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검을 쓸 줄도 모르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 지금, 적지에 들어와 키리온의 수족인 딜라일라에게 마귀를 의심했다가는 키리온에게 직속으로 말이 전해질 테다. 뒷일을 감당하기에는 힘이 모자랐다.
더구나 딜라일라가 정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키리온의 곁에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기에 서로를 끌어당겼고, 마음을 맞추어 이 모든 계략을 획책해 왔을 터였다.
키리온이 마귀라면, 딜라일라는 이미 마귀에게 조력한 여자였다.
키리온의 욕망도 컸지만 딜라일라의 욕망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딜라일라도 키리온을 은근히 부추기고 지지하며 여기까지 왔다.
동류끼리 이상을 감지하지 못하는 건, 어찌 생각하면 당연하다.
그래, 둘 다 정상이 아니야.
“새틴님, 다음에 또 뵐 날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들려오는 암시에 새틴은 딜라일라를 쏘아보았다. 딜라일라는 태연하게 그 시선을 맞받았다.
신전과 귀족들을 장악하고 성물들을 차곡차곡 손에 넣으며 이겼다고 믿고 있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루블리에가 있었다. 비탈리스가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의혹의 불씨들이 있었다.
“누구의 날이 먼저 끝날지는 두고 봐야 아는 문제겠죠.”
새틴은 마지막으로 경고를 남겼다.
“당신은 사람을 괴물로 만들었어요. 반드시 언젠가 그 대가를 단단히 치를 날이 올 거예요.”
* * *
키리온이 새틴에게 호수 바닥까지 긁어서라도 성물을 손에 넣겠다고 을러댔던 날로부터 정확히 이틀 뒤, 호수 바닥에서 건진 온갖 잡동사니들을 실은 마차가 법황청에 도달했다.
키리온은 호수의 면적에 비해 많은 인력을 투입했다. 그들은 휴식 없이 교대하며 종일 호수의 바닥을 퍼 올렸다.
아무것도 손대지 말고 고스란히 실어 보내라는 명령 때문에 물고기의 사체며 쓰레기들까지 마차에 가득 담겨서 왔다.
키리온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용인들은 악취 가득한 쓰레기 더미를 뒤졌다.
물고기의 배를 가르고 뼛조각까지 하나하나 살피며 잡동사니를 분류하던 사용인들은 쓰레기 틈에서 끈으로 돌돌 말려 묶인 상자 하나를 꺼냈다.
델 마레 가의 문양이 표면에 새겨진 상자였다.
키리온은 물에 젖고 냄새 밴 상자를 지저분한 줄도 모르고 덥석 쥐고서 득달같이 새틴을 찾아갔다.
키리온이 들이닥치자마자 밀려오는 물비린내에 새틴은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우욱.”
가뜩이나 후각이 열 배는 민감해진 판국에 비린내처럼 비위를 건드리는 악취는 더욱 역하게 느껴졌다.
새틴은 창문을 활짝 열고 서늘한 공기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도 속이 울렁거렸다.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지 않으려 호흡을 밭게 해도 효과는 별로 없었다.
키리온은 새틴의 헛구역질을 전혀 개의치 않고, 의기양양하게 상자를 내놓았다.
“내가 이겼소.”
새틴은 물끄러미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요?”
“행운은 나의 편이었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새틴이 숨을 참으며 고요하게 되받았다. 키리온은 가문의 성물을 앞에 두고도 별로 흔들리지 않는 새틴을 가느다랗게 좁아진 눈초리로 훑었다.
핏기없이 허여멀건 얼굴은 도리어 키리온을 비웃는 듯도 했다.
설마.
혹시.
그는 질척질척한 끈을 툭툭 끊어냈다. 툭, 상자가 흔들린 순간 키리온은 뚜껑을 열어보지도 않고 새틴을 향해 집어 던졌다. 상자는 새틴을 스치고 날아가 창문 바깥으로 떨어졌다.
빈 상자였다.
“어디까지 나를 농락할 작정이지?”
“진작에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제 말을 믿지 않은 사람은 예하셨고요.”
“어디 두었소? 목숨이 아깝다면 이제는 그 입으로 밝혀야 할 거요.”
“정말로 없어요. 제힘만으로는 성물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니, 주인 될 권리를 잃은 저로선 성물을 안전하게 놓아주는 수밖에요.”
“성물을 안전하게 놓아주었다고……?”
새틴의 말을 되짚던 키리온의 눈에 분노가 서서히 서렸다.
“……루브에게 넘겼군.”
새틴은 오연하게 입가를 다듬었다. 루블리에가 비탈리스를 구하러 떠나던 그때, 새틴은 호수에 잠겨 있던 성물의 위치를 그에게 귀띔했다.
루블리에는 이 나라에서 가장 확실하게 성물을 보호해줄 사람이었다. 그가 못 지켜낸다면 누구도 성물을 지킬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루블리에는 조각배 아래에 매달아 놓은 상자를 꺼내 성물을 챙기고, 상자는 끈으로 돌돌 말아 호수에 버렸다.
키리온은 안광을 돋웠다.
“그래봤자 당신 뜻대로 되진 않을 거요. 성좌는 어차피 내 손에 있소. 비탈리스는 이리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그럴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새틴은 덤덤하게 덧붙였다.
“비탈리스 예하께서는 돌아오실 거예요. 자신이 신탁의 진짜 주인임을 이제는 알고 계실 테니까요.”
“하지만 그는.”
반박이 멎었다.
일순 키리온의 홍채에 기묘한 빛이 스쳤다.
“……아하. 이마저도 예상했었군. 어쩐지 루브가 지금까지 안 나타날 리가 없는데. 너무도 조용하다 싶었어.”
새틴은 대답하지 않았다. 새틴의 무언에서 키리온은 정답을 읽었다.
그가 유지하고 있던 평온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새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오르내렸다.
“감히 당신이…….”
잇새로 흐르는 음성에 광기가 맺혀 있었다.
“감히 나에게……”
섬뜩했다. 새틴은 뒤꿈치를 밀어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몇 번이나…….”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았다. 키리온의 말투가 원래 이러했던가? 목소리는?
속으로는 새틴을 해치려 했을지언정 겉으로는 대주교로서의 격식을 잊지 않았던 키리온이었다. 한데 지금 그는 어떠한 선을 놓아버린 사람 같았다.
새틴은 벽에 등을 꽉 붙이고 섰다.
분노로 잠식된 숨소리가 거칠게 쏟아졌다. 그의 내부에서 무언가 변하고 있었다. 키리온을 둘러싸고 있던 기류가 아까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예하?”
새틴은 조심스럽게 키리온을 불러보았다. 하나 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걷잡을 수 없는 노기를 실어 창밖의 어느 한 지점을 아득히 주시하고 있던 키리온은, 번뜩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새틴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렇다면 나는 손님맞이를 준비해야겠군. 그간의 정을 보아, 유언으로 편지 한 장을 남길 시간은 주겠소. 물론 녀석들이 당신의 편지까지 뜯어먹을지 어떨지는 내가 모르는 일이고.”
어쩐지 느낌이 음산했다. 아니다. 확실하게 불길했다.
쿵. 문을 걸어 잠그는 쇠사슬의 날카로운 소음을 들으며 새틴은 키리온의 시선을 따라 창문 바깥을 바라보다가 아연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저 멀리서부터 검은 그림자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 * *
“겨, 경. 저, 저기를 보십시오!”
비탈리스가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비탈리스가 경고하기 전부터 루블리에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 그 장면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무수한 수의 악령들이 꼬리를 물며 날아갔다. 일부는 하늘을 가로질렀고 일부는 땅을 기었다. 그 수가 너무 많아 언뜻 밤이 온 줄 착각했을 정도였다. 더구나 놈들은 전부 한 방향을 지목하고 있었다.
법황청.
루블리에는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름을 힘겹게 눌러 삼켰다.
새틴, 무사해야 해.
“더 서둘러야겠습니다.”
루블리에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체력이 굳건하기로 유명한 흑마마저도 이젠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루블리에는 이를 악물고 견뎠다.
하물며 루블리에와 흑마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 말을 몇 마리나 갈아타면서 밤낮으로 달려온 비탈리스는 반쯤 초주검이 되어 말에 간신히 매달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탈리스는 안 된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았다.
그는 벌써 한번 루블리에의 손에 구원을 받았다. 함께 수도로 돌아오는 내내 루블리에가 품은 초조함과 두려움을 목격했다. 여기서 짐이 될 순 없었다.
비탈리스는 기적처럼 루블리에가 그의 앞에 나타났던 순간을 돌이켰다.
키리온에게 정말 동생을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비탈리스의 안전을 책임질 기사들이라도 제대로 딸려 보냈을 터였다.
하지만 키리온은 비탈리스에게 고작 두 명의 기사만 붙여주었다.
그래도 비탈리스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수도의 어지러움을 바로잡을 인력이 모자라서 신성 기사단을 내어줄 수 없다는 키리온의 말을 믿었다. 믿고 싶기도 했다.
별일이야 있겠나. 스스로 선택한 유배의 길이다. 뿌리를 나눈 형제 사이에 지나친 불안을 가질 까닭이 없을 것이다.
비탈리스는 단출한 수행단과 함께 이동하면서 여유롭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여행은 제법 수월했다. 낮에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저녁이 되면 근처의 사제관을 찾아 머물렀다.
사제들은 대주교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얼떨떨해하면서도 나름대로 성의를 다해 환영했다.
비탈리스는 조금씩 이 한적하고 고요한 여행길에 적응해 갔다.
습격은 백주 대낮에 벌어졌다.
일정한 속도로 달리던 마차가 삐거덕, 멎었다. 아무 예고도 없었다. 처음에는 인적이 드문 길에 숨어 여행자의 지갑을 노리는 도적 떼인가 하였다.
“누구냐!”
“비켜라! 이 마차에는 비탈리스 대주교께서…….”
마부의 뒷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들은 비탈리스의 신분을 들었으면서도 일행을 둥그렇게 둘러쌌다.
수행단의 태반은 검을 쓸 줄 모르는 이들이었다. 반면 정체를 숨긴 놈들은 하나같이 날붙이를 지니고 있었다.
“예하, 달아나십시오!”
두 기사가 검을 뽑아 들고 대치하며 외쳤다. 하지만 대체 어디로 달아난단 말인가.
비탈리스는 창문을 열고 괴한들에게 요청했다.
“가, 가지고 있는 걸 다, 다, 다 줄 테니, 그저 해만 끼, 끼치지 마, 말아 주시오!”
“대주교께서 계시는 게 확실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