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12)

<96화>

일단 첫마디를 꺼내고서 새틴은 숨을 삼켰다.

지금 그를 태연하게 대하고 있어도, 억지로 거리를 두려 했던 기간이 있었던 탓에 내심 큰 용기가 필요했다.

왜 갑자기 그를 불러세울 마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무엇을 어쩌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루브, 예전처럼 부르기는 아직 쉽지 않았다.

행복했던 기억과 그 행복을 다 잃고 곤두박질쳤던 기억이 공존하기에, 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를 완전한 타인처럼 여기려 했다.

호칭을 바꾸고, 감정을 지우려 노력하고, 그런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에 그가 제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인지를 새삼스레 깨달아 원망스럽고 막막해졌다가도…….

“응, 금방 올게.”

자신을 상처입혀도 된다고, 너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남자가 문득 불쌍해지는 순간이 있다.

마구잡이로 얻어맞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아 하던 남자가, 화를 내고 분에 차올라 소리를 질러도 묵묵하던 남자가, 한번 끊어진 인연은 다시 잇는 게 아니라는 말에는 말없이 울었다.

두려움이 자욱하게 어린 그 표정이 괜히 밟히는 순간이 있었다.

“그래요, 갔다 와요. 그리고…….”

새틴은 발뒤꿈치를 돋웠다. 그에게 할 말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발뒤꿈치를 세우는 정도로는 키가 모자랐다. 그러자 루블리에가 상체를 숙여 새틴의 속삭임을 마저 들었다.

“……알겠어. 새틴, 마지막으로 나한테 약속해 줘. 무사히 여기 있겠다고.”

새틴은 잠깐 망설이다가 도도하게 대답했다.

“빨리 다녀오면 그만큼 내가 무사하겠죠.”

그 톡톡한 말투가 예전을 퍽 닮아 있어서, 루블리에는 약간이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여전히 새틴이 가끔씩 자다가 놀라 깨어나는 것을 안다. 자신이 머무는 장소가 감옥은 아닌지 멍하니 살펴보는 것을 안다. 지난날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일부러 의연한 모습을 보이며 루블리에를 배웅했다.

새틴이 내색하지 않는 한 줌의 따스함이, 루블리에는 너무도 미안하고 너무도 고마웠다.

* * *

“부인…… 저, 새틴님.”

며칠 동안 수도로 이어지는 큰길을 주시하고 있던 부관이 황황히 뛰어 들어왔다.

무심코 새틴을 부인이라고 불렀던 부관은 다급히 호칭을 정정했다.

부관의 표정이 긴장으로 가득했다. 얼굴만 보고도 새틴은 무슨 일인지 알아차렸다.

“법황청에서 사람을 보낸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최대한 부인을 지켜드,”

어차피 조만간 올 날이었다. 새틴은 곧장 부관의 말을 잘랐다.

“아뇨, 지금 당장 여길 떠나서 루블리에를 찾아가세요. 비탈리스 예하의 무사를 확인하고 이곳 소식을 빨리 전달해야 하니까요.”

애초에 부관 한 사람을 키리온과 대적시킬 마음이 없었다. 부관은 신성 기사단과 루블리에의 연결고리였다. 숨겨도 부족할 판에 굳이 발각되어 좋을 까닭이 있을까.

“저는 수장님께 새틴님을 지켜드린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면 루블리에에게 내 소식은 누가 전해주죠? 괜히 싸우려고 들었다가 화를 부채질해서 불똥이 튀기라도 하면요?”

“…….”

“빨리 가요, 어서. 발각되기 전에.”

새틴은 머뭇거리는 부관을 등 떠밀어 내보내고서 숨을 가다듬었다.

그래. 언제고 만나게 될 줄 알았다.

키리온은 딜라일라를 대동하고 직접 새틴을 찾아왔다. 키리온을 따르는 신성 기사단이 집을 둥그렇게 에워쌌다.

그나마 하나 있던 기사마저 새틴이 내보내면서 믿을 구석이 사라진 사용인들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으나, 새틴은 지극히 덤덤했다.

쿵. 힘으로 밀어붙인 문짝이 부서졌다.

키리온은 신발에 묻은 흙을 입구에 툭툭 털어냈다. 집안으로 먼지가 부옇게 날렸다.

사용인들이 아침저녁으로 쓸고 닦은 복도가 엉망이 되었지만, 새틴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창가에 손을 대고 섰다.

“그간 잘 지냈나 보오. 얼굴이 제법 좋아 보이는군.”

키리온이 비식거렸다. 새틴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덕분에요.”

“어머나, 집이 너무나도 예쁘네요. 저는 심심해서 오래는 못 지낼 것 같지만 기분전환으로 가끔씩 머무르기에는 괜찮아 보여요.”

딜라일라가 자연스럽게 새틴의 안락의자를 차지했다. 오랜만에 보는 프리마 돈나는 훨씬 화려하고 활기가 넘쳐 보였다. 제집처럼 몸을 묻고 편안하게 누워 눈초리를 길게 흘리는 자태가 여유로웠다.

키리온이 새틴에게 바짝 다가붙었다. 새틴은 뒷걸음치지 않았다.

“태도를 보아하니 내가 왜 방문했는지 이미 눈치챈 모양이오?”

“왜 모르겠어요. 예하께서는 재판에서까지 제게 힌트를 주셨는데요.”

“그렇다면 피차 시간 낭비할 일 없이 묻지. 어디 두었소?”

“글쎄요.”

이 집안의 누구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고, 표현의 격식 또한 나무랄 데 없었으나 공기의 흐름은 뾰족하고 차가웠다.

키리온이 한쪽 턱을 비틀었다.

“그까짓 검 조각이 뭐라고 이토록 위험한 고집을 피우시오?”

“그까짓 검 조각이 필요해서 오셨잖아요.”

“그까짓 조각, 없어도 내가 즉위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소.”

“그까짓 조각이 바로 교국이 건립된 상징 아닌가요?”

“상징이면 뭐해. 아무 쓸모도 없는 고철 덩어리 아닌가.”

새틴은 허세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 정당성과 상징에 가장 목숨을 거는 이들이 바로 귀족이지요, 예하. 귀족들을 죽게 하는 건 언제나 정당성과 상징이거든요.”

그 정당성과 상징으로 인해 죽을 뻔했던 여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반박이었다. 확실히 무게감이 남달랐다.

키리온이 꿈쩍 않고 압박했다.

“델 마레의 유일한 후계자 아니시오? 가문을 지키셔야지.”

그는 새틴의 약점을 들먹였다. 델 마레. 가슴 한편이 무거워지는 이름이었다. 겁을 주려는 의도가 선명했다.

예전이었다면 키리온의 의도에 꽤 흔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새틴도 스캔들과 감옥, 재판까지 산전수전을 겪었다.

괴로운 시간이었어도 그 시기를 지나왔기에 오늘 키리온을 견뎌낼 수 있었다.

새틴은 기죽지 않고 받아쳤다.

“델 마레는 여기서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먼 훗날의 누군가는 알아줄 거예요. 파수꾼 가문으로서 정당하지 않은 후계자에게서 긍지를 지키려다가 멸문당했다고.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은 언제든 있게 마련이거든요.”

하물며 그 기요른조차 진실을 듣고서는 새틴에게 공유하고자 하지 않았나.

이 시기의 칼데브란카는 분명 혼돈에 휩쓸려 있다. 게다가 파수꾼 가문 중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변화를 겪은 가문은 델 마레 뿐이다.

반드시 훗날의 누군가는 델 마레와 당시 법황의 자리를 두고 논란을 일으킨 키리온을 의심할 터였다.

새틴은 키리온의 흠 하나 없이 화려한 금발을 응시했다. 저 밝고 찬란한 색 안에 마귀가 물들어 있다 상상하니 오싹했다.

마귀를 가장 먼저 추측한 사람이 저 자신이었으나, 편안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키리온을 보고 있자면 정말로 저 사람이 마귀와 연관이 있는 걸까 의문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의문은 잠시였다.

키리온이 데려온 인력의 수가 심상치 않다 했더니, 그는 신혼집을 싹 뒤엎을 작정으로 기사와 법황청의 시종들을 모아왔다.

그들은 이 집의 사용인들을 바깥으로 내몰고 방을 하나하나 뒤졌다. 가구를 들어내고 벽을 뜯는 소란이 요란했다.

그러면서도 키리온은 새틴이 제 시야를 벗어나지 못하게끔 일거수일투족을 제한했다.

“잠시 이야기 좀 하지.”

새틴은 작은 방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이내 키리온의 부름을 받은 딜라일라가 방으로 들어오면서 문을 닫았다. 방에는 신탁의 비밀을 아는 세 사람만 남았다.

“아무래도 성물처럼 중요한 물건을 함부로 뒀을 것 같진 않군. 보통 귀중한 물건은 몸에 지니게 마련 아니겠소?”

키리온의 눈길이 새틴의 몸을 훑었다. 새틴은 그를 쏘아보았다.

“……무슨 의미죠?”

딜라일라가 새틴에게로 다가왔다. 사전에 약속된 일이었는지 딜라일라는 자연스럽게 새틴의 앞섶에 손을 댔다.

“잠시 실례하겠어요, 새틴님.”

딜라일라의 손이 옷 안으로 파고들기 직전, 새틴은 그녀의 손을 강하게 붙잡아 제지했다.

“무슨 짓이야.”

“아아. 예하께서 지켜보고 계시니 좀 부끄러우신가 봐요. 걱정하지 마세요. 예하께서는 여성에게 신사적인 분이시랍니다.”

“자리를 비켜주겠소. 밖에서 기다리지. 협조를 바라오. 내 말뜻을 알아들었을 거요. 당신은 쓸모없는 소동을 피울 만큼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니까 말이오.”

너무 잘 알아들어 문제였다.

몸수색을 하겠다고?

믿을 수 없는 요구에 새틴은 눈을 치떴다.

“손 치워요.”

“내가 직접 당신 몸을 뒤지는 것보다야 딜라일라가 낫지 않겠소?”

키리온이 뻔뻔하게 반문했다.

도움을 청할 만한 사용인들이 죄 쫓겨났을뿐더러, 누군가 있다고 한들 키리온의 수족으로 가득 찬 이 집에서 키리온의 심기를 거스르는 명령을 내릴 방법도 없었다. 라리처럼 헛된 죽음을 맞는 결말만 나올 터였다.

새틴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 몸에 손댄 걸 후회하게 될 거예요.”

“뭐, 얼마든지.”

키리온이 어깨를 으쓱이며 돌아나갔다. 딜라일라의 손이 옷을 여민 끈을 풀어헤쳤다.

새틴은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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