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검을 부딪는다면 상대는 반드시 똑같이 검을 쓰는 사람일 테다. 악령 상대로는 검을 방망이처럼 휘두를 테니 소리가 달라야 마땅하다.
기사단이라는 희망에 잠시 판단력이 마비됐던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당황, 그리고 돌아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갈등이 침묵 속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러나 계단 아래에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순간 모든 당황과 갈등은 사라졌다.
루블리에였다.
기이한 일이었다. 분명 한 톨의 빛에도 반드르르하게 반짝이는 금발을 가진 키리온이 더 새틴과 가까이 위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틴은 악령들이 드리운 그늘 속에 잠겨 분전하는 루블리에를 먼저 알아보았다.
한눈에도 그가 먼저 보였다. 그가 있는 장소만 공기가 다른 느낌이었다.
명암이 다른 느낌이었다. 전신의 모든 감각이 루블리에를 감지했다. 놀라웠다.
“겨, 경이…….”
조금 늦게 루블리에를 알아본 비탈리스가 아연히 중얼거렸다.
악령들이 루블리에의 검을 늦추고 몸을 물어뜯으려 했다. 반투명한 안개 덩어리가 어지러이 휘감겼다.
놈들은 집요하게 루블리에만 노렸다. 루블리에는 악령을 후려갈겨 걷어내면서 키리온의 공격을 받아쳤다. 말도 주인을 도와 거칠게 날뛰었다.
루브.
새틴은 입안으로 되뇌었다. 차마 크게 소리쳐 부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의 집중이 깨질 것만 같아서, 방해가 될까 겁이 나서 그저 뻣뻣하게 멈추어 있기만 했다.
루블리에를 상대로 키리온은 제법 대등하게 싸웠다. 검이라고는 아카데미에서 체력 증진을 위해 적당히 다뤘던 게 전부고 근 몇 년은 주로 책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그였으나, 마귀의 속삭임은 키리온의 힘을 한계까지 쥐어짜게끔 했다.
루블리에를 가로막는 악령들의 훼방도 한몫했다. 몸에 남을 후유증은 안중에도 없었다.
까앙! 맞물린 쇳덩이들이 이를 갈았다.
악령들이 달라붙어 느낌이 둔중할 텐데도 루블리에는 용케 놈들을 짓쳐 내며 검을 막았다.
까앙, 까앙, 깡! 연달아 마찰음이 터졌다.
가슴이 조여들었다. 새틴은 발 끝에 힘을 실었다. 키리온이 온 힘을 다해 루블리에의 검을 내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루블리에는 잘 막아내고 있었지만, 좀처럼 방어에서 공격으로 선회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를 안다.
방금 루블리에와 눈이 마주쳤다.
새틴이 루블리에를 알아보았듯 루블리에도 단번에 새틴을 알아보았다.
이름을 크게 부르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그의 주의력이 흐트러질까 염려해 아주 조심스럽게 있었는데도 루블리에의 시선은 아주 당연하게 새틴을 곧장 분간해냈다.
절실한 눈빛이 새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어떻게 지내고 있었던 것인지 필사적으로 헤아리려는 듯한 눈길이었다.
괜찮아, 하고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별일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잘 버텼어,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블리에가 안도의 눈길을 흘렸다. 말 한마디 없이, 오가는 것은 시선의 방향과 눈빛뿐인데도 의미는 선명하게 전해졌다.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가. 어서 가.
무언의 재촉이 등을 떠밀었다. 새틴은 무심결에 뒷걸음질을 치려다 말고 루블리에를 똑바로 응시했다.
재회와 이별이 단 한 번도 예상대로 된 날이 없다. 그는 늘 제멋대로 나타났다.
예고도 없이 새틴의 결혼에 끼어들어 천국과 지옥으로 인생을 흔들어 놓고서는 이별을 고하더니, 가장 바닥까지 떨어진 순간 상상을 벗어난 방식으로 그녀를 건져냈다. 그러고는 만나자마자 또다시 작별을 하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작별하면 이다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마귀와 단둘이 남겨놓고 무슨 마음으로, 어떤 기억으로 헤어져야 하는 거지?
왜 이렇게 매번 가슴이 울렁거리는 거지?
네가 뭔데. 내 인생에서 대체 네가 뭐기에.
가장 고마운 사람도, 가장 미운 사람도,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도, 가장 원망했던 사람도 하나같이 그였다.
백 하고도 하나의 마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끔 발목을 붙잡았다.
새틴이 꼼짝도 하지 않으니 비탈리스가 조심스럽게 새틴의 소매를 끌었다. 어서 가야 해요, 그가 입을 벙끗거릴 무렵이었다.
“가긴 어딜 가시오.”
엄중한 고함이 날아들었다.
어느새 키리온이 비스듬히 고개를 꺾고 있었다.
소름이 오소소 내달렸다. 언제부터 새틴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혹시 부러 떠보는 소린가 했으나, 키리온의 의도는 확연히 새틴을 향해 있었다.
“그렇게 열렬히 눈빛을 보내는데 내가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섭섭하지. 안 그런가, 루브? 게다가 뒤에서 풍겨오는 느낌도 아까와는 사뭇 다르군. 재주도 좋소. 어떻게 무사했지? 게다가 성물은 어디서 돌려받은 거요?”
새틴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피해, 새틴!”
품에 숨긴 성물을 꽉 끌어안는 동안 악령들이 허공을 질러 접근했다. 겁을 먹은 비탈리스가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새틴은 비탈리스를 앞질러 서서 키리온을 노려보았다.
“얼마든지 해 봐요. 악령들은 나한테 절대 해를 끼치지 못하니까.”
바닥과 벽 사이에 숨어 튀어 오르던 놈들이 새틴에게 가로막혔다. 악령들은 새틴의 주위를 뱅뱅 배회했다.
그러나 고작 그뿐이었다. 놈들은 새틴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새틴은 담담하게 놈들을 흩어냈다. 악령들 중 일부는 억울함에, 일부는 악에 받쳐 고개를 들이밀었지만 새틴의 성역은 굳건했다.
새틴과 비탈리스가 경계해야 하는 유일한 상대는 키리온이었다.
악령은 막아도 검은 못 막으니 법황청을 도망쳐 나갈 작정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루블리에가 먼저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이젠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무섭지 않았다.
“……당신은 몇 번이나 나를 놀라게 하는군.”
새틴은 대답 대신 루블리에와 시선을 교환했다. 키리온에게 한 선언은 기실 루블리에에게 전달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 정도로 연약하지 않다고. 지금 당장 도망치지 않아도 괜찮다고.
“혀, 형님. 이, 이제 제발 그, 그, 그만두세요. 카, 카 딜론 경은 혀, 형님의 가장 친한 친구 아, 아닙니까?”
오로지 키리온을 예전으로 되돌리고 싶다는 소원 하나로 법황청에 들어온 비탈리스가 때를 놓치지 않고 애원했다. 루블리에는 키리온의 절친한 친구였고 칼데브란카는 그들이 나고 자란 나라였다.
어느 시점까지 분명, 키리온은 나라와 친구와 가족을 사랑했었다.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했었다.
하나 마귀는 이백 년 동안 자신을 봉인한 자의 혈손을 떠나지 않고 호시탐탐 부활의 기회를 노려왔다.
키리온의 귓가에 미혹으로 가득 찬 속삭임을 뿌렸다.
“마, 마, 마귀는 혀, 형님을 이용…… 이용하는 거예요! 저, 정신을 차리세요!”
비탈리스가 고함을 내질렀다.
어떻게든 키리온의 영혼을 예전으로 돌이키고 싶은 심정을 누가 모르겠는가.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을 함께한 유일무이한 친구를, 혹은 믿고 의지했던 가족을 무감하게 베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루블리에든 비탈리스든 키리온의 정신에서 마귀를 쫓아낼 수만 있다면 마땅히 그 방법을 택할 터였다.
마귀에 들려 있다 해도 겉모습만은 변함없는 키리온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손속을 더욱 잔인하게 쓰는 사람은 키리온이었다. 악령이 새틴에게 통하지 않자, 그 분노까지 실어 키리온은 루블리에의 목을 찌르고 들어갔다.
스치기만 해도 크게 다칠 급소를 일부러 노리는 티가 역력했다. 루블리에는 몸을 뒤로 젖히며 검을 튕겨냈다.
“가지 마, 가지 말라니까!”
문득 악령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새틴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악령들도 자신들의 위협이 먹히지 않는 새틴에게 굳이 머무를 까닭이 없었다.
놈들은 새틴을 포기하고 스멀스멀 루블리에의 근처로 모여들었다. 어떻게든 적을 하나라도 줄여주고 싶어 촛불을 휘둘러도 봤지만, 자유롭게 공중을 오르내리는 악령들은 새틴을 피해 금방 날아가기 일쑤였다.
루블리에는 도리어 악령들이 새틴 대신 제게로 몰려오자 한결 안심한 눈치를 보였다.
“예하, 어서……!”
새틴만 내보내기를 바라는 루블리에와 새틴을 붙잡아야만 하는 키리온의 검이 재차 얽혔다.
그녀가 비탈리스와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느라 루블리에는 사력을 다해 키리온을 막고 또 막아섰다.
“가, 가십시다. 새틴님.”
비탈리스도 새틴을 독촉했다. 루블리에의 염원도 염원이었으나, 그가 생각해도 새틴은 법황청에서 나가야만 했다.
만약 새틴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이까지 두 사람이 한꺼번에 잘못되는 꼴 아닌가.
“안 돼요……. 어떻게 나만, 여기서…….”
비탈리스의 인도에 따라 주춤주춤 두어 걸음을 옮기면서도 새틴은 연신 루블리에를 돌아보았다.
나가야 한다는 생각과 루블리에를 두고 혼자서 나갈 순 없다는 생각이 혼재해 어지러웠다.
“살려줘요…… 살려줘…… 난 살아야 해…….”
그때, 창백한 목소리가 네 사람 사이를 비집고 기어들었다.
딜라일라였다.
반쯤 넋이 나간 딜라일라가 여기저기 뜯어먹힌 상처투성이의 몸을 질질 끌며 걸어오고 있었다.
해초처럼 땀과 피로 질척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온통 얼굴을 가려, 희뜩한 동공이 언뜻 보였다가 사라졌다.
가까이서 보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도록 끔찍한 몰골이었다.
반쯤 헐벗은 몸뚱이도, 본래의 아름다운 형태를 기억하기에 망가진 지금이 더욱 잔혹하게 느껴졌다.
딜라일라는 새틴을 발견했다. 비탈리스도 발견했다. 뒤이어 키리온과 루블리에도 발견했다.
그녀는 비척비척 다가왔다.
“……딜라일라.”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넋이 나간 읊조림이었다. 피로 얼룩진 손이 허공을 쥐어뜯었다.
“딜라일라. 살고 싶다면, 그 여잘 잡으시오!”
순간 기회를 직감한 키리온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아는 음성이었다. 무서운 음성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음성이었다. 악령을 부리는 남자는 딜라일라가 겪은 사람들 중, 가장 두려운 힘을 가진 자였다.
더불어 그녀는 늘 강한 힘을 추구하고 권력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왔다.
딜라일라는 학습된 본능에 따라 팔을 내밀었다. 비탈리스가 허둥지둥 막아서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자그맣고 야위어빠진 여자를 계단 아래로 밀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상대방의 목에 손이 닿았다.
귀한 신분으로 자라나 고고하고 거만하게 굴던 그 새하얀 여자는,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서 딜라일라를 응시했다.
여자가 입을 벌려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그리고 딜라일라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불빛이 꺼지듯 감각이 완전히 꺼졌다.
아주 짧은 찰나였다. 딜라일라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른 채로 의식이 끊겼다.
일순 시간이 멎은 듯했다.
새틴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딜라일라를 내려다보았다. 떨어지면서 난간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 뒷머리부터 흘러나온 피가 층계를 검붉게 물들였다.
딜라일라를 정확하게 맞추고 떨어진 검이 까르릉, 몸을 떨었다. 루블리에의 검이었다.
그는 두 번 고민하지도 않고 검을 집어던져 딜라일라를 막았다. 검이 사라지면 키리온과 대적할 유일한 무기를 잃어버리는 셈인데도, 루블리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새틴, 가!”
무조건 새틴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 했던 것이다. 자신의 안위 따위는 고려할 겨를도 없이, 오로지 딜라일라가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하려고.
사람은 때론 바보 같은 선택을 한다. 뒤따를 위험을 뻔히 알면서도, 가슴이 시키는 선택에 굴복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내내 갈팡질팡하던 마음이 드디어 갈피를 잡았다. 새틴은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루블리에의 곁에 남아야 했다. 도저히 그를 버리고 도망갈 수가 없었다.
마침내 제 진심을 직시하고야 말았다. 많은 일을 겪었어도, 그로 인해 저 바닥까지 추락했어도 결국은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