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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104/112)

<104화>

두 사람은 조심조심 움직였다. 손을 맞잡고 끈적끈적하게 젖은 복도를 달렸다.

기요른은 이를 악물고 다리의 통증을 참아 냈다. 차마 아픈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딜라일라도 뒤처지지 않고 잘 따라왔다.

“……우리, 나갈 수 있겠죠?”

어두컴컴한 복도를 곁눈질하며 딜라일라가 소곤소곤 물어왔다. 기요른은 애써 희망을 더듬었다.

“반드시 나가야 해요. 나가야 우리 가족들 소식도 들을 수 있고…….”

“아, 그렇군요. 기요른님의 가족들도 다 같이 법황청으로 들어왔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나가기만 하면 금방 소식을 알게 되실 거예요. 다들 무사하실걸요.”

딜라일라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지극히 막연한 기대였으나 지금은 좋은 생각만 해야 했다. 굳이 나쁜 불안들로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렇겠죠.”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 기요른은 딜라일라를 돌아보았다.

“……당신은요?”

“저야 달리 가족이 없는걸요.”

“대극장으로 돌아갈 건가요?”

“글쎄, 극장이 무사할까요?”

“고향은요?”

“모르겠어요.”

딜라일라는 머뭇거리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저는, 늘 그다지 행운이 따르지 않는 편이었는걸요.”

기요른은 어둡게 침잠해 들어간 딜라일라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딜라일라. 당신이 떠나고 나서 난 당신을 만나면 이걸 꼭 물어보고 싶었어요. 단 하루라도 좋으니 진심으로 날 사랑한 적은 있었어요?”

딜라일라는 단숨에 대답했다.

“그럼요! 사실은 기요른님을 정말로 많이 사랑했어요. 기요른님은 아무 조건 없이도 절 사랑해 준 분이신걸요.”

다소간 다급하게도 들릴 법한 말을 마치고서, 그녀는 짧게 숨을 돌렸다. 어지러움에 잠긴 기요른의 얼굴은 기분이 가늠되지 않았다.

딜라일라는 좀 더 신뢰감을 부여해 줄, 한결 차분해진 음성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때 기요른님을 떠나면서 했던 제 이야기는 결코 진심이 아니었어요. 저는 셀 위오 저택 내에서 내내 설 자리가 없었고, 언젠가는 쫓겨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살아남을 길이 필요했을 뿐이고 키리온 예하께서 가진 조건은 매력적이었죠. 저는 언제나 제 미래를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감정을 우선하지 못하는 선택을 해왔어요. 제 인생은 늘 남의 손에 좌우됐어요. ……아시잖아요.”

교태를 걷어낸 고백은 잔잔한 후회를 담고 있었다. 딜라일라는 쓸쓸하게 미소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제가 참 눈이 어두웠다 싶어요. 제가 어리석었죠.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절대 키리온 예하를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이 괴로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사랑을 버렸는데, 저는 미래도 잃고 사랑도 잃었네요.”

기요른은 복도의 창문마다 드리워진 적요한 밤을 바라보았다.

“그럼, 딜라일라.”

“네.”

“여길 나가면 우리…… 같이 살까요? 셀 위오든 뭐든 신경 쓰지 말고 우리 둘이서만.”

딜라일라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기요른은 욱신거리는 종아리를 매만지며 딜라일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좋아요.”

아주 가녀린 대답이 기요른의 귓가를 스쳤다. 속삭임이 워낙 나직하여, 그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좋아요.”

이번에는 확실하게 들렸다. 딜라일라가 기요른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기요른은 팔을 들어 딜라일라의 등을 껴안았다.

그들은 즐거운 희망으로 머리를 채웠다. 대단한 부귀를 누리지 못한대도 괜찮았다. 기요른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었고, 딜라일라는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젊고 건강한 청년들이니 몸 하나 건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씀씀이는 줄이면 된다. 작은 집을 구하면 채워 넣을 세간도 많지 않았다. 집안일을 함께 하고, 자연스럽게 아이를 갖고,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언젠가는.

언젠가는.

노래처럼 조곤조곤 나누던 대화가 불현듯 멎었다.

창턱에 도사리고 있던 밤들이 꿈틀거렸다. 기요른과 딜라일라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등줄기가 쭈뼛 섰다.

“……어어.”

밤이 아니었다.

기지개를 켜는 밤의 어깨너머로, 아직 지지 않은 저녁의 노을이 붉게 젖어 들고 있었다. 그 빛마저 피처럼 짙었다.

“아악!”

“뛰어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함을 질렀다. 기요른과 딜라일라는 복도를 질러갔다. 그러나 창문마다 도사린 악령들이 고개를 속속 내밀었다.

도무지 달아날 데가 없었다. 앞과 뒤, 위와 아래가 모조리 악령들로 점령당했다.

놈들은 둘이 함정 가운데로 떨어지기를 기다려 입을 쩍쩍 벌렸다.

“도망가야 해요!”

“어디로 간단 말이에요!”

“어디로든요! 어떻게든 좀 해주세요! 기요른님, 제발 절 좀 살려주세요!”

“난 못 뛰겠어요…….”

기요른이 머리를 흔들었다.

“다리가 너무 아파…….”

“안 돼!”

이제는 슬슬 기요른이 뒤처지기 시작했다. 딜라일라는 기겁하며 그의 손에서 제 손을 잡아빼려 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기요른이 미끼가 되어 악령들을 꾀면 저는 살아날지도 몰랐다.

그러나 기요른에게도 일말의 아귀힘은 남아 있었다. 그는 또다시 저를 버리고 달아나려는 딜라일라의 손을 놓지 않았다.

“딜라일라. 날 사랑한다면서요. 어차피 우리는 여길 벗어나지 못해요. 나갈 수 있었다면 진작에 나갔겠죠. 그냥 우리 함께 있어요. 같이 있으면 어디서든 외롭지 않을 거예요.”

“싫어, 무슨 미친 소리야! 난 살고 싶어! 아악!”

악령들이 허공을 가르며 쇄도해 날아왔다. 어떤 놈이 기요른의 발목을 물어뜯었다.

그대로 자빠지는 기요른을 따라 딜라일라도 바닥에 나뒹굴었다. 손을 휘저으며 악령들을 쫓아내려 했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놔, 놔!”

딜라일라는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악령에게 물어뜯기면서도 기요른은 집요하게 그녀를 놓지 않았다.

보다 체격이 큰 기요른이 먼저 악령들의 시선을 끌긴 했어도 그들은 또 다른 먹잇감 하나가 바로 옆에 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딜라일라는 꿈틀거리는 손을 물어뜯고 악착같이 저를 붙들고 늘어지는 기요른을 걷어찼다.

죽음의 안개가 자욱하게 덮여왔다. 점차 자취를 감추어가는 일몰의 색채가 눈을 따갑게 찔러왔다.

*  *  *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으셨어요?”

새틴은 비탈리스와 나란히 벽에 바짝 등을 붙이고 섰다.

“저도 드, 들었습니다.”

귀곡성에 가까운 울음이었다. 키리온과 악령으로도 모자라 웬 귀신 소리까지 들려오니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오한이 시퍼런 손길로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사, 사, 사람이겠습니까?”

누군가 크게 다쳐서 울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가장 컸다.

“글쎄, 잠시만요.”

새틴은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며 주위를 둘러보려 했다. 기함한 비탈리스가 만류했다.

“제, 제, 제가 보겠습니다.”

임산부에게 자꾸 험한 광경을 보게 할 순 없었다. 그는 아예 숨을 참고서 울음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목을 길게 빼 기웃거렸다.

“살려줘요…… 살려줘요…… 살려줘요…….”

공포에 얼어붙은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흩어졌다.

사람이 분명했다. 다소 안도하면서 시각을 돋운 비탈리스는 먼 건너편의 복도를 비틀비틀 걸어가는 인영을 발견했다.

뜨문뜨문 새어드는 달빛이 얼굴을 비춘 순간, 비탈리스는 경악을 들이켰다.

지저분하게 엉킨 붉은 머리,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팔다리, 죄 찢겨 본래의 형태 잃어버린 너덜너덜한 슬립.

피투성이가 되어 휘청대며 법황청을 떠돌아다니고 있던 유령은 딜라일라였다.

알아본 게 신기할 정도로 그녀는 완전히 뒤바뀐 모습이었다. 귀신의 형상과도 다름없었다.

지금의 딜라일라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녀가 대극장의 주연 자리를 턱턱 꿰차던 배우라고는 믿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어딜 봐도 악령에게 시달린 꼴인데, 무슨 방법으로 악령에게서 도망쳐 나왔는지, 또 무슨 일을 겪었기에 실성한 사람처럼 반쯤 혼이 나가 헤매고 있는지도 통 모를 일이었다.

“새, 새틴님……. 눈, 눈 감고 계세요.”

“……딜라일라죠?”

새틴도 딜라일라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연기하고 표현하는 배우로서 평생을 살았기에 감정이 극단적으로 실리는 딜라일라의 절규는, 그렇기에 크게 울려 퍼지지 않아도 유독 처절한 느낌이 뚜렷했다.

메아리가 딜라일라의 발치를 따라갔다.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야…….”

흐느낌이 끈적하게 맴돌았다. 딜라일라의 눈에 띄지 않으려 숨죽이고 있던 두 사람은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조용히 돌아섰다.

새틴과 비탈리스는 시간을 헤아리지 않았다. 그 대신 남은 체력을, 가야 할 길을, 안전을 헤아렸다.

도망치지 못하고 몰려 있다가 죽은 사람들도 여럿 보았다.

그런 장소가 나타나면 비탈리스는 좀 돌아가는 길을 택해서라도 새틴이 끔찍한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되게끔 애를 썼다.

새틴을 무력으로 지킬 능력이 없다고 했어도, 할 수 있는 한에서 그녀를 최대한으로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이 느껴져 새틴은 비탈리스에게 고마웠다.

“……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요.”

중앙 홀로 내려가는 계단 근처에서 새틴은 흠칫, 귀를 곤두세웠다.

“시, 신성 기사단이 드, 들어온 걸까요?”

비탈리스의 얼굴에 반짝 화색이 돌았다. 새틴은 치맛자락을 걷어 움켜쥐었다. 걸음을 서두르려면 옷이 가벼워야 했다.

까드득, 쇠붙이끼리 긁히는 마찰음이 뾰족했다. 공기가 짜르르 떨리는 뜻했다.

부랴부랴 다리를 재촉해 층계참에 당도하고서야 새틴과 비탈리스는 기사단이라면 쇳소리가 들릴 까닭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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