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12)

<100화>

앞장선 괴한 하나가 비탈리스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키리온의 하나뿐인 동생을 마주하고서 도망가기는커녕 기사와 수행원들에게 달려들었다.

비탈리스를 노린 습격이었다.

수행원들은 단칼에 절명했다. 속속 숨을 끊는 손속이 끔찍하게 잔인했다.

두 명의 기사가 마차를 앞뒤로 감싸고 분전했으나 머릿수에서 크게 밀렸다.

그래도 전문적인 훈련을 해 온 기사들이라 괴한들도 기사들의 방어를 쉽게 뚫어내진 못했다.

“무, 무, 무엇을 바, 바라는 거요! 다, 다 주겠소! 우, 우리를 노…… 놓아 주시오!”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살려보고자 비탈리스가 애원했다.

“우리는 예하의 목숨을 원하오.”

“내, 내, 모, 목숨을 왜…….”

이해할 수 없었다. 평생 둔하고 답답하다고 무시를 당했을지언정 원한은 사지 않았다. 스스로 수그리고 움츠리며 살았다.

그런데 난생처음 보는 남자들이 왜 대주교의 목숨을 원한단 말인가.

더구나 미리 길을 알고 틀어막은 진형이며, 약한 사람들부터 순식간에 처리하고 기사들과 대치하는 품새가 일찌감치 계획하고 들이닥친 듯했다.

몇 명의 괴한이 상처 입고 쓰러지긴 했으나 아직 멀었다.

“예하, 조심하셔야 합니다!”

기사의 경고가 들렸지만,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비탈리스는 담요를 끌어안고서 마차의 벽에 바짝 등을 대고 옹송그렸다. 마차 밖으로 뛰어나가면 반드시 몇 걸음 이내로 붙잡힐 것이다.

그러나 마차 안에 머무른다 해서 결말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두 명에 불과한 기사들이 버틸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동안 버틴다 해도 그다음은 결국 똑같지 않은가. 그저 죽음이 다소 늦춰질 뿐이다.

“그, 그만! 차, 차라리, 나, 나, 나를…….”

습격을 사주한 사람에게로 데려다주시오. 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마차의 문이 덜컥 부서졌다.

비탈리스는 피투성이가 된 기사가 몸으로 문을 가로막는 광경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기사의 등을 관통한 칼날이 비탈리스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피 냄새가 훅 끼쳐왔다.

갓 생겨난 죽음의 냄새가 섬뜩했다.

기사의 몸이 천천히 나동그라졌다. 비탈리스는 눈을 꽉 감아버렸다.

너무도 억울한 죽음이었으나 어차피 그의 둔탁한 몸으로는 검을 빼 들고 대적하기는커녕 괴한들을 피해 빠르게 달리지도 못했다.

타의에 의해 강요된 죽음을 각오해야 할 순간이 왔다. 비탈리스는 제 숨이 금방 끊어지기를 기원했다.

오래 고통받지 않기를, 누군가 오늘을 알아주기를, 더불어 무고한 죽음을 맞은 이들이 모두 평안하기를.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죽음이 이토록 무감한 것인가 했다.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눈 깜짝할 새에 이미 죽어, 의식만 부유하는 건가 했다.

“예하, 모시러 왔습니다.”

정신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비탈리스는 정말로 자신이 죽어 영혼만 남았다고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비탈리스는 눈을 떴다.

“카, 카, 카 딜론 경?”

“괜찮으십니까?”

“겨, 경이 여, 여기까지 어어어…… 어떻게…….”

바깥을 내다보려다가 비탈리스는 어느새 마차 안에 떨어져 있던, 변복한 괴한의 팔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그러고서 비명이란 그래도 공포나 아픔을 느낄 겨를이 있는 사람이나 지를 수 있다는, 하나도 반갑지 않은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다.

단칼에 죽는 사람들은 단말마 한번 제대로 지르지도 못하고 죽었다. 수행원이든 괴한들이든 매한가지였다.

루블리에는 더없이 효율적인 속도로 괴한들을 정리했다. 비탈리스는 어째서 루블리에가 기사단에 입단하자마자 몇 년 되지도 않아 최연소 팔라딘의 자리를 꿰찼는지, 그 이유를 여실하게 체감했다.

죽음을 불사한 기사들의 저항을 받으며 상당한 기운을 소모한 괴한들은 악에 받쳐 달려온 팔라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루블리에는 착실하게 그들의 숨을 끊었다. 어디서 누가 보내 왔는지 배후를 캐묻지도 않았다.

괴한들이 모조리 죽고 나서야 알았다. 루블리에가 모든 걸 다 알고 왔기에 딱히 물을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새틴이 반드시 예하를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데, 델 마레의 새, 새틴님이요……?”

“네, 지금 가셔야 합니다. 새틴이 위험합니다. 승마는 자신 있으십니까?”

“그, 그럭저럭 하, 합니다.”

루블리에는 살아남은 말들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비탈리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그럭저럭과 루블리에의 그럭저럭 사이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루블리에를 따라 말을 달린 며칠간 비탈리스는 생존의 승마술을 터득했다. 루블리에는 한꺼번에 여러 마리의 말을 몰아 달리다가 비탈리스를 태운 말이 지칠 때쯤 갈아타게끔 했다. 무슨 정신으로 버텼는지도 모르게 버텼다. 이를 가능케 한 사람이 루블리에였다.

그렇게 끌려왔다.

그리고 어둠에 물들어가는 법황청을 목격했다.

루블리에의 안색이 새파랬다. 비탈리스는 루블리에가 누구를 염려하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대주교를 구하고 새틴에게로 돌아간다. 이 목표를 위해 루블리에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불철주야 달려왔다.

“수장님!”

일순 익숙한 고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부관이었다. 루블리에는 곧바로 반응했다.

“새틴은?”

“여기 계셨군요, 큰일입니다. 새틴님께서 법황청으로 끌려가셨습니다. 새틴님이 상황을 수장님께 전달하라고 지시하시며 저를 보내셨습니다.”

루블리에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마치 사형 선고를 들은 사람 같았다.

비탈리스는 입을 우물거렸다. 새틴이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고 싶었지만, 루블리에가 듣고 싶은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닐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더불어 미안했다. 죄책감이 목을 졸라, 질식할 듯했다.

“제, 제가 마음을 조, 좀 구, 굳건하게 먹었더라면 무, 무언가 달라졌겠습니까……?”

그래도 루블리에는 루블리에였다. 그는 삽시간에 충격을 밀어내고 매서운 눈으로 법황청을 노려보았다.

“예하의 탓이 아닙니다. 오늘은 언제고 왔을 날입니다.”

루블리에는 고삐를 움켜쥐었다.

“예하, 법황청에는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겨, 경. 혼자 마, 말입니까?”

“네, 제 임무는 저 악령을 없애고 새틴을 구하는 것이고, 예하의 임무는 살아남으시는 겁니다. 그러니 예하께서는 멀리 떨어져서 정황을 살펴주십시오.”

비탈리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블리에는 어둑한 법황청을 쳐다보다가 품에서 천으로 돌돌 만 물건을 꺼내 비탈리스에게 전했다.

“새틴에게 돌려줘야 하는데, 혹시 모르니 예하께 맡깁니다. 잘 보관해 주십시오.”

비탈리스는 모퉁이를 풀어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모서리가 잘린 쇳조각이 언뜻 반짝였다.

“델 마레의 성물입니다. 새틴은 이 조각이 절대 키리온 예하의 손으로 들어가선 안 된다고 합니다. 저는 필시 키리온 예하를 마주쳐야 할 사람이니 예하께서 가지고 계십시오. 악령을 없애면 제가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제가 오지 않는다면.”

루블리에는 이내 머리를 흔들어 부정적인 가능성을 지웠다. 그러고는 화제를 돌렸다.

“예하. 새틴은 신탁이 옳은 법황을 결정했다고 굳건하게 믿는 사람입니다. 제가 우정으로 눈이 가려졌을 때도, 예하께 같은 권리가 있다 주장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예하께서는 신탁이 정한 법황이십니다. 이를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틴을 잘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루블리에가 고삐를 당겼다. 그는 점점 컴컴하게 젖어가는 땅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 * *

신을 믿는 사람들이 정체 모를 변고를 목도하면 가장 먼저 안전한 곳으로 떠올리는 장소는 당연히 법황청이었다.

악령들이 날아오는 목적지도 법황청이었으나 멀리 떨어져 지켜보면 모를까, 수도의 번잡한 중심지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 심상치 않은 먹구름이 어디로 몰려들고 있는지 제대로 보일 턱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마차를 타거나 말을 탄, 이마저도 어려우면 뛰고 걸어서라도 법황청으로 들어오려는 행렬이 줄을 섰다.

물론 법황청의 문지기들은 사람들의 무법한 입성을 막아섰다. 하나 두려움에 질린 사람들에게 문지기의 호통은 통하지 않았다.

심지어 파수꾼 가문의 휘장을 두른 마차들이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앞장서서 개방을 요구하니 문지기들도 위세 등등한 귀족들을 차마 가로막지 못했다.

파수꾼 가문들을 앞세워 문이 뚫렸다. 몇몇 귀족들만 통과시키고 평범한 사람들은 막아보려던 문지기들의 시도는 무용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귀족의 마차들을 따라 물밀 듯이 법황청으로 밀고 들어왔다. 정문이 열리니 이내 후문과 곁문들도 개방되었다.

그리고 제물을 발견한 악령들은 법황청만 믿고 아무 방비 없이 들어온 사람들을 신나게 물어뜯었다.

한 폭의 지옥도가 가장 신성한 땅인 법황청 내부에서 펼쳐졌다.

모든 그늘이 악령의 서식처였다. 겹겹으로 깔린 그늘이 울렁거리며 솟아올랐다.

마부들은 마차를 버리고 도망쳤다. 악령은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았다.

“악!”

“사, 살려주세요!”

“법황 성하, 법황 성하!”

“여기서 나가! 이 안이 제일 위험해!”

“들어오지 말라고 하잖아, 이 머저리들아!”

날뛰는 악령들에 기함한 사람들이 돌아서 나가려고 해도 앞줄에서 벌어진 사태를 알 리 없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법황청 안으로 들어오려 용을 썼다.

“도대체 법황청이 왜…….”

입구가 막힌 탓에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은 도리어 법황청 내부로 피신할 만한 장소를 찾아 뛰어들었다.

쫓고 쫓기고, 자신이 안전하기 위해 옆 사람의 위험을 외면해야 하는 흉악한 상황에서 간신히 몸을 건사한 사람들은 이제야 신탁의 거짓을 고발했던 새틴의 외로운 싸움을 떠올렸다.

“……맙소사.”

“반역이라더니만, 도대체 어느 쪽이 반역이었던 거야!”

“그 주장이 진짜였어?”

“신성 기사단은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요?”

누군가 법황청이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 대처를 보이지 않는 신성 기사단을 향해 격분했다.

그러나 혼돈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기로는 신성 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기사단을 이끌던 수장이 하루아침에 키리온에게 반기를 들고, 수장의 대리마저 사라진 지금 심각한 내분을 겪었던 신성 기사단은 누구를 따라야 할지 몰라 구심점을 잃은 상태였다.

그때였다.

“신성 기사단이다!”

“어디?”

“저기, 저기를 봐!”

기사단 제복을 갖춰 입은 몇 명의 기사들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고작 열댓 명에 불과한 소수였지만 떼 지은 악령의 습격에 얼이 나가 있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구원의 동아줄로 보일 만한 기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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