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12)

<102화>

그녀는 다시금 비탈리스에게 확인했다.

“아, 아아, 참.”

비탈리스가 주머니에서 둘둘 말린 천을 꺼내 새틴에게 건넸다.

“경이 이, 이걸 새틴님께 드,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펼쳐보지 않고도 새틴은 비탈리스를 거쳐 돌아온 이 물건이 무엇인지 직감했다. 성물이었다.

분명 루블리에에게 맡겼는데 이게 왜 비탈리스의 수중으로 돌아와 전달된 걸까.

루블리에가 비탈리스에게 넘겼다면 둘은 어느 시점까지는 함께 있었다는 뜻이었다. 같이 있었다가 모종의 이유로 헤어졌다.

“루브도 여기 있지 않나요?”

새틴이 재우쳐 물었다.

“그 사람, 어디 있어요?”

그제야 비탈리스가 미안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저, 저도 모릅니다. 겨, 경은 저를 두고 먼저 들어갔습니다. 저는 뒤, 뒤, 뒤에 남아 있다가 늦게…….”

루블리에가 먼저 들어왔음에도 새틴을 찾아낸 사람은 비탈리스였다. 순간 새틴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루블리에를 찾아야겠어요.”

저도 어떻게 끌려 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교묘하게 숨겨진 밀실이었으니, 루블리에가 법황청을 뒤진다고 한들 이 장소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먼저 루블리에를 찾을 수밖에.

이유도 몰랐다. 그저 자연스럽게 그와 만나야 한다는 방향으로 사고가 흘렀다. 당연하게 느껴졌다.

루블리에가 눈앞에 보이면 화를 내야지. 약속을 해 놓고 정작 비탈리스보다 늦게 나타나는 게 말이나 되냐고. 왜 꼭 이쪽에서 먼저 찾아오게 만드는 거냐고. 성물을 직접 돌려줘야지 남의 손을 통해 돌려주면 어떡하냐고.

“아, 아, 안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비탈리스가 그녀를 제지하고 나섰다.

“겨, 경은 새틴님을 자, 잘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잘 부탁한다고?

새틴은 잠깐 주춤거리다가 반문했다.

“그가요? 저를요?”

매우 드문 경우였다. 루블리에는 웬만해선 새틴의 안전을 남의 손에 맡기려 하지 않았다.

법황청에서 언제 새틴을 연행하러 나타날지 모르자 그는 늘 새틴의 침실 앞에 보초 서기를 자청했다.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따라다녔다. 잠깐의 외출에도, 아니, 집 안에서조차 그는 새틴의 곁에 있었다.

루블리에가 새틴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던 일은 저번이 처음이었다.

비탈리스를 구하러 떠나기 직전, 정말 어찌할 수 없이 장기로 자리를 비워야 했던 그 날에.

그런데 키리온의 정체를 의심하게 되고 악령이 날아든 이 시점에서 다른 사람에게 또 저를 부탁했다고? 지척까지 돌아와서?

……왜?

새틴은 괜한 찜찜함을 억지로 밀어냈다. 지나친 우려일 것이다.

그냥 그때그때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부탁의 말을 남기는 정도야, 얼마든지 있는 흔한 마음 씀씀이 아닌가.

사소한 데에 의미 부여하지 말자. 새틴은 얼른 생각을 추슬렀다.

“괜찮아요. 어차피 악령들은 저한테 해를 끼치지 못해요. 아이가 지켜주니까요. 여기서 저는 누구보다도 안전해요. 루블리에가 어디 있는지 돌아봐야겠어요.”

아이는 새틴의 몸을 성역으로 만들어 주었다. 악령들은 감히 새틴에게 침범하지 못한다.

위해를 끼치려던 놈들도 유례없는 수준의 가호에 겁을 먹었다. 호시탐탐 머물며 틈을 노리기는커녕 거꾸로 내뺐다.

“……죄, 죄송하지만 경은 새, 새, 새틴님께서 여기 계시길 바, 바라지 않을 겁니다.”

난처한 기색으로 새틴의 눈치를 살피던 비탈리스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악령…… 들만 있다면 어, 얼마든지 안전하시겠지만.”

그는 한참을 우물거렸다.

“어딘가에 혀, 혀, 형님도 있습니다…….”

마귀에 씐 키리온 앞에서 비탈리스는 소심하고 무능력한 동생일 뿐이고, 새틴은 쇠약한 임산부에 불과했다.

그가 나타나 새틴에게 검이라도 휘두르면 어찌한단 말인가. 두 사람이 가진 거라곤 고작 몇 뼘만치 복도를 밝혀줄 하나의 짧은 촛대가 전부였다.

뚱뚱하게 살이 찐 비탈리스와 아이가 있어 체력이 저하된 새틴은 키리온을 맞닥뜨려도 전속력으로 뛰어 달아날 수가 없었다.

비탈리스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솔직하게 밝혔다.

“저는…… 저는, 제힘으론 사, 사실 새틴님을 모, 못 지킵니다.”

키리온이 새틴을 해치려고 하면 그에게는 저항할 능력이 전무했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자 하는 심정으로 법황청에 들어왔지만, 사실 그의 어설픈 궁리 속에 새틴에 대한 호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를 구할 사람은 당연히 루블리에가 될 줄 알았다.

얼떨결에 감금당한 새틴을 구해내고서 비탈리스는 그녀를 잘 부탁한다는 루블리에의 부탁을 떠올리고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다.

평생 어디에 나서본 적이 없고 이번에도 루블리에에게 지켜지기만 했었을 뿐 스스로의 힘으로 누구를 보호해 본 경험이 없는 비탈리스는 새틴, 그것도 아이를 가진 임산부를 위해 자신이 무얼 할 수 있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길 안내로 내, 내보내 드리는 정도가 저, 저, 전붑니다.”

그러니 일단은 새틴을 법황청 바깥으로 내보내는 게 급선무였다.

키리온에게서 멀어지기만 하면 새틴은 안전해진다. 비탈리스도 루블리에의 부탁을 지켰으니 면이 선다.

비탈리스가 재촉했다.

“어서 가, 가, 가…… 가십시다.”

새틴은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로는 비탈리스의 결정을 십분 이해했다.

법황청을 돌아다니다가 루블리에를 만나면 좋겠지만, 키리온을 만나면 재앙이 될 터였다.

성물의 행방을 가지고 오래 공방을 펼친 데다가 악령들에게 해를 입지도 않았으니 이번에야말로 키리온은 새틴을 살려 보내지 않으려 할 테다.

한데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땅바닥이 자꾸만 발목을 잡아당기는 듯했다.

새틴은 무의식중에 몇 번이나 주변을 돌아보았다. 루블리에는 살금살금 움직일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근처에 있다면 기척이 분명 들려올 것이다.

잔뜩 긴장한 비탈리스는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땀을 주룩주룩 쏟았다.

법황청으로 되돌아온 용기가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만큼 비탈리스는 떨고 있었다. 도리어 비탈리스보다 새틴이 담대했다.

두려운 와중에도 비탈리스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느라 허옇게 질려 더듬더듬 앞서 걸었다.

보다 못한 새틴은 그를 붙잡고 촛대를 건네받았다. 

“예하께서는 제 뒤에서 길을 알려주세요. 만약 악령이 나타나면 제가 가로막아야 예하께서도 안전하시니까요.”

“하, 하지만…….”

“쉿.”

꺾어지는 복도를 기웃하다가 새틴은 다급히 비탈리스를 돌아보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가느다란 핏물이 저편에서부터 흘러나와 있었다.

악령이 지나간 길이다. 숨으려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을 사냥하는 악령의 자취가 어느덧 여기까지 파고들었다.

새틴은 곧 마주해야 할, 어둠에 감춰져 있을 참혹한 장면을 각오하고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  *  *

곁문을 통해 법황청으로 몰래 들어왔다가 안전한 구역을 찾아 깊숙이 내달렸던 비탈리스와 달리, 루블리에는 말을 타고 정문으로 뛰어 들어와 법황청을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뒤지고 있었다.

“새틴!”

시체를 물어뜯던 악령이 시커먼 고개를 들었다. 루블리에는 곧장 검을 뽑아 악령의 대가리를 단숨에 베었다.

검에 맞아 넘어가면서 악령의 연기 같은 몸뚱이가 길게 늘어났다. 루블리에는 말을 몰아 널브러진 시체와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껑충 건너뛰면서 새틴을 불렀다.

“새틴, 어디 있어!”

누군가 지금의 루블리에를 본다면 이 참상 속에서도 어찌 그리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냐고 놀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수천 가지의 공포가 밀려드는 바람에 루블리에는 아예 표정을 잃어버렸다. 지금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여길 뒤지고 있는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법황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악령들이 왜 이렇게 법황청에서 날뛰고 있으며, 이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들어왔는가에 대한 의문은 잠시 제쳐 두었다.

루블리에의 눈은 오로지 은빛을 찾아 움직였다. 엉겨 붙어 쓰러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약간의 반짝임만 느껴져도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는 일일이 얼굴을 들여다보고 새틴이 아님을 확인한 후에 안심하기를 반복했다.

달려드는 악령들은 보지도 않고 후려쳤다. 검으로 밀어내고 내달리며 닫힌 문들을 걷어차 열었다.

잠겨 있으면 부쉈다. 법황청의 사용인들도 다들 달아났거나 악령들에게 쫓기고 있는지, 루블리에를 제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혹여 사용인들이 법황청에 남아 있다 한들, 감히 누가 검을 든 루블리에의 앞을 가로막겠는가.

“사, 살려, 살려…….”

피에 젖은 복도 구석구석에서 신음이 흘렀다.

루블리에는 그늘에 도사리고 있다가 말의 다리를 잡아채려는 악령을 검 끝으로 콱 눌러 제압하곤 복도의 벽에 걸린 촛대 하나를 뽑아 불을 붙였다.

키아아악! 악령의 단말마와 함께 화르륵 타오른 불이 짙은 그을음을 남기고 사그라졌다.

사방팔방에서 먹잇감을 노리고 있던 악령들이 루블리에의 서슴없는 대처에 놀랐는지 고개를 움츠렸다.

루블리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이깟 놈들 수십 수백이 몰려오든, 또는 악령들이 꿈틀거리는 그 한가운데 떨어지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새틴은 아니었다. 악령들이 떼를 이뤄 몰려다니는 이 법황청 어딘가에 새틴이 있다고 상상하면, 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녀는 아주 용감한 사람이다. 수도에서 악령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도 새틴이었고, 사람들을 내보내 루블리에를 불러오라 지시한 후 침실에서 악령과 혼자 대치한 사람도 새틴이었다.

새틴의 용기가 아니었다면 피해는 고작 침실이 불타오른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테다.

새틴은 늘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이다.

마냥 구석에 숨어 떨면서 울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지금도 이 어딘가에서 살아나갈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슴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녀를 믿으면서도, 새틴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자체로 숨골이 조여왔다.

새틴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에 있었으면 했다. 평온하고 평안하게 지냈으면 했다.

그는 늘 그녀의 평화를 제 손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새틴, 새틴……!”

메아리가 끝없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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