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마귀에 홀려 가던 마당에도 키리온은 루블리에가 돌아갈 자리를 남겨 두었다.
새틴은 흘끗 루블리에를 곁눈질했다. 비탈리스가 멋쩍게 뒷머리를 매만졌다.
“저, 저도…… 그래서 아, 안심했습니다.”
기사단의 체계는 엄중하고 복잡하다. 신성 기사단을 박차고 나간 수장의 자리를 복원하기보다는 장기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다고 넘어가는 쪽이 절차적인 면에서 훨씬 수월했다.
“무, 무기한의 장기 휴가로 믿고 있겠습니다. 며, 몇 달이든 몇 년이든 처, 천천히 쉬고 오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어조가 권유보다는 부탁에 더 가까웠다. 법황의 부탁을 마냥 거절하기도 민망한 짓이라, 루블리에는 가만히 헛웃음만 삼켰다.
“저, 저는 두 분의 도움이 꼭…… 꼭 필요합니다.”
비탈리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새틴은 속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루블리에는 새틴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일단 이 집에서 꿈쩍도 하지 않을 낌새였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돌아갈 곳이 필요해질지도 모른다.
그날을 위해서 비탈리스의 부탁을 간직해 두어도 좋을 것이다.
“차, 참. 두 분 겨, 결혼은 언제 하십니까?”
비탈리스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새틴은 아랫배를 매만지다가 화들짝 당황했다.
“결혼이요?”
이제야 아주 조금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간 못한 태교에 골몰하느라 결혼은 염두에 두지도 못하고 지냈다.
일 년 사이에 웨딩드레스 두 번 입을 생각은 차마 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요즘은 꼬박꼬박 의사의 진찰을 받으며 몸을 챙기기에도 하루가 분주한 와중이었다.
“제, 제가 슬슬 법황의 이, 인장을 찍어야 하는데…… 워, 원래 결혼과 이혼 일을 맡아서 했다 보니 이, 익숙한 업무부터 할까 합니다. 그런데 점점 서류가 싸, 쌓이고 있어서…… 오래, 오래 기다려드리기 힘들어서요.”
비탈리스는 떠듬떠듬 웅얼거리면서도 준비해 온 당부는 다 했다. 새틴은 적당하게 얼버무렸다. 왠지 숙제를 하나 얻은 기분이었다.
“새틴, 성하께선 가셨어.”
배웅을 마치고 돌아온 루블리에가 새틴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비탈리스에게는 아이가 튼튼해서 걱정이 없다고 말했지만, 약간은 선의의 거짓말이 섞여 있었다.
악령들이 저지른 학살 현장에서 살아 나왔는데 아무 충격이 없었을 리가 있을까.
거듭된 사건 사고로 단련된 새틴의 정신이 충격을 이겼을 뿐이다.
루블리에가 사람들의 행렬을 다 뒤져 데려온 의사는 이제 제발 임산부답게 지내야 한다며 신신부탁을 했다.
그래서 결혼이니 뭐니 주변 상황을 고려할 정신머리가 모자랐다. 루블리에는 한동안 새틴이 손가락만 하나 잘못 대도 어떻게 될 사람처럼 굴었다.
새틴도 본의 아니게 험한 일을 함께 겪은 아이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림자만 봐도 악령이 연상되는 스트레스 탓에 종종 배가 뭉치고 머리도 지끈거리고,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쏟아졌다.
“지금 자면 또 밤에 깰 텐데…….”
“괜찮아. 뭐 어때. 졸리면 푹 자. 밤에 깨면 일어나서 조금 바람을 쐬자. 요즘 날씨가 아주 좋아.”
새틴은 새우처럼 몸을 옆으로 말아 누웠다. 그러고서는 루블리에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는?”
“음, 나도 한숨 자고 일어나야겠다.”
루블리에가 새틴의 옆에 누웠다. 얼굴을 마주 보고 몸을 가까이 끌어안았다.
새틴은 눈을 감았다. 빨리 잠들어야 루블리에를 도와주는 셈이 된다.
규칙적인 생활이 몸에 밴 루블리에는 낮잠을 자는 일이 없었다. 그저 새틴이 잠들 때까지 다독이고 지켜보느라 곁을 떠나지 않는 것뿐이다.
그녀는 부스럭부스럭 그의 품에 파고들어 잠을 청했다.
결혼에서부터 악령까지 폭풍 같은 시간을 보낸 탓에, 가끔은 이런 평온이 꿈은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그러면 잠들었다가도 불쑥 소스라치며 깨어났다. 그럼에도 이 시기를 무사히 잘 넘기고 있는 건 모두 루블리에 덕분이었다.
눈을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전에, 루블리에의 장난스러운 음성이 마법처럼 들려오며 긴장을 녹여주었기에.
이만큼 적응하기까지 새틴은 물론이거니와 루블리에까지도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다.
특히 마귀에 관해서는 새틴도 루블리에도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한때는 현실이었으나 이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기억이 된 까닭이다.
잊지는 않지만 곱씹지도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넘기게 되리라.
이제 마귀는 과거가 되었고 주인을 잃은 악령들도 대부분 사라졌다.
먼 옛날 그러했듯이 뿔뿔이 흩어져 어디론가 숨은 녀석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아주 오래도록.
약간의 후유증은 남았어도 새틴은 지금 자신의 생활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평화가 쉬이 오지 않음을 알게 되었기에 더욱 소중해졌다. 지금의 하루하루는 새틴이 루블리에와 함께 직접 만들어낸 날들이었다.
새틴은 종종 부모님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불의에 순응하기 쉽다는 이야기를.
그러나 모두가 불의에 순응하지는 않았다.
의외의 사람이 불가사의한 용기를 내기도 한다. 위험에 빠질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도 신탁의 비밀을 알려왔던 사제처럼. 발견한 증거를 지니고 있다가 먼 길을 지나와 증명해 주었던 시신 안치소의 관리인처럼.
더불어 딜라일라의 이름은 빠르게 잊혔다.
실제로 잊혔기보다는 다들 잊기 위해 노력했다.
배우로서든 정부로서든 이름을 알리고 싶어 했던 여자였으니 그녀에게는 잊히는 것이 무엇보다 큰 형벌일 것이다.
훗날 시신으로 발견된 기요른의 손에 딜라일라의 옷조각이 쥐어져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딜라일라는 악령에게 기요른을 방패 삼아 빠져나왔던 게 아니었을까, 하고 새틴은 루블리에와 같이 추측했다.
대단한 여자였다. 그리고 나름대로 마귀의 한 축을 담당했던 여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를 바란 적이 없다던 딜라일라의 절규는 진심이었으리라 믿는다. 다만 분에 넘치는 욕심이 감당하지 못할 재앙을 불러왔을 것이다.
만약 악명 높은 후원자가 그녀를 착취하지 않았더라면, 예쁘고 재능있지만 어리고 힘없는 소녀가 오랫동안 피임약을 먹어야 할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딜라일라의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키리온에게도 나라의 안위를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믿는다.
키리온은 마지막 순간 대주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는 동생에게 전설을 선물하고 떠났다.
한때는 마귀였으되 결국은 법황의 아들이었다.
흔히들 하는 이야기지만 빛이 밝고 화려할수록 따르는 그림자는 짙게 마련이라 하지 않던가.
단지, 그곳에 마귀가 있었을 뿐이다.
* * *
잔물결이 비늘처럼 반짝였다.
밤에 일어나면 바람을 쐬자더니만 루블리에는 새틴을 호수까지 데려왔다.
한 번에 꼬박 걷기에는 힘든 거리라, 걸을 수 있는 만큼은 걸었고 그 외에는 루블리에에게 의지해 도착했다.
루블리에가 조심스럽게 내려준 땅바닥을 두 발로 타박타박 딛고 선 새틴은 그의 부축을 받아 조각배까지 건너왔다.
“신기할 정도로 안 바뀌었네.”
키리온이 성물을 찾느라 사람을 풀고 바닥까지 긁어 뒤졌던 호수는 기억에서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형태 그대로였다.
성물을 숨길 첫 은신처로 고르고 고른 장소다웠다.
새틴은 뱃전에 앉아 물결을 가볍게 쓸었다. 손이 보드랍게 젖어갔다. 편하게 다리를 뻗고 앉으려니 발끝이 루블리에의 다리에 맞닿았다.
좁은 조각배는 느린 속도로 수면을 둥둥 배회했다.
“새틴.”
“그 다이아몬드면 나 안 받아.”
이름을 부르자마자 새틴이 받아쳤다. 루블리에는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응?”
“잠깐의 바깥 산책도 걱정하는 네가, 굳이 나를 안고 도망도 못 갈 호수 위까지 데리고 들어왔으면 속이 아주 뻔한 거 아냐?”
이 관계를 정립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겠지. 대단한 눈치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사실 이런 순간이 다가오면 여자들 대다수는 일찌감치 육감으로 알아차린다.
하나 겉으로 티를 내느냐, 아니냐에서 선택이 갈릴 뿐이다. 심지어 새틴은 이미 유경험자였다.
“걱정 마. 그렇게까지 대단한 반지는 아냐.”
경매장까지 팔려나간 남의 집 가보는 새틴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다시 준다 해도 받을 마음이 안 들었다. 게다가 그 목걸이를 보면 자연스레 떠오를 사람도 있었다.
상처를 건드리는 보물은, 손에 두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럼 뭔데?”
“내가 생각해도 우리 결혼 증표를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건 싫어서. 아무리 대단한 보물이라도 언젠가 남의 손으로 넘어갈 물건이라면…… 내 게 아닌 것만 같잖아.”
루블리에는 상자를 열어 반지를 꺼냈다. 같은 세팅의, 크기만 다른 반지 한 쌍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우리끼리 나누고 영원히 간직하자.”
그가 새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반지를 끼워주며 청혼했다.
“새틴 델 마레,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같은 남자에게서 두 번 청혼을 받았다. 그땐 훤한 대낮에 눈앞이 핑그르르 돌며 별이 보였는데, 지금은 캄캄한 밤하늘 가득 흩뿌려진 별이 호수에 담겨 찬란했다.
입술을 꾹 다물고 반지만 내려다보는 새틴에게 루블리에가 입가를 당기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어차피 누군가와 결혼을 하긴 해야 하잖아. 그럼 나랑 해.”
기억을 건드리는 이야기에 일순 심장이 아려왔다.
새틴은 시큰거리는 울음을 참으며 새초롬히 반문했다.
“그래서? 이 결혼을 하면 내가 얻는 게 뭔데?”
루블리에가 대답했다.
“평생 너한테 속죄하면서 살 멍청한 남자 하나.”
“그럼 너는?”
“……너와의 결혼?”
“아,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야.”
새틴은 눈을 흘기다 어깨를 화드득 움츠렸다. 방금 아랫배에서 뭔가 톡, 건드리는 느낌이 든 까닭이었다.
“어?”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방금 애가 움직였어.”
“뭐?”
새틴은 배를 매만졌다. 루블리에도 다소 얼이 나간 표정으로 새틴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어디? 아…… 다시 잠들었나?”
루블리에는 어찌할 줄을 모른 채 허둥거렸다. 생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는 잠잠하기만 했다.
이거 봐, 아이도 아빠의 청혼이 마음에 차지 않은 것이다. 아이는 엄마와 기분을 공유하니까.
새틴이 울컥했다.
“두 번째 청혼도 이러기야? 애도 걷어차잖아. 너 나한테 할 말이 그것밖에 없냐고.”
두 번의 청혼, 결혼과 이혼과 재혼, 그리고 처음으로 느낀 아이의 태동까지 온통 눈물이 날 일만 벌어지는 밤이었다.
하나씩 차례차례 와도 시간을 들여 적응해야 할 판인데 한꺼번에 닥쳤다. 하필이면 감정의 기복도 심한 시기였다.
이상하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새틴은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훌쩍훌쩍 우는 새틴을 보듬으며 루블리에도 울컥한 눈을 그녀의 머리카락에 파묻었다.
“미안해, 새틴.”
“속죄만 하는 남자 필요 없어, 네가 두 번 속죄했다간 내가 죽겠어. 다른 약속을 해.”
물기 어린 음성이 새틴의 가슴을 두드렸다.
“나에게 너를 평생 당당하게 사랑해도 될 자격을 줘.”
“그리고?”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너를 보게 해줘. 아이에게 네 엄마가 얼마나 대단하고 멋있는 사람인지 자랑할 권리를 줘. 너에게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필요할 때, 처음으로 부르는 이름이 나였으면 좋겠어. 네가 평생을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
같이 울고 웃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 나는 뭘 하면 되는데?”
“넌 내게…….”
눈이 마주쳤다. 루블리에가 이마를 맞대고 얼굴을 더듬어 매만졌다.
“그냥 있어 주기만 하면 돼. 넌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한 사람이니까.”
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블리에가 진중하게 약속했다.
“절대로 손해는 안 보게 할게.”
“당연하지.”
“당연한 약속 하나 더 할게. 사랑해.”
“……알아, 나도. 사랑해.”
눈이 부셨다. 새틴은 눈을 감았다. 마음이 달아 간지러웠다.
눈물길을 따라 다가오는 입술이 깊었다. 눈을 감고 귀를 닫고, 느껴지는 감촉에만 오롯이 열중했다.
제 모든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의 모든 모습을 보았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부터 가장 미운 모습까지 모조리 다. 그렇게 그를 이해했고,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
이만큼 벅차게 겪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함께 의지하며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결혼식장에서 남편을 바꿨다.
그건 인생에서 최고로 잘한 결정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