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딜라일라는 문을 열었다. 바깥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키리온이 딜라일라의 빈손을 둘러보았다. 딜라일라는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없네요.”
“몸에 숨기지는 않았나 보군.”
새틴은 딜라일라가 아무렇게나 묶어 준 허리께의 매듭을 꽉 쥐었다. 딜라일라는 새틴의 몸을 샅샅이 뒤졌다.
끔찍한 경험이었다. 들썩이는 속을 가다듬으며 한참 모멸감을 삭여야 할 정도였다.
“수고했소.”
“별말씀을요.”
딜라일라가 키리온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실로 궁금하군. 성물을 어디에 감췄기에 이리도 감쪽같이 사라졌을까?”
새틴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신탁은 위조해도 성물은 위조하지 못하는 까닭이 있나 보군요.”
“용기가 대단하시오. 신탁 때문에 그 고초를 치르고도 무섭지 않나 보지?”
“지금 무서운 쪽은 예하시겠지요. 신탁을 위조하고도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니 저를 핍박하러 오신 게 아닌가요?”
새틴의 반발에 키리온이 문에 기대어 비뚤게 섰다. 그의 무게로 문이 닫혔다.
웃음기가 사라진 건조한 눈빛으로 키리온은 방안에 갇힌 새틴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우리끼리만 있으니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좀 나누어 봅시다. 당신은 나름대로 자신을 똑똑하다고 여기는 모양이니, 내 궁금증에 답을 줄 수도 있겠군. 어디 한번 말해보시오. 신탁이 어째서 나 대신 비탈리스를 선택했을까? 그 유명한 신탁의 신안도 이백 년쯤 지나면 흐려지나?”
“신탁은 나라를 더 잘 다스릴 사람을 선택하는 법이죠. 예하께서는 스스로 법황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셨나 보죠?”
“물론이오. 내가 비탈리스보다 뭐가 부족해서? 야망? 두뇌? 힘? 경험?”
한마디 한마디 강세를 실은 키리온이 그에 맞추어 새틴에게 뚜벅뚜벅 다가섰다.
“나는 어리석은 신탁을 바로잡았을 뿐이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음성이었다. 바짝 다가온 키리온이 새틴을 노려보았다. 새틴은 피하지 않았다.
“비탈리스 예하께서 선택되신 이유는 간단해요. 그분이 법황이 되어야 하나라도 더 적은 수의 국민이 죽기 때문이겠죠.”
“뭐?”
“예하께서 법황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의도로 지금까지 희생시킨 사람들을 보세요. 그 희생은 앞으로도 이어질 거예요.”
새틴이 알고 있는 사람들로만 이미 사제와 라리가 죽었다. 키리온의 손속이 미쳤는지는 모르나 법황도 죽음을 은폐 당했다.
더불어 키리온은 새틴과 기요른도 죽이려 했다. 누군가 또 의심을 품거나 자신에게 반발하는 사람이 있으면 키리온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새틴이 불신의 불씨를 틔웠으니, 그가 성좌에 오르면 콘첸트 추기경을 비롯한 더 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새틴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야망, 두뇌, 힘, 경험. 물론 이런 방면에선 예하께서 더 뛰어나시겠지만, 다소 부족한 지식과 경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얻으면 되죠. 어차피 파수꾼 가문도, 신성 기사단도, 사제들도 전부 법황을 보좌하기 위해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법황은 그저 결정을 내릴 때 어느 쪽의 희생이 적은지만 고민하면 되죠. 그건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도울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러나 서슴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남을 해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천성에서 온다.
이는 남들로부터 얻을 수 없는 가치였다. 공부로도, 노력으로도 좁히지 못할 간극이었다.
신탁은 두 사람의 천성을 보았으리라. 더 뛰어난 사람을 선택한 게 아니라, 덜 해를 끼칠 사람을 선택한 것이다.
콰르르르. 집을 얼마나 험악스럽게 뒤지고 있는 것인지, 연신 어딘가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리온이 문을 열고 근처에서 대기 중인 기사들을 불렀다.
“이 집을 부숴서라도 성물을 찾아내라. 그리고 너희들은 나와 함께 먼저 법황청으로 돌아간다.”
“예.”
키리온은 새틴을 턱짓했다.
“당신도 나와 같이 가줘야겠소.”
기사들이 양쪽에서 새틴의 팔을 결박했다. 처음부터 달아날 마음은 없었다. 달아날 방법도 없었다. 각오하고 있던 상황이다.
새틴은 법황청으로 다시 끌려갔다.
* * *
새틴은 용기를 다졌다. 감옥에 또 수감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겪어봤으니 참을 수 있었다.
배를 따뜻하게 감싸서 아이를 보호하고, 입덧은 또…….
살아남을 방법을 부지런히 궁리하며 마차에서 끌려 내린 새틴은 키리온이 감옥 대신 다른 방향으로 데려가자 내심 피어오르는 의구심을 애써 감췄다.
“……어디로 가는 거죠?”
“루블리에가 감옥으로 난입하면 난감하거든. 내가 제일 잘 아는 곳에 두어야겠소.”
새틴은 법황청으로 떠밀렸다.
키리온의 의도는 명백했다. 공식 행사에 초청된 귀족들이 법황청에 드나든다 한들 그들에게 허락된 영역은 주로 연회나 집무와 관련된 외실이었다.
어린 시절의 루블리에가 키리온의 초대를 받아 종종 놀러 왔어도 법황청을 구석구석까지 공유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어느 저택이든 생활하는 사람들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는 존재하는 법이다.
미로처럼 얽힌 복도를 지나 내실로 접어드니 사용인들의 수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들은 새틴을 봐도 보지 못한 척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아무래도 법황 일가의 일상생활을 돌보는 사람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스스로 눈과 귀를 틀어막은 듯한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 이유를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키리온은 그녀를 꼭대기 층의 좁은 밀실에 감금했다. 걸쇠가 바깥에 걸려 있어서 새틴은 문도 열지 못했다.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지만, 층이 높고 위치가 깊어 내려다봐도 사람이 없었다.
완벽한 격리였다.
여기서 새틴을 만나러 오는 유일한 사람은 키리온이었다.
그는 뻔질나게 드나들며 성물에 관한 회유와 협박을 번갈아 가했다.
“정말 모르겠단 말이야. 집을 다 뜯어 뒤졌는데 성물이 안 나왔다지?”
그럴 테지. 성물을 못 찾았으니 수시로 와서 들쑤시는 것이다. 새틴은 침대에 누워 묵묵부답을 지켰다.
“이 정도로 엎었는데도 나오지 않는다면 집안에 없는 게 맞을 테지. 집안에 없으면…… 집 바깥에 뒀나?”
키리온은 한마디씩 단서를 던지며 대놓고 새틴의 안색을 관찰했다.
“하긴, 그 집은 들판과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작심하고 숨기려면 숨길 데가 많긴 하겠더군.”
딜라일라같은 연기력을 가진 배우라면 능수능란하게 표정을 조작해 키리온을 헷갈리게 만들겠지만, 아쉽게도 새틴에게는 그런 능력이 부족했다.
그나마 일부러 저를 떠보려는 키리온의 속셈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무표정을 유지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땅에 숨겼소? 혹은 축사에 던졌나?”
새틴은 입술을 단단하게 앙다물었다.
성물은 가장 안전한 곳에 있었다.
눈에 띄지 않고 자취가 남지 않는 곳. 성물이 하나쯤 들어가 있어도 티가 나지 않을 곳. 그곳에 성물이 잠들어 있을 거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곳에.
그런 장소를 찾느라 새틴은 꽤 고심했었다.
성물이 키리온의 수중에 들어가선 안 된다고 마음먹었던 시기는 이혼하고 집을 나오던 날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델 마레만큼은 키리온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겠다고 결심했던, 바로 그날.
‘아가씨, 귀중품들은 직접 챙기겠다고 하셨잖아요. 다 챙기셨어요?’
‘……아직. 짐마차는 먼저 출발시켜.’
‘아가씨는요? 같이 가셔야지요.’
‘난 좀 이따 갈게. 잠깐만 혼자 있고 싶어. 두 시간 뒤에 데리러 와.’
그때 새틴은 라리를 먼저 내보내고서 홀로 신혼집에 남아 있었다. 가장 소중한 성물을 남몰래 품에 품고, 근처를 한 바퀴 돌았다.
물론 땅에 묻는 방편도 고려했었다. 그러나 발끝으로 땅을 쓸어보니 속흙이 붉게 드러나는 바람에 금방 포기했다.
이제 보니 잘한 결정이었다.
키리온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새틴을 관찰했다. 새틴은 그 불편한 간섭을 안중에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땅을 파헤쳤다면 분명 그 흔적은 어딘가 남게 마련이오. 하나 내 생각에 당신은 함부로 증거를 남길 사람은 아니거든.”
신혼집에 살면서 갖게 된 소수의 습관이 있었더랬다.
어디든 시일을 두고 지내다 보면 유독 애착을 갖게 되는 공간이 생기게 마련이다. 새틴도 그랬었다.
습관에 젖은 다리가 익숙하게 움직였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느라 터벅터벅 걷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새틴은 호숫가에 당도해 있었다.
자연은 변하지 않는다. 살짝 바랜 듯한 색은 계절의 영향이 컸다. 봄을 넘어, 화사한 여름이 오면 풍경에는 쨍한 생기가 덧칠되리라.
그때는 아마 이곳에 없겠지만.
새틴은 호수를 응시했다. 모든 정경이 그대로였다. 여전히 목책에 매달려 너울너울 흔들리는 조각배도, 그 조각배에 아무렇게나 놓인 노도, 그 배 위에서 단둘이 보냈던 루블리에와의 기억도.
호수는 고요했다. 바람이 수면을 건드리며 잔잔한 파문을 그렸다. 깊은 물이 이내 파동을 삼켰다.
겨울의 호수는 어둡고 푸르러서, 그 바닥이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우묵하게 고인 심연에 충동이 일었다. 만약 어떤 비밀을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감추고 싶다면…….
키리온의 음성이 회상을 방해했다.
“나는 그 집의 설계도를 비롯해 주변의 지리를 전부 다 파악했소.”
새틴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래서요?”
“집을 뒤지고 땅을 살펴봐도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보이지를 않으니 답은 하나뿐이더군. 호수에 수장시켰소?”
미심결에 흠칫하고야 말았다. 얼른 입매를 가다듬었으나 키리온은 순간적으로 드러난 어색한 기미를 포착했다.
“나를 속일 마음을 품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성물은 매일매일 나를 부르고 있소.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 어서 손에 쥐라고, 그것은 나의 것이라고.”
“없어요.”
“얼굴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는데?”
키리온의 눈썰미가 매서웠다. 새틴은 한쪽 뺨을 이불에 묻었다.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제 눈으로는 알 수가 없으니 차라리 얼굴을 가리는 쪽이 편했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시오.”
“그럴 리가요.”
“성물을 숨기면 그만큼 오래 목숨을 부지한다고 생각해서 입을 다물고 있나 본데, 그만큼 내 인내를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 두시오. 성물만 내 손에 들어오면 당신은 대가를 몇 배로 치르게 될 거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키리온이 입가를 길게 끌었다. 입매는 솟아오르는데 눈은 전혀 웃지 않아, 위아래로 나뉜 간극이 섬뜩했다.
“호수 바닥을 긁어내야겠군. 배를 띄우고 그물망을 내리면 어려운 일도 아니오. 이틀이면 답이 나올 거요.”
새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당신 노력은 가상했다 해 두지.”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