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작년과 올해, 칼데브란카에서 가장 유명한 결혼식의 주인공을 뽑아달라고 하면 사람들은 입을 모아 딱 한 쌍의 커플을 지목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들은 한 번 치르는 결혼식을 두 번, 그것도 똑같은 사람과 치렀다는 점도 흔치 않은 일이지만 가십으로 남기 쉬운 두 번째의 결혼이 모든 시민들의 축하와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치러졌다는 점 또한 더더욱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새틴 델 마레와 루블리에 카 딜론은 이를 가능케 했다. 그들은 위험에 빠진 진짜 법황을 구하고 마귀로부터 나라를 수호한 파수꾼 가문의 영예로운 영웅이었다. 더불어 사랑을 갈라놓으려 했던 악질적인 스캔들을 극복한 연인이기도 했다.
파혼한 전 약혼자와 바람이 났다더라. 전 약혼자과 짜고 차기 법황을 모해하려 했다더라. 그 와중에 전 약혼자의 아이를 임신했다더라.
당시 새틴을 둘러싼 추문은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바깥으로 드러난 새틴의 근황 또한 추문에 신빙성을 더했다. 그녀는 팔라딘인 남편과 이혼하고 옥에 갇혔다가, 키리온 대주교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기까지 했다.
모두가 델 마레 가문의 종말을 예상했다.
한데 이혼했던 남편이 나타나 전 부인을 구출하고, 그녀가 의문을 제기했던 신탁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새틴에게 따라붙었던 온갖 음해성 소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싹 감췄다.
이제는 아무도 지나간 소문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골목골목 모여서 신나게 뒷말을 떠들어대던 사람들은 수도의 분위기가 정리된 후 델 마레나 카 딜론의 마차 바퀴 소리만 들려도 등을 움츠리고 도망갔다.
흐른 시간에 비해 수많은 사고가 몰아친 탓에 새 계절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 불쑥 찾아왔다.
돌이켜보니 어느덧 봄이었다.
칼데브린카의 평온은 봄비처럼 조심스럽게 땅을 적셨다. 강퍅한 추위가 물러가자 온화한 새벽이 나타났다. 모두가 잊고 있던 고요한 아침이었다.
그간 이런 일상을 놓치고 있었구나.
사람들은 뒤늦은 탄식을 울렸다.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시작되고 끝난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마귀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 칼데브란카의 그늘에 숨어들었다. 심지어 칼데브란카의 중심인 법황청에서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했다. 모두 홀리는 줄도 모르고 홀려갔다. 그러다 보니 말을 아끼고 마음을 아끼고 일상을 아낀다, 이 간단한 진리를 잊어버린 채로 살았다.
하나 긴 겨울의 끝에 잊고 있던 가치를 되돌려준 사람이 바로 새틴이었다. 아무도 진실을 믿지 않아 주는 중에도 홀로 맞선 사람이 그녀였다. 사람들은 새봄을 가져다준 새틴에게 감사했다.
마귀가 사라진 이후로도 한동안은 놈이 만든 잔재가 남아 사람들은 까닭 없는 불안에 시달렸다. 이 불안을 완전히 종식시킨 것은 새틴과 루블리에의 재혼 소식이었다.
결혼은 일상과 밀접하게 관련된 대사다. 법황으로 믿고 따랐던 대주교가 실은 마귀였다는, 상상을 벗어난 악몽에 한바탕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던 시민들에게 두 파수꾼 가문이 주관한 결혼식은 일종의 전환점이 되었다. 다시 결혼하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는 약속이자 상징인 셈이다.
새틴 델 마레와 루블리에 카 딜론은 대대적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주례를 모시고서 화려하고 호화로운 예식을 치렀다.
드리운 볕의 색채가 예쁜 날이었다. 계절의 향기마저 설레는 날이었다.
교당의 전면에 두 가문의 휘장이 걸렸다. 하객들의 마차가 장벽처럼 교당을 길게 에워쌌다. 제복을 하나로 차려입은 기사들이 하객석을 가득 채웠다.
결혼식의 주인공이 그들의 수장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달리 하객들을 통제하라 이르지 않았음에도 교당의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하객들은 스스로 입을 꾹 봉하고 안내에 따라 차곡차곡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신부는 일찌감치 대기실에 도착해 하객들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신부를 시중드는 사용인들이 워낙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던 까닭에 신부의 지인들은 신부와 시선 한번 마주칠 기회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신랑의 대기실에서 신랑을 찾으려던 사람들은, 수선스러운 신부 대기실과 달리 텅 빈 대기실을 목도하고는 고개만 갸웃했다. 그쪽은 아예 사람이 없었다. 불도 켜 놓지 않아 캄캄했다.
“아니, 카 딜론 경은 어딜 가셨지?”
결혼식장은 뜻밖의 사건이 종종 벌어지는 장소다. 더구나 오늘의 주인공에게는 이미 화려한 전적도 있었다. 과거지사를 무심결에 돌이킨 사람들이 허둥대며 신랑을 찾다가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신랑은 신부의 대기실에 딱 붙어 있었다. 신부가 몇 번인가 쫓아내려는 듯한 손짓을 보였으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결혼 전에는 신부의 모습을 보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지만 신랑은 반죽도 좋게 눌러앉아 몸이 무거운 신부를 챙겼다.
하기야 진작 애까지 가진 사실혼 사이에 누가 감히 속설을 들이대겠는가. 신부도 마음을 비웠는지 포기하고 있다가 예식이 시작될 즈음 신랑의 부축을 받고 대기실에서 걸어 나왔다.
붉은 웨딩 로드 앞에 선 훤칠한 신랑은 임신한 부인을 염려하느라 긴장을 놓지 못하면서도 드디어 성사된 결혼에 더없이 싱글벙글, 행복해 마지않는 웃음을 보였다. 결혼식 하객으로 초대를 받은 신성 기사단의 기사들은 수장의 그런 낯선 모습에 모조리 휘둥그레졌다.
반면 신부는 차분했다.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한 배는 풍성한 드레스 자락 아래 숨겨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수척하던 뺨에 살이 오르고 결혼식에서 비롯된 긴장감으로 발그레한 생기가 돌아 재판 당시의 야윈 모습을 기억하던 사람들은 한결 안심했다.
그러나 신부는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면서 밑창이 낮은 구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필이면 신랑이 워낙 크고 묵직해서 더욱 대비되어 보였다.
“세상에서 제일 예뻐야 하는 날에 이게 뭐야.”
새틴이 투덜거렸다. 자그만 불평이었지만 신랑과 신부에게 집중하고 있었던 입구 근처의 하객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엿듣고 웃음을 참았다.
“무슨 소리야, 네가 제일 예쁜데.”
루블리에의 너스레에 새틴이 가볍게 눈을 흘겼다.
“더 예쁠 수 있었다고. 인생에서 한 번뿐…….”
돌이켜보니 한 번뿐인 결혼식은 아니었다. 새틴은 얼른 말을 정정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결혼식인데.”
루블리에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어릴 적 나이답지 않게 날이 선 서늘한 이목구비로 동급생들에게 본의 아닌 위압감을 주었던 인상은 나이가 들면서 그만의 색 짙은 분위기로 변모했다.
새틴의 드레스와 분위기를 맞춘 예복을 입고, 평소 대충 흐트러뜨리고 다니던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정돈한 채 우뚝하게 선 루블리에는 하객들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더없이 완벽한 신랑의 모습이었다. 신부가 제 옆에 서서 나란히 걸어갈 남자로 기대할 법한 바로 그 모습.
반면 새틴은 화장품도 함부로 쓸 수 없어서 신부로서의 치장에 한계가 있었다. 남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불편이야 차치하더라도, 일단 보이는 부분부터 아쉬운 데가 한두 곳이 아니었다.
몸이 피로해지기 쉽다는 이유로 구두도 뺏기고, 피부는 건조한 데다 기미까지 내려앉았다. 아이를 낳고 나면 다시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간다고들 했지만 결혼식은 당장 지금 치르는 행사니 문제다.
“나 억울해.”
결혼식 날, 최고로 주목을 받고 싶은 욕망은 이 세상 모든 신부의 공통된 소망이다. 인생의 마지막 결혼식장에서 소망을 실현하기 어렵게 된 새틴이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두고 봐. 이러다 나 결혼식 한 번 더 할 수도 있어.”
루블리에가 대번에 되물었다.
“누구랑?”
“날 최고로 돋보이게 해 줄 남자랑.”
“그럼 나네. 그런 남자는 나뿐이야.”
한결 안심한 얼굴로 루블리에는 몸을 굽혀 새틴과 눈을 마주했다.
“결혼식은 몇 번이든 올려도 되니까 나랑만 해.”
“몇 번이든?”
“구입했던 모든 웨딩드레스를 다 입어보겠다고 해도 좋고, 새로 맞춰오라고 시켜도 좋고, 매년 식을 올리겠다고 해도 좋고, 칼데브란카 영지마다 들러서 결혼식을 하자고 해도 좋고, 다 좋으니까 나랑만 해.”
새틴이 손을 들어 남편의 등을 때렸다. 루블리에가 소년처럼 씩 웃었다.
성가대의 노래가 시작됐다. 얼른 표정과 자세를 가다듬고 웨딩 로드로 걸음을 내디디려는데 갑자기 시야가 확 높아졌다. 루블리에였다. 그는 새틴을 두 팔로 번쩍 들어 안고서 웨딩 로드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전에 약속하지 않은 돌발 행동에 새틴은 물론이거니와 하객들마저 깜짝 놀랐다.
“어머, 무슨 일이야!”
“맙소사…….”
“신랑이 신부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나 봐요.”
하객들이 감탄과 비명을 연거푸 터뜨렸다.
“루브!”
새틴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항의하려다가 결국 웃고 말았다. 새틴을 안은 루블리에가 웨딩 로드를 삽시간에 가로질러 오자, 주례를 다시 서게 된 콘첸트 추기경은 하객들을 대신해 궁금증을 풀었다.
“카 딜론 경. 신부를 왜 안고 입장했습니까?”
루블리에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래야 몇 분이라도 일찍 결혼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단 몇 분이라도 성혼을 당기고 싶어 하는 신랑의 안달에 하객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남부끄러워진 새틴은 고개를 돌려 루블리에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예식은 지난번과 같은 절차로 진행되었다. 한 번 겪어본 순서라 지루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번 결혼식에는 정체를 숨기고 축혼 성가를 부르는 딜라일라도, 도살장에 끌려온 듯 기가 죽어 서 있던 기요른도 없었다.
악몽 같은 기억을 남긴 사람들이 사라진 결혼식은 새로웠다. 돌이켜 보면 지난 결혼식이 비정상적이었다. 행복을 선언해야 하는 결혼식인데 한 지붕 아래 두 마음이 공존했다. 의지하고 살아가고 싶다는 기대감은커녕 이런 놈과 평생을 살아야 한다니, 하는 막막함과 분노가 컸다.
이제야 깨달았다. 결혼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다.
“루블리에 카 딜론. 그대는 이 자리에 그대 스스로의 의지로 섰습니까?”
루블리에는 새틴을 내려다보았다. 이날이 오기까지 겪어야 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일렁이는 눈동자로.
남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했다가 파행으로 치닫는 꼴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청혼했던 남자. 생각해 보면 그건 어지간한 용기로는 저지를 수 없는 행위였다. 루블리에는 이미 그때, 이 자리에 스스로 기꺼이 서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사람에게 추기경의 질문은 무용했다.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