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112)

<101화>

“팔라딘의 명령이다. 다들 도시를 비우고 나가라!”

“팔라딘의 명령이다. 다들 도시를 비우고 나가라!”

기사단이 시가지를 돌며 고함을 질렀다. 그제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 방향을 바꾸어 달려갔다.

수도에서의 대피령은 루블리에의 지시였다.

악령이 한 점으로 모이고 있는 만큼 사람들을 빨리 내보내야 한다는 루블리에의 판단에 따라, 부관은 급히 일부 기사들을 모아 명령을 하달했다.

처음에는 열댓 명으로 시작된 인원이었으나 동료들을 알아본 기사들이 속속 합류하면서 나중에는 원래의 반수에 가깝게 불어났다.

기사단이 도시를 돌며 사람들을 독려하자, 우왕좌왕하던 사람들도 서서히 갈피를 잡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법황청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수도에서 멀어지려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주인님, 마님, 신성 기사단에서 빨리 수도를 비우고 나가라 합니다.”

“너희들 중 나가고 싶은 사람들은 먼저 나가도 좋다. 우리는 새틴의 행방이 드러나면 그때 대피할 테니까.”

짐을 챙겨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로 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델 마레 저택은 홀로 적요했다.

새틴 때문에 키리온을 불신하고 있었던 새틴의 부모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법황청으로 피신하는 대신 집에 남아 상황을 주시하는 쪽을 선택했다.

팔라딘인 아들이 새틴의 편을 들면서 입지가 애매모호해진 카 딜론 가문도 사용인들을 단속하고 저택에 틀어박혔다.

그래서 법황청으로 제일 먼저 밀고 들어갔던 다른 파수꾼 가문들과 달리 델 마레와 카 딜론은 악령으로 인한 피해를 가장 적게 본 가문이 되었다.

* * *

밀실의 위치가 복잡하다고는 하나 그건 건물을 통해 들어왔을 때의 이야기다.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창문이 뚫려 있는 꼭대기 층의 공간은 어디보다 침입하기 쉬울 것이다.

“밖에 누구 없어요?”

손등이 욱신거리도록 문을 두드리다가 새틴은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털썩 주저앉았다가는 아이가 자칫 충격을 받기라도 할까 봐 몸가짐을 조심하게 됐다.

무언가 기미가 괴이쩍다 싶더니만 끝내 변괴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수십 마리,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가장 먼저 이 밀실로 들이닥치지 않을까, 싶었으나 뜻밖에도 악령들의 진입은 꽤 늦어졌다.

하늘에 그림자가 드리우자마자 법황청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악령들의 시선을 먼저 끈 까닭이었다.

놈들은 본능에 따라 더욱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사냥했다. 비명과 경악성이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저 악령들 중 몇 마리는 다시 새틴을 기억해낼 테다.

놈들이 창문을 열고 들이닥치기 전에 이 방을 나가야 하는데,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문을 두드려도 나타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인적이 아주 드물긴 했어도 사람이 전혀 없는 건물은 아니었는데……. 다들 위험을 느끼고 달아나버린 모양이다. 

창문의 잠금쇠를 걸긴 했으나 워낙 낡아빠져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새틴은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촛불을 손에 꽉 쥐고 가슴을 가다듬었다.

짙어지는 악령들의 자취를 본 순간 새틴은 불을 기억해냈다. 놈들은 불을 싫어했다.

다만 침대 외의 세간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밀실이라, 기름을 쓰는 램프는 없고 동강 난 초 몇 조각이 전부였다.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딘가 싶으면서도 이것밖에 없는 게 한심스러웠다.

도무지 달아날 데가 없었다. 창문이야 열리긴 했어도, 뛰어내리면 다리가 무사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가 무사하지 않으리란 걱정이 컸다. 홑몸이었다면 다리라도 희생해서 나가야겠다고 작정했을지 모르나 아이가 위험해지는 선택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이내 창문이 덜컹거렸다. 새틴은 억울해졌다. 사람은 뛰어내릴 수가 없는데, 허공을 넘나드는 악령에게는 높이 따윈 별문제가 아니었다.

복도로만 나가도 미궁이나 다름없으니 시간을 끌 수 있을 텐데, 키리온은 사슬을 둘러 입구를 단단히 막아 놓았다.

“들어오지 마, 들어오지 마…….”

촛불을 움켜쥔 새틴이 창가를 노려보았다.

“들어오기만 해 봐. 불 질러 버릴 거야.”

야무지게 을러댔지만 본디 악령은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악령과 맞닥뜨린 경험이 있는 새틴은 놈의 패턴을 얼마간 기억하고 있었다.

악령은 상당한 물리력을 행사한다. 저렇게 창문을 흔들어대며 날치는 꼴을 보아하니 조만간 창문을 열고 들어오든가, 창문 틈새에 드리운 그림자를 타고 들어오든가 할 듯싶었다.

정말 아무도 없는 걸까.

그래도 그땐 라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저 혼자 헤쳐나가야 했다. 문득문득 라리의 빈자리를 실감하는 순간이 이렇게 나타난다. 외롭고 무서웠다. 그립고 애달팠다.

그리고 또 그리운 사람은…….

“살아남자. 살아남고 생각해.”

살아남아야 라리를 애도할 수 있다.

살아남아야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다.

살아남아야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살아남아야 그를…….

억지로 상념을 밀어 지우며 새틴은 창가를 예의주시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돌아온다고 약속하고 떠났으니 돌아올 테지.

루블리에.

새틴은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만약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떤 말이 첫마디로 튀어 나갈지 모르겠다.

제 마음이 하도 번잡해서 아무것도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이게!”

악령은 창문 너머에 숨은 새틴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창문을 밀고 당기며 농락하는 꼴이 분명 그러했다.

쿵. 두드리는 기척이 분명 처음에는 한 마리였다.

쿠웅.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부족하다 여겼는지 기척이 거세졌다.

쿵.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쿠웅.

손으로 잡고 버텨봐야 하나? 아니면 최대한 악령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 나은가?

누군가 답을 알려준다면 그대로 할 것이다. 혹은 고민할 시간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나 놈들은 새틴에게 아무런 여유도 주지 않았다.

쿵.

놈들이 전력으로 바람을 몰아온 창이 크게 출렁였다. 낡은 잠금쇠가 튕겨 나가며 비린 공기가 틈새로 훅 끼쳐 들었다.

세찬 바람은 아니었어도 촛불을 끄기에는 충분했다. 빛이 사그라드는 찰나 새틴은 비명을 질렀다.

“악!”

거뭇한 안개가 어지러이 날았다.

그녀는 무심코 팔을 휘저어 악령을 후려쳤다. 큰일 났구나 하는 후회는 그 이후였다.

사람의 살과 피는 악령의 먹잇감이었다. 심지어 불빛까지 잃었으니 아예 잡아먹으라고 악령의 입에 들이민 꼴이었다.

놈들을 헤집는 기분 나쁜 촉각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게 전부였다.

끝이었다.

걱정했던 사태는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새틴을 뜯어먹으려 달려들었던 악령들은, 그녀에게 닿자마자 그들이 천적으로 여기는 불에 데기라도 한 양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고 사방팔방으로 달아났다.

오히려 새틴을 공포스럽게 여기는 듯도 했다. 놈들은 창문을 통해 꼬리를 말고 빠져나갔다.

새틴은 넋을 잃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기세등등하게 나타났던 놈들이다.

한데 악령들이 공격하지 못한 이유가 뭐지?

“그림자…… 그늘이…….”

아.

돌연 눈가가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그래, 아이였다. 아이가 새틴을 지켜주고 있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는 악령 따위가 스며들 악의의 그림자가 없으니까. 아이가 있는 한 놈들은 새틴을 결코 침범하지 못할 터였다.

지금 새틴은 누구보다도 안전했다. 아이 덕분이었다.

이제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가장 든든한 보호자가 배 속에 있는데, 무엇인들 겁낼 필요가 있을까.

새틴은 창문을 얼른 다시 닫고 틈새에 펜을 끼워 넣었다.

“거, 거, 거기 누, 누구 계십니까?”

이때였다.

조금 전 새틴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는지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새틴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더듬거리기는 해도 격식을 잘 갖춘 말투. 아는 사람이었다.

“……비탈리스 예하?”

비탈리스가 분명했다.

상대도 밀실에 갇혀 있는 여자가 누구일지 순식간에 추론해 낸 모양이었다.

“새, 새틴님?”

“예하, 밖에 계신가요? 무사하세요?”

“기, 기다리십시오. 여, 열어드리겠습니다.”

새틴이 다급하게 물었다.

“여실 수가 있어요?”

“예, 예. 사, 사슬만 묶여 있습니다.”

손잡이를 옭아맨 쇠사슬 푸는 소음이 요란하게 문을 두들겼다.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복잡하게 얽힌 듯했다. 그러나 이 방에서 나가게만 된다면 몇 분이든 몇십 분이든 새틴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잠시 후 쇠사슬이 절그럭대며 떨어졌다. 새틴은 얼른 문을 열었다. 복도에서 하나 챙겼는지, 촛대를 든 비탈리스가 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전혀 예상도 못 한 사람이 나타나 새틴을 구해주었다.

“예하께서 어떻게 여기 계세요?”

“제, 제가 마냥 다, 달아나기만 하면 안 될 것 가, 같아서……. 혀, 형님이……. 근데 드, 들어왔더니 아, 아비규환이라…….”

새틴은 드문드문 끊긴 비탈리스의 언어를 해석했다.

루블리에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 도망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키리온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돌아왔나 보다.

아비규환인 와중에 불을 챙겨 어찌어찌 악령을 피하다 보니 여기까지 도달했을 테고.

혹은 법황청의 내부 지리를 잘 아는 비탈리스라 일부러 혼잡을 피해 사람이 없는 장소로 들어왔다가 새틴을 발견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새틴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비탈리스가 걱정스러운 눈치로 새틴을 바라보았다.

“괘,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루브는요? 같이 오지 않으셨어요?”

“그, 그게…… 이, 이, 일단은 여기서 나, 나가야 합니다. 새, 새틴님은 이, 임신하신 몸으로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셔서…….”

촛대를 든 비탈리스가 새틴에게 손짓했다. 이 미궁 같은 법황청 심부에서 비탈리스가 나타난 건 천운이었다.

키리온을 제외하면 여기서 나고 자란 비탈리스만큼 길을 잘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새틴은 비탈리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뛸 수 없는 대신 두 팔로 배를 감싸곤 다소 빠르게 걸었다.

비탈리스는 구불구불한 복도를 잘도 꺾으며 길을 안내했다. 나름대로 악령이 없을 법한 길을 찾았는지, 둘러 가는 느낌은 있어도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다.

“이, 이쪽이 꽤 조용합니다.”

비탈리스는 몇 걸음 앞서서 걸었다. 임산부인 새틴이 자칫 끔찍한 장면을 보기라도 할까 염려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빼 주변을 살피기도 했다.

하지만 요행을 오래 바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도 법황청에는 악령들에게 쫓기며 미로를 헤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잔뜩 남아 있었다.

그들이 지르는 비명과 울부짖음이 불쑥 귓가를 후려쳤다. 그러면 그 소리를 피해 비탈리스는 방향을 바꿨다.

새틴은 자신이 아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기를 기원했다. 안전한 길을 따라가고 있어도 비명의 잔영은 유령처럼 발끝에 따라붙었다.

역한 냄새가 어디선가 스멀스멀 번져왔다. 새틴은 소매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예하, 루브는 같이 안 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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