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기나긴 복도를 내달려 루블리에는 법황청 중앙의 홀까지 도달했다.
좌우로 높은 계단이 있고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매달린 이 아름답고 넓은 중앙홀은 법황청의 얼굴로 통하는 장소였다.
법황청의 어지간한 방들이 돌고 돌아 이 홀과 연결되기 때문에 성직을 가진 자들이 가장 자주 지나가게 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내 목소리 들려? 새…….”
“그렇게 쩌렁쩌렁하게 새틴을 부르고 다니니 시끄러워서 참을 수가 있나. 자넬 찾아내기는 굉장히 쉬운 일이었군.”
루블리에는 그대로 멈춰 섰다. 끈적하게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키리온이 몸을 일으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루브. 자넬 기다렸어.”
기다렸다고 말하는 얼굴에, 묘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키리온의 발아래 고인 그늘의 표면이 울렁거렸다. 꼭 검은 개와 같은, 혹은 뱀과 같은 것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보다 집요하고 뱀보다 악독하다. 그림자는 충성스럽게 키리온의 곁에 머물며 호시탐탐 머리를 쳐들었다.
생명을 물어뜯는 놈들이 키리온은 물어뜯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키리온의 상태를 짐작할 만했다.
루블리에는 검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키리온 역시 검을 세워 루블리에를 겨눴다.
그는 손에 든 검 외에도 허리춤에 검을 한 자루 더 매고 있었다.
루블리에는 흘끗 그 검으로부터 시선을 흘렸다. 검집은 처음 보는 형태였으나, 검의 손잡이는 눈에 익었다.
그는 나직이 물었다.
“새틴은 어디 있나?”
키리온은 루블리에의 용건을 듣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을 활짝 펼치더니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자네가 가지고 있을 마지막 조각이 필요해.”
마귀.
루블리에는 옆머리 어귀를 어릿하게 찌르고 들어오는 새틴의 음성을 되새겼다.
‘마귀를 물리친 검이라고 추앙받았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 마귀와 가장 가까운 검 아닌가요?’
“키리온.”
그는 천천히 오랜 친구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키리온이 태연자약하게 반응했다.
“왜, 루브.”
루블리에는 굳게 맞물린 입가를 비스듬히 틀어 올렸다.
“왜 네가 대답하지? 네놈 이름이 아닐 텐데?”
키리온의 얼굴을 하고, 키리온의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지만 그는 지금 온전한 키리온이 아닐 터였다.
루블리에는 눈앞에 존재하는 남자의 안을 가늠해보려 했다.
마귀가 그의 정신을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 건가.
키리온은 평범한 양심과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짓들을 해왔다. 그를 점거한 마귀의 영향이었다.
하나 어느 정도 판단력을 갖춰 행동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직 완벽히 잡아먹히지도 않은 듯했다.
루블리에는 남은 이성을 끌어모았다.
“나는 네가 끌고 간 새틴이 필요한데, 그녀를 어디다 가뒀지?”
예감이 영 좋지 않았다. 키리온은 성물의 마지막 조각이 루블리에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새틴이 나서서 제 입으로 밝히지는 않았을 테니, 분명 키리온이 새틴에게 압박을 가했을 것이다.
“글쎄. 과연 지금까지 살아 있을까 모르겠군.”
마귀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루블리에는 검을 들었다. 어디선가 질척이는 살기가 느껴졌다. 그는 표정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악령들이었다. 꿈틀꿈틀 몰려온 놈들이 음산한 자작나무 숲처럼 몸을 길게 늘였다. 그들이 달고 온 피 냄새가 후드득 쏟아졌다.
하나 둘, 고개를 치켜들면서 악령들이 적대감을 표출했다. 이내 그림자들이 일시에 날아들었다.
* * *
기요른은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텅 빈 복도를 달렸다. 어디로 가는 길인지는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저 악령들을 피해 몸을 숨길 수만 있다면 당장은 그것으로 족했다.
셀 위오 가문은 가문의 휘장을 앞세워 법황청으로 처음 밀고 들어온 가문이었다.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뒤에서 무작정 밀고 들어오려는 사람들 때문에 얼떨결에 확확 떠밀리다 보니 법황청에 갇혔고, 악령들을 피해 무작정 뛰고 난 후엔 그대로 갈 곳을 잃어버렸다.
기억을 더듬어 나가는 길을 되짚어보려고도 했지만,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악령들 때문에 더 깊은 안쪽으로 도망쳐 들어가게 되기 일쑤였다.
언제부턴가는 가족들과도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 기요른은 혼자 남은 상태였다.
다리에서 지끈거리는 열기가 올라왔다. 딜라일라로 인해 근육과 피부가 크게 상했던 다리는 의사로부터 평생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를 받았었다.
일상에서 적당히 걷고 뛰는 수준으로는 문제가 없었으나, 이렇게 쉼 없이 쓰면 피로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는 다리에 새겨진 상처가 욱신거려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기요른은 다리를 주무르고, 바지 밑단을 찢어 종아리를 세게 동여맸다.
튼튼한 천이 열에 들뜬 근육을 지탱하면서, 순간의 각성으로 다시 다리가 가볍게 움직이긴 했으나 오래 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순 없다. 악령들은 눈에 띄면 어디까지라도 따라와서 사람을 해쳤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었다. 여태까지 숨고 쫓기면서 느낀바, 이 법황청 안에 안전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막 발을 떼려던 찰나였다.
“……기요른님!”
누군가 근처의 어두컴컴한 방에서 뛰쳐나와 기요른을 붙잡았다. 얼마나 소스라쳤는지 기요른은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누…… 딜라일라?”
“다행이에요. 누구라도 좋으니 아는 사람이 지나갔으면 했는데, 정말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서……. 이게 무슨 일이에요?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딜라일라의 몰골도 기요른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걷고 뛰는 데에 방해가 되는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벗어버리고, 맨발에 한 겹의 얇은 슬립 차림으로 숨어 있었다.
추위와 두려움으로 움츠러든 맨 등과 어깨가 안쓰러웠다. 그녀는 기요른을 생명줄처럼 두 손으로 붙들었다. 열 손가락의 마디가 허옇게 도드라졌다.
딜라일라를 확 뿌리치려다 말고 기요른은 자신도 모르게 주저했다.
머리가 외치고 있었다.
너무도 미운 여자였다.
너무도 나쁜 여자였다.
그렇지만 딜라일라였다.
제게 한 짓을 잊지 않았는데, 곱씹고 또 곱씹으면서 살았는데, 그녀 때문에 입은 흉터가 낫지 않았는데도 기요른은 차마 딜라일라를 떨쳐내지 못했다.
“……왜 당신이 여기, 어떻게…….”
기요른은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손을 뺐다.
“당신은 새로 사랑하는 사람한테로 떠났잖아요. 왜 나타나서 날 불러세운 거죠? 여긴 법황청이고 나보다는 그 남자가 더 당신을 잘 보호해 줄 텐데.”
“……아녜요, 아니에요, 기요른님.”
눈을 크게 홉뜬 딜라일라가 그렁그렁 습기 어린 울음으로 기요른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 그 사람 이상해요. 아주 이상했어요…….”
“뭐가 이상하단 거죠?”
“주변이 시끄러워지기에 그를 찾아가려고 했더니……, 시종들 몇 명이 그 사람 근처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손짓 한 번에 어디서 검은 그림자가, 그게 설마 악령인가요? 갑자기 시종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지는 거예요.”
평범한 사람의 능력이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몰라도 무언가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겠다.
딜라일라는 키리온을 예하라 부르지 않았다. 사람이 아닌 것 같았던 까닭이다.
본능이 위험을 경고했다. 그녀는 키리온을 불러세우거나 시종들의 상태를 살펴보는 대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숨어서 돌아가는 정황을 살펴보니, 그건 아주 잘한 판단이었다.
기요른은 한동안 말을 잊었다.
악령을 불러들인 사람이 키리온 대주교라고?
“……그 장면을 본 사람은 당신이잖아요. 당신이 더 잘 알겠죠.”
“몰라요. 저는 몰라요. 하나도 모르겠어요.”
항변하다 말고 딜라일라는 새틴이 남긴 오묘한 뉘앙스를 되새겼다.
‘내 눈에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것 같은데, 당신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나요?’
혹시 그 여자는 뭔가를 알았던 걸까? 알았다면 말을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딜라일라는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얼얼하게 피 맛이 어렸다. 법황청을 나가려고 몇 번이고 시도했으나, 문마다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비명을 피해 이리 숨고 저리 숨다 보니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아득하기만 했다.
악령이라니.
기요른을 버리고 키리온을 따랐다. 그가 명예와 지위, 권력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저와 같은 사람. 몸과 정신과 마음을 가진 생명체.
사람이 아닌 키리온은 상상한 적이 없었다.
이백 년 전의 고리타분한 전설은 그저 전설이라고만 믿었다. 보통 그렇지 않은가. 전설에는 종종 상상력이 덧붙어 과장되게 마련이다.
더구나 밥 벌어먹으며 앞길 치우기도 바빠 죽겠는 현실에 누가 전설을 오래 기억하고 단속한단 말인가.
옛 시대와 지금의 시대는 시간이 흐른 만큼 완전히 다른 세상 아니었던가.
그런데 케케묵었다 믿은 과거가 현실에 도래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짬은커녕, 살기 위해선 일단 몸부터 사리고 봐야 했다.
모두가 어영부영 넋을 놓은 사이에 죽거나 크게 다쳤다. 죽은 사람들 대다수는 뭔지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이 와중에 기요른과 재회한 것이 다행일지 불행일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혼자 있기보다는 누구라도 같이 있는 편이 의지가 됐다.
딜라일라는 기요른의 팔을 꽉 붙들며 속삭였다.
“같이 있어요, 우리.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 거예요.”
기요른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딜라일라는 입에는 달고 몸에는 쓴 여자였다. 몇 번이나 당했으면서도, 마음이 기억하는 달콤함이 입안에 맴돌았다.
더구나 기요른도 혼자 있기는 내심 두려웠다. 의견을 나누고, 함께 탈출구를 찾을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키리온을 따라 법황청에서 지낸 딜라일라는 저보다 나을 테다. 그는 끝내 딜라일라를 밀어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