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12)

<98화>

철컥. 바깥에서 사슬을 꽝꽝 두르고 열쇠를 잠그는 기척이 울렸다. 새틴은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나 문손잡이를 잡았다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어 그냥 놓았다.

“……괜찮아.”

키리온이 들이닥쳤다가 떠나면 새틴은 항상 가만히 침대에 누워 심호흡을 했다.

의사는 임신을 진단하면서 마음을 복잡하게 갖지 말라고 조언했다.

“걱정할 거 없어. 괜찮아. 너도 괜찮지?”

배가 조금도 나오지 않은 초기라 아랫배를 쓰다듬는 손길이 아직 다소 엉성했다.

“……그러게. 가만 생각하니 나 혼자가 아니잖아. 나는, 음, 아, 날 뭐라고 불러야 하지? 엄마?”

엄마. 새틴은 아주 어린 시절에나 격식 없이 불러보았던 호칭을 되뇌었다.

델 마레의 후계니 어쩌니,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그런 엄중한 지위를 지우고 있었어도 그녀는 아이의 ‘엄마’였다. 어머니 이전의 엄마.

엄마라는 단어에는 심중을 건드리는 아련함이 있었다. 엄마. 새삼스러운 책임감이 가슴을 쳤다.

“본의는 아니지만 같이 갇혔어. 미안해서 어쩌지.”

새틴은 아이에게 사과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요즘이 몸과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지녀야 하는 시기라는데 어쩌다 보니 아이와 함께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오고 있었다.

아이에게 말을 건다 생각하니 말씨도 달라졌다. 제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싶어 새틴은 내심 신기했다.

“네…… 어…… 아빠가 아주 튼튼하고 건강한 사람이라서 진짜 다행이야. 이 나라에서 아마도 제일 강건한 사람이지 않을까?”

아이가 이렇게 빨리 생길 줄 몰랐었다.

워낙 자손이 귀한 집안이라 부모가 되기까지 몇 년은 걸릴 거라 예상했었다.

그 때문에 입덧을 하면서도 입덧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토록 불리하고 불편한 환경에서 아이가 별 탈 없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데에는 아무래도 루블리에의 영향이 클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하면 다 들리나?”

모르겠다. 혼잣말 같기도 하고 대화 같기도 했다. 그래도 외롭지는 않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가 있었고, 하필 이럴 때 혼자가 아니어서 미안했고, 혼자가 아니기에 버텨야 했다.

“건강, 루브가 매우 중요한 걸 물려줬네. 나도 최선을 다할게.”

엄마라는 이름도 어색한데 이혼까지 한 마당에 아빠라는 단어는 더더욱 입에 붙지 않았다.

어쨌든 아이가 최고로 훌륭한 자산을 루블리에에게서 받았으니 고마운 일이다.

“그는 지금쯤 비탈리스 예하를 구해서 돌아오고 있겠지.”

그래도 아이의 절반이 루블리에로부터 와서 그런가, 자연스럽게 루블리에가 떠올랐다.

새틴은 왠지 억울해졌다. 루블리에는 새틴이 그를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으리라 믿고 있겠지만, 사실은 전혀 반대였다.

제 몸에 아이를 품고 있는 이상 아이는 내내 루블리에와의 매개체가 될 수밖에 없다.

새틴의 사고는 결국 루블리에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에게 아무리 선을 긋고 멀어지려 발버둥을 쳐도, 끝내 멀어지지 못하고 빙글빙글 맴을 도는 제 의식을 발견하곤 했다. 불가항력이었다.

덜컹.

돌연 문이 열렸다.

새틴은 생각을 멈추고 불청객을 돌아보았다.

“안에서 말소리가 들리기에 누가 같이 있나 해서 깜짝 놀랐네요. 잘 지내고 계시나 궁금해서 와 봤어요.”

딜라일라였다. 간단하게 차린 음식을 가지고 찾아온 프리마 돈나는 그녀 특유의 춤추는 듯한 걸음으로 밀실 안까지 들어왔다.

무대에 오르지 않은 시일이 꽤 흘렀는데도 동작에서는 여전히 배우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어머나, 그러고 보니 임신하셨다죠? 축하를 잊고 있었네요. 예하의 몫까지 제가 인사를 드려야겠어요. 예하께서 대우를 조금 섭섭하게 하시더라도 새틴님께서 이해하세요. 예하께서는 요즘 마음이 조금 급하시답니다.”

딜라일라는 새틴의 적대감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저러나 벌써 임신이라니, 델 마레 가문에는 자식이 귀하다는 말들도 이젠 옛말인가 봐요. 부럽네요. 저도 아이를 갖고 싶은데 배우 생활을 오래 한 탓에 이런저런 약을 먹어온 게 많아서 쉽지가 않을 거래요. 가능하면 내년까지는 생겼으면 하는데 말이에요. 사람 인생은 한 해 한 해가 어찌 될지 모르니까 저한테도 애가 빨리 들어서는 게 이득이거든요. 이럴 줄 알았으면 피임약도 좀 적게 먹는 건데, 그렇죠?”

사람 인생은 한 해 한 해가 어찌 될지 모른다는 대목에서 딜라일라는 새틴을 빤히 쳐다보았다.

기요른의 도움을 받고 새틴을 처음 만났던 날, 대단한 가문에서 오셨다며 새틴을 추켜세우던 프리마 돈나는 이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화사한 웃음을 보이는 중이었다.

새틴은 냉담하게 받아넘겼다.

“그렇군요. 당신이 내 몸에 손을 대는 날이 올 거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세요. 저도 어쩔 수 없었답니다. 새틴님께서 협조를 안 해주시는걸요. 참, 식사하셔요. 오랜만에 솜씨를 좀 부려봤어요. 아이를 생각해서 잘 쉬고 잘 드셔야죠.”

“필요 없어요.”

새틴의 임신을 부러워하는 뉘앙스도 그렇고, 대놓고 언급하는 약의 존재도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대충 가져다주는 끼니보다야 훨씬 신경을 쓴 차림새였으나 새틴은 딜라일라가 만든 음식을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딜라일라는 새틴의 의심을 눈치챘다.

“새틴님 음식에 약을 타진 않았어요. 뭐 믿지 못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제가 새틴님께 약을 먹여 얻을 이익이 뭐가 있겠나요? 오히려 팔라딘께서 아시면 절 가만두지 않을 텐데요. 아아, 지금은 팔라딘이 아니시죠? 그래도요. 저는 그분 무섭답니다.”

“당신한테도 무서운 사람이 다 있나 보네요.”

“물론이죠. 전 새틴님도 좀 무서운걸요.”

좋은 의미의 무서움이 아닐 터였다. 새틴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피임약은 무슨 뜻이었죠?”

“제가 오래 먹었을 뿐이에요. 후원자도 있었고, 공연 한번 오를 때마다 이런저런 만남이 성사되는데 그때마다 애를 배면 곤란해서요. 그게 이제 와서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지만요.”

딜라일라는 허리를 한껏 죈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옷이었지만, 확실히 아이를 가진 여자는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새틴은 임신 사실을 안 이래로 품이 넓어 편안한 옷만 골라 입었다.

“아이를 가진다 해도 정부는 정식으로 인정받는 신분이 아닐 텐데요?”

“물론이죠. 하지만 언젠가 정부는 내칠 수 있어도 피가 섞인 아이는 외면하기 힘들잖아요? 아버지가 법황 성하라면 아이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에요. 어쨌든 평생 아무 고생 없이 자랄 텐데, 최소한 작위 하나쯤은 주시지 않을까요? 예하께서 저와 아이를 잘 대우해 줄 새 혼처를 찾아 주실 수도 있지요.”

대단히 이성적인 계획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고, 아이를 가교 삼아 미래를 도모하려는 냉정한 설계 속에 남녀 간의 애정은 한 톨도 스며 있지 않았다. 생의 모든 페이지가 연기였다.

“당신은 예하를 사랑해서 함께 있는 게 아니군요.”

딜라일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피차 마찬가지인걸요. 그게 뭐 어떤가요.”

“기요른도 사랑한 적이 없었겠죠.”

“어머, 새틴님은 이 와중에도 제 감정을 염려해 주실 여유가 있으시네요. 아니면 세간의 소문대로 기요른님이 첫정이셔서 신경이 쓰이시나요?”

소문을 낸 당사자가 새틴 앞에서 뻔뻔하게 스캔들을 들먹였다. 새틴은 짧게 대꾸했다.

“그 소문이 거짓이란 건 당신이 가장 잘 알겠죠, 딜라일라.”

딜라일라는 무언의 미소로 긍정했다.

제 불행을 구경하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왔을 목적쯤이야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굳이 딜라일라와 대화를 섞고 있었던 데에는, 그녀가 키리온에게서 혹시 기이한 변화를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 때문이었다.

누군가 키리온의 변화를 알아차린다면 그 사람은 키리온과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는 딜라일라일 가능성이 컸기에.

“나는 오래전의 키리온 대주교 예하를 기억해요.”

새틴은 높낮이 없이 차가운 어투로 슬그머니 서두를 열었다.

“눈에 띄는 분이었거든요, 당연하겠지만. 루브와 친해서 종종 같이 다니는 모습이 목격됐는데, 사실 학생들은 예하보다 루브를 더 어려워했죠.”

당시에는 첫인상의 문제가 컸다. 루블리에는 또래들보다 한참 덩치가 큰 데다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가졌다.

그래서 둘이 같이 붙어 있으면 키리온의 서글서글하고 활발한 이미지는 훨씬 친근하게 다가오는 효과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예하께서는 신탁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외려 선대 법황 성하들의 역사에 자부심을 가진 편이었죠. 그런 사람이 어떻게 지금과 같은 사태를 초래했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내 눈에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것 같은데, 당신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나요?”

새틴은 넌지시 딜라일라를 떠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변하는 법이에요. 시골에서 태어난 촌스러운 소녀가 수단과 방법을 가렸다면 과연 대도시의 프리마 돈나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딜라일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새틴님께서는 외동으로 아무 분란 없이 다 만들어진 가문을 편하게 물려받을 후계자로 자라셔서, 예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이해가 잘 안 되시나 봐요.”

“높은 자리일수록 책임과 의무가 따라요. 성좌를 이을 역량이 안 되면 놓아야죠. 작은 그릇에 더 많은 물을 담을 순 없으니까요.”

“그 성좌가 여태껏 누구 덕분에 유지되어 왔는데요? 도맡아 고생을 했으면 마땅히 그에 따른 보답이 있어야지요. 우습잖아요. 희생은 키리온 예하께서 하셨는데 그 보답이 고스란히 비탈리스 예하께 돌아간다는 게요. 그래서 자기 힘으로 쟁취하신다는데 뭐가 나쁜가요?”

“그 결과를 칼데브란카 국민 모두가 대신 짊어지게 되었으니 나쁘죠.”

마귀. 그 남자는 마귀일 수 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단어를 새틴은 꿀꺽 삼켰다.

“결과만 좋으면 다 좋은 거 아닌가요? 제가 결국 오페라 대극장 최고의 프리마 돈나가 되었고, 키리온 예하의 정부가 되었듯이요. 전 새틴님의 말씀은 동의하지 못하겠네요. 자기 자리는 자기가 쟁취하는 거예요.”

“신탁을 조작하고 사람을 죽여가면서 말인가요?”

“물론이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우린 더한 일도 할 수 있어요. 예하께는 그럴 권력이 있답니다.”

그럴 권력이 있더라도, 권력을 사용할 분야를 적절히 판단하는 능력 역시 그 사람의 바탕이다.

하고픈 말은 많았으나 새틴은 도리어 입술을 꽉 닫았다.

홑몸이었다면 키리온이 마귀에 들려가고 있다고 폭로하고 싸웠을 것이다.

제 말에 대한 책임이야 어찌 됐든 홀로 감당하면 되니 상관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배 속의 아이를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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