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112)

<106화>

사랑이 아니고서는 이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 무엇을 감수하더라도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것. 그저 함께 있어야만 하는 것. 위험을 알면서도 끝내 뛰어들게 만드는 것.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도 사랑일 리가 없다.

‘나는 어찌 되든 괜찮아. 너만 살면 돼. 내가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어.’

그의 고백이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미처 몰랐으나, 그는 일찌감치 오늘을 각오했었던 듯했다.

누가 바란다고.

그런 걸, 대체 누가 바란다고.

무기를 잃은 루블리에를 키리온이 몰아붙였다. 그를 해치려는 검의 궤적이 아찔했다.

루블리에는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러나 그 운이 몇 번이나 더 이어질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루브!”

새틴이 악을 질렀다.

“지켜준다며! 평생 속죄한다며! 약속을 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할 거 아냐! 나 아직 너 용서 안 했어! 나쁜 놈, 죽으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악령으로부터, 마귀로부터 그를 구해야만 했다. 새틴은 루블리에가 있는 계단 아래로 한달음에 달려 내려갔다.

그녀는 품에서 성물을 꺼내 들고 마귀에게 소리쳤다.

“이쪽이다, 마귀야. 네놈이 바라던 성물이 바로 여기 있어!”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 자리의 모두가, 동시에 제각각의 선택을 마쳤다.

키리온은 새틴이 가진 마지막 조각을 욕망하느라 다가오는 새틴을 향해 몸을 틀었다.

비탈리스는 키리온을 제지하기 위해 루블리에가 집어던진 검을 주워 계단을 뛰어내리며 내질렀다.

그러나 검을 다룰 줄 모르는 몸이라 어설프게 쥐고 찌른 검은 뒤로 돌아선 키리온의 가슴을 얄팍하게 파고들었을 뿐이었다.

루블리에는 미끄러운 계단을 위험천만하게 달려 내려온 새틴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의 선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새틴이었다.

새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악령들이 루블리에에게 달려들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검게 얼룩진 안개의 한복판을 제 몸으로 뚫고 들어왔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것이다.

“당연하지, 당연하잖아…… 새틴.”

루블리에는 새틴의 머리를 꽉 끌어안았다.

“대체 무슨 걱정을 한 거야. 내가 설마 아무런 대책도 없이 죽기라도 할까 봐? 어디 안 가, 널 두고 절대 안 가. 약속해.”

새틴은 루블리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도 가슴이 복받쳐 눈물이 절로 쏟아졌다. 루블리에는 서럽게 우는 새틴을 안고 등을 다독였다.

“마귀…… 마귀는…… 마귀는……?”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로 새틴은 마귀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눈을 커다랗게 홉떴다.

놀랍게도 키리온의 등에 웬 검이 하나 꽂혀 있었다.

키리온은 비틀거리며 벽을 손으로 짚으려 했다. 그러나 경련을 일으킨 손은 벽에서 미끄러져 아래로 툭 떨어질 뿐이었다.

금발의 대주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비탈리스가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내지른 장검과 등 뒤에 박힌 새 검을 더듬더듬 확인하고서, 그는 웃었다.

기가 막힌 듯도 했고 쓰디쓴 듯도 했고 어째서인지 속이 시원한 듯도 했다.

“……완성된 검으로 나를 찔렀다면 지금 여기는 완벽하게 힘을 회복한 마귀가 재림했을 테지…….”

그제야 새틴은 키리온의 등을 찌른 검의 정체를 눈치챘다. 각 가문에서 모은 성물을 이어붙여 복원한 성검이었다.

키리온이 허리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절대 뽑지 않는 검의 손잡이를 보고 실체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루블리에는 새틴이 운을 걸고 승부를 던지자마자 마귀의 빈틈을 읽었다.

그는 삽시간에 검을 빼앗아 등에 박아넣고 달려온 새틴을 끌어안았다.

마지막 조각의 부재로 완성되지 않은 칼이었으나, 루블리에는 오로지 완력으로 밀어붙였다.

깊은 상처를 입히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는 성검으로 잠시 시간을 벌어 새틴을 내보내고, 다시 무기를 회수해 싸울 작정이었다.

“……키리온?”

“이제 알겠군. 왜 내 귓가에 누군가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었는지…….”

“혀, 형님……?”

비탈리스가 멍하게 반문한 즉시 키리온이 고함쳤다.

“……찔러, 비탈리스! 나는 오래 못 버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 단박에 이해됐다. 하나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은 별개였다.

키리온의 독려에도 비탈리스는 손을 주체할 수 없이 떨어댔다. 가슴을 얕게 파고든 검의 날을 타고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새틴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형의 죽음과 마귀의 죽음의 기로에 선 비탈리스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였을까.

새틴은 불현듯 칼데브란카의 건국 전설을 떠올렸다.

세상을 횡행했던 마귀와, 동료들의 도움을 얻어 마귀의 심장을 찔렀던 초대 법황인 디오니시오 1세의 전설을. 오늘도 마귀와 영웅과 동료가 전부 한자리에 있었다.

“형님…….”

“빨리, 비탈리스!”

눈빛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키리온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미 몸의 통제가 넘어갔던 마당에 마귀를 잡을 방법이 달리 없는 것도 알았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뭐든,”

루블리에에게는 키리온도, 비탈리스도 차마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어떻게든 둘을 구해보려는 루블리에의 중재를 키리온은 급히 잘라 끊었다.

“루브. 자네는…… 내가 내 안위 이상으로 칼데브란카를 염려하고 있다고 말하면 믿을 텐가……?”

“……키리온.”

고통에 헐떡이면서도 키리온은 명료하게 선언했다.

“……지금 마귀로 엉망이 되어버린 이 나라에는 전설이 필요해. 새틴, 나를 용서하시오. 루브, 뒷일을 잘 부탁하네.”

비탈리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키리온도 두 손으로 칼날을 쥐고, 이를 악물었다.

“축하한다, 비탈리스. 네가 마귀를 없앤 영웅이다.”

비탈리스가 마침내 형의 심장을 찔렀는지, 혹은 키리온이 제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는지 새틴은 알지 못했다.

이를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비탈리스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둘 중 한 사람은, 혹은 두 사람 모두가 크나큰 용기를 냈을 것이다.

건국 역사가 반복되었다.

오늘이 지나면 누군가는 비탈리스의 숭고한 선택을 노래하거나, 조각하거나, 또는 그림으로 남길 터였다.

예술가들에 의해 공연으로 만들어지고 시로 읊어지면서 길이길이 기억되리라.

그러나 후대의 전설 속 비탈리스는 지금의 비탈리스처럼 검을 놓아버리고 형의 발치에 엎드려 손을 모아 빌면서, 머리를 숙이고 크게 울부짖는 모습으로 남겨지진 않을 터였다.

그는 마귀를 발아래 꿇리고 검을 들어 군림하는 용맹한 모습으로 남겨질 것이다.

초대 법황인 디오니시오 1세가 그러했듯이.

전설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법이다.

* * *

“수장님!”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수도의 시민들을 대피시킨 신성 기사단이 루블리에를 찾아 법황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법황청 곳곳에 죽어 넘어진 시체들과 목숨만은 건졌지만 크게 다친 부상자들을 지나, 피비린내 나는 복도를 지나쳐 마침내 루블리에를 찾아낸 기사들은 중앙홀에 펼쳐진 광경 앞에서 당혹해졌다.

루블리에는 어쩐지 오랜만처럼 느껴지는 부하 기사들과, 흩어졌던 부하들을 모으고 모아 법황청까지 몰고 온 부관을 둘러보았다. 

그는 기나긴 오열로 한바탕 엉망이 된 비탈리스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서 팔라딘의 얼굴로 명령했다.

“비탈리스 법황 성하시다. 모두 예를 갖추도록.”

어리둥절하던 기사들은 이내 혼란을 갈무리하고 차례차례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수장이 법황이라 하면 진실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블리에가 새 법황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귀는 사라졌다.

평화는 이 자리에서 새롭게 시작되었다.

*  *  *

“모, 몸도 힘드신데 누, 누워 계십시오.”

“그래, 좀 누워 있어. 응?”

병문안을 온 비탈리스를 맞이하려 몸을 일으키던 새틴은 두 남자의 완강한 만류에 도로 드러누웠다.

“괜찮아요. 의사가 그러는데 아이가 하도 튼튼해서 아무 문제 없대요. 안 그래도 누가 자꾸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니까 몸만 더 찌뿌둥한걸요.”

게다가 법황을 누워서 맞이하는 경우가 어디 있나.

새틴은 루블리에를 흘겨보았다. 눈총을 받은 루블리에는 하는 수 없이 새틴을 부축해 앉히고 허리 뒤에 쿠션을 괴어주었다.

분주하게 시중을 드는 루블리에와 여전히 도도하고 새침한 분위기의 새틴을 바라보다가 비탈리스는 벙긋 웃었다.

“파, 팔라딘과 새틴님. 두, 두 분 잘 지내고 계셔서 기쁩니다.”

루블리에와 새틴은 비탈리스의 권위가 지켜지게끔 도와준 파수꾼 가문의 동료들이었다.

다섯 파수꾼 가문들 중 셀 위오는 가주를 비롯한 직계 가족 대부분이 법황청에서 사망해 유명무실한 처지가 되었고, 다른 두 가문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어 복구 중이었다.

그러나 간신히 복구가 되더라도 조작된 신탁을 옹호한 바가 있으니, 그에 따른 처벌을 피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비탈리스를 전면적으로 돕는 파수꾼 가문은 델 마레와 카 딜론 둘뿐이었다.

피신했던 사람들을 다시 수도로 불러오고 사상자들을 수습하느라 두 가문은 여느 날보다 훨씬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비탈리스는 키리온이 신혼집을 수색하면서 거둬간 재물들을 델 마레에게 돌려주고 사과하기도 했다.

하여 요즘은 한동안 멈추어 있었던 칼데브란카가 나름 삐걱삐걱 굴러가는 중이었다.

다만 새틴은 몸을 우선으로 추스르기 위해 어질러진 신혼집을 고치고 들어와 지루하리만치 조용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루블리에도 아예 카 딜론 저택에 있던 제 짐들을 모조리 싸서 새틴을 쫓아왔다. 새틴의 일상은 곧 그의 일상이었다.

루블리에는 비탈리스가 택한 ‘팔라딘’의 호칭에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그날은 기사단을 통솔할 사람이 없어 잠시 제가 대신했지만, 원칙적으로 저는 이제 기사가 아닙니다. 그만두었으니까요.”

루블리에의 대답에 비탈리스가 다소 난감한 기미를 내비쳤다.

“저, 저도 그러신 줄 아, 알았는데 혀, 혀, 형님이 처리하신 서류를 열어보니…… 장기 휴, 휴가 처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루블리에가 눈썹을 좁혔다.

“휴가 처리라고 하셨습니까?”

“예……. 아, 아마도 경이 도,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루블리에는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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