었다. 인생에 점지된 모든 액운이 딱 그 시기에 몰려왔다고 해도 믿을 것이다.

“너는 귀족의 화려한 생활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안락의자는 아무 데서나 꾸벅꾸벅 조는 새틴을 위해 루블리에가 집안과 야외 곳곳에 놓아둔 가구였다. 등받이가 깊게 기울어 있어서 잠깐 잠이 몰려올 때 그대로 눈을 붙이고 잠들기에 딱 알맞았다.

모든 안락의자의 등받이와 발 받침은 새틴이 눕기에 적당한 각도로 조절되었다. 루블리에는 절대 안락의자에 앉지 않았다. 걷고 뛰는 등의 정적인 활동이 많은 루블리에는 푹신한 의자를 다소 질색하는 면모가 있었다. 기사는 신체의 편안함과 거리가 먼 지위였다.

사용인이 재빨리 등받이가 딱딱한 의자를 하나 가져다주고 사라졌다.

“화려한 생활도 좋지만 나 한때 시골 내려가서 양이나 키우면서 살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있었어.”

“네가? 언제?”

어, 언제였더라.

기억을 더듬던 새틴이 머쓱하게 웃었다.

“막 결혼하고서 이혼하면 한바탕 시끄러울 테니까 조용한 데로 도망가려고…….”

“아, 그래?”

“……라리랑 내려와 살자 그랬지.”

슬슬 서운해지려던 루블리에의 눈매가 오랜만에 듣는 라리의 이름에 가라앉았다. 지난해, 새틴은 오래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잃었다.

신혼집까지 데리고 올 만큼 좋아했던 라리도, 또 비록 결말은 좋지 못했지만 태중 정혼자로서 평생 가장 친한 친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기요른도. 인생의 한 시절을 공유해온 누군가의 빈자리는 그냥 그 부재에 점점 익숙해지는 것이지, 채워지거나 잊히는 것은 아니었다.

루블리에도 문득문득 키리온을 떠올리곤 했다. 새틴의 명예가 회복되면서 키리온과 딜라일라의 이름은 완전히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의 오랜 친구는 누구보다도 법황이 되고 싶다는 야욕을 품은 사람이었다. 그 욕심이 그를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 마귀에게 제 그림자를 내어줄 정도의 욕심이 과연 얼마만 한 크기인지 루블리에는 차마 가늠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 순간에는 칼데브란카의 대주교이고자 했었다. 이는 루블리에, 새틴, 비탈리스. 단 세 사람만 아는 비밀이었다. 루블리에는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루블리에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빙긋 미소했다.

“네 계획을 내가 망쳤네?”

새틴도 싫지 않게 눈을 흘겼다.

“맞아. 내 계획은 하나도 이뤄진 게 없어, 너 때문에.”

“이제는 같은 배를 탔으니 네 소망이 내 소망이지. 말해 봐, 나도 같이 꿈꿀게.”

“내가 무얼 말할 줄 알고? 겁도 안 나?”

“네 소망인데 뭐. 뭐든 다 괜찮아.”

듣지도 않고 루블리에가 호언장담했다.

밤하늘의 달을 따오라고 해도 따올 것만 같은 자신감이다. 새틴은 그를 난감하게 만들만 한 소원이 뭐가 있을지 고심했다.

돈은 중요하지 않다. 델 마레나 카 딜론이나 부유하기로는 첫손에 꼽히는 집안들이라, 보석 몇 개, 집 몇 채야 좋기는 좋아도 이런 데 써먹기는 아까웠다.

무엇을 원한다고 하면 좋을까.

새틴은 이젠 들을 수 없는 명랑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실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을 돌이키고 싶었다.

그러면 라리가 죽지 않게 방비할 수 있을 텐데. 기요른에게 우리는 좋은 친구로 남자고 설득해서 일찌감치 정혼을 파기하게끔 손쓸 수도 있을 텐데.

좀 더 일찍 루블리에를 만나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수도 있을 테고, 키리온이 마귀에게 잠식당하지 않게끔 노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능한 한 사람들이 죽지 않게, 상처 입거나 후회하지 않게…….

상상하다가 너무도 허무맹랑한 소망이라 새틴은 이내 고개를 흔들어 미련을 털어 버렸다.

“……더 바랄 게 없어.”

정말 여기서 더 바랄 게 없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더 바란다면 욕심이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으로, 누군가는 이렇게 미래와 소망을 꿈꿀 수 있는 현실을 갖게 되었다. 지나간 날들을 돌이킬 수는 없으니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 희생된, 그리고 스스로 희생한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을 기리며 하루하루를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새틴은 입술을 다물고 안락의자의 쿠션에 뺨을 댔다. 루블리에가 팔을 뻗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 얼굴을 매만졌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간지러워, 절로 눈이 감겼다.

“난 하나 생각났어.”

루블리에가 속삭였다.

“뭔데?”

새틴이 나직이 물었다.

“더 바랄 게 없는 마음으로, 네가 매일을 살았으면 좋겠어.”

새틴은 천천히 눈을 뜨고 루블리에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 남자가 제게 가지고 있는 죄책감과 부채감을 알고 있다. 옆에서 평생 속죄하겠다는 그에게 아직 용서하지 않았다고도 말했다. 루블리에가 했던 여러 청혼의 말 중 가장 그의 책임감이 엿보였던 건 아무래도 손해 보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이 아니었을까.

“루브.”

그는 새틴이 자신과 결혼해서 큰 손해를 봤다고 믿는 것이다.

새틴은 루블리에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이미 벌어졌던 일들을 없었던 일로는 못 하겠지.”

“알고 있어.”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와 다시 결혼한 거야.”

없었던 신뢰를 차츰차츰 쌓아가기보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게 훨씬 어렵다고 말했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음에도 그 힘든 길을 선택했다.

“신기하지.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할 사이가 된 것도 알고, 잊어버릴 수 없는 기억이 너무 많다는 것도 알고…… 그런데도 그걸 다 포함해서, 너랑.”

새틴은 새침하게 마무리했다.

“어디 한번 계속해서 지지고 볶으며 살아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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