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12)

<95화>

“하지만 키리온은 본래 제 것이었다고 생각했던 자리나 물건에 집착이 심해.”

“그렇게 단순한 이유는 아니라고요.”

루블리에와 새틴이 언쟁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부관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인 양 입장이 어색해졌다.

누구의 편을 들기도 뭣했고, 사이에 끼어들기도 눈치가 보였다.

루블리에와는 친분이 있는 반면, 그 루블리에가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조심조심 대하고 있는 새틴이 한참 어려운 존재였던 까닭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이런저런 의견을 적어 놓느라 펼쳐 두었던 종이를 가지고 외롭게 손장난을 쳤다.

한창 화제가 각 가문의 성물에 이르러 있었기에 칼 모양으로 종이를 접고 배운 대로 싹둑싹둑 조각을 잘랐다. 

그러다 불현듯 묘한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새틴이 부관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종잇조각을 내려놓았다.

“제가 아무 생각 없이…….”

“델 마레의 성물은 그렇게 안 생겼어요.”

새틴이 새치름히 말을 던졌다. 눈길이 마주친 루블리에가 의문을 담아 되물었다.

“응?”

“저번에 말했잖아요. 우리 성물은 귀퉁이가 조금 깎여서 삼각형이 아니라고.”

건국기념일 날, 무안한 분위기를 타파할 겸 성물에 관한 이야기를 열띠게 나눴던 시간이 있었다. 루블리에는 기억을 더듬었다.

‘……검의 이 끄트머리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다섯으로 쪼개진 한 자루의 검을 나눠 가졌을 때, 델 마레는 이 검의 끝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다른 가문들이 가진 조각과 달리 우리 가보는 형태가 온전하지 않아요.’

새틴은 끝을 조그맣게 도려냈다. 다른 사람들은 잊고 있을지라도 델 마레 사람인 저는 잊지 않았다. 검의 뾰족한 끝날은 부러져 있었다.

조각들이 기다랗게 늘어섰다.

부관은 무심코 숫자를 헤아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네?”

“파수꾼 가문은 다섯이야. 자네 숫자를 못 세나?”

“아닙니다. 보세요. 여섯 개가 맞습니다.”

여섯? 여섯이라고?

새틴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여섯일 리가. 지금까지 간직되어 내려온 성물은 다섯뿐이었다. 다섯 가문의 다섯 성물.

그러나 부관을 따라 다시 세어봐도 숫자는 분명 여섯이었다.

다섯 개의 큰 토막과 작은 한 조각.

새틴은 조그맣게 오려낸 조각을 손에 들었다. 여태껏 아무도 의식하지 못한, 아주 작은 조각이 하나 더 있었다.

“……잠시만요. 우리는 뭔가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애초에 다섯 개의 조각이라고 알려졌던 자체가 착각이었던 게 아닐까. 눈에 보이지 않았기에 모두들 다섯이라고 자연스레 믿어 왔던 것이다.

하나 전설에서 잊힌 마지막 조각이 바로 여기 나타났다.

그 조각은 그럼 지금 어디 있지?

‘델 마레는 법황 성하의 검 중, 마귀와 대척해 가장 선두에 섰던 조각을 받았죠. 마귀의 심장을 찌른 그 부분이요.’

맙소사. 어째서 여태껏 떠올리지 못했을까.

검이 어딘가 박혀 부러졌다면, 그 위치는 너무도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검이 마지막으로 꽂힌 그곳은 마귀의 심장이었으니.

“……마귀.”

새틴은 경악을 담아 중얼거렸다.

“왜 그래?”

“검이요. 마귀의 심장을 찌르고 부러졌잖아요. 마귀를 물리친 검이라고 추앙받았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 마귀와 가장 가까운 검 아닌가요?”

그렇다면 성물의 의미가 달라진다. 모두가 검이 마귀를 대적해 나라를 구했다고 여겼으나, 실상 검은 무엇보다도 마귀와 가까이 닿아 있는 셈이었다.

비탈리스는 듣지 못한 검의 부름이 사실은 마귀의 부름이었다면?

그래서 마귀가 키리온의 그림자에 숨어 있다가 그의 마음이 흐트러진 틈을 타 그를 흔들고 있는 거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마귀라고……?”

루블리에가 신음을 삼켰다. 마귀라니, 그건 이백 년 전 사라진 존재가 아니었던가. 하나 악령도 살아 돌아다니는 판에 마귀를 영영 전설로만 치부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라도요. 키리온 예하에게 마귀가 스몄다고 가정하면 신탁이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비탈리스 예하를 지명한 이유가 설명되잖아요.”

“신탁은 바뀌었는데 계시가 바뀌지 않았던 이유도 마찬가지야. 게다가 키리온은 확실히 예전보다 사람이 이상해졌어.”

키리온은 법황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 사람이다. 과거의 노력까지 폄훼해서는 안 된다. 한때 키리온이 기둥이 되어 나라를 지탱해온 건 사실이므로.

그러나 지금은?

과연 그가 칼데브란카를 제대로 다스리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나?

오히려 어느 시점부터 칼데브란카에는 유언비어가 판을 치더니 급속도로 어지러워졌다.

파수꾼 가문들은 꿋꿋하게 지켜오던 기준을 잃었으며, 사람들은 자극적인 이슈에만 관심을 쏟았고,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소규모의 마을에는 때때로 악령들이 난립해 사람들에게 해를 끼쳤다.

아무도 현재의 칼데브란카가 정상이라 말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콘첸트 추기경 같은 사람도 석연찮음을 느끼고 두문불출 중이었다.

이게 누구, 혹은 무엇의 뜻이 작용한 결과겠는가.

“키리온이 마귀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라고…….”

키리온은 본래 자신만만하고, 자존심이 세고, 야심이 드높았다. 뜨겁게 빛이 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은 법이다.

마귀는 그림자에 스며든다. 그 그림자는 지난번에 경험한 악령을 보면 문자 그대로의 그림자이기도 했고, 키리온의 예를 보면 사람의 마음을 비유하는 듯도 했다.

놈은 그의 욕망을 날카롭게 파고들어 충동질했다. 키리온은 마귀의 목소리인지도 모른 채 그 달콤한 유혹 속에 침잠했다.

왜 비탈리스가 차기 법황으로 지목되었는지 이제야 알 듯했다. 마귀에 씌어가고 있는 남자를, 신탁이 선택할 리 만무했으니.

이 순간 한자리에 모인 세 사람의 머리를 동시에 스치고 지나간 것은 이백여 년 전의 전설이었다.

법황청의 핏줄 곁에 한결같이 도사리고 있던 마귀, 마귀가 해치려는 사람, 이득을 좇아 흔들리는 귀족들, 소란스러운 나라.

“빨리 비탈리스 예하를 모셔와야 해요.”

이성을 되찾은 새틴이 루블리에를 채근했다. 때를 가릴 여유가 없었다.

“너는…….”

“그가 마귀라면 난 더 괜찮아요. 그의 목적이 내 수중에 있는 한 난 더더욱 괜찮을 테죠. 게다가 원래 예하는 카 딜론 경의 친구이기도 하잖아요. 친구를 구해야 하지 않겠어요?”

너무도 이성적인 어조라 가슴이 쓰라렸다.

만약 키리온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았고, 그래서 새틴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 없이 오늘이 왔다면 아마 새틴은 지금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믿음과 의지, 당부를 표현했을 것이다.

또다시 마음이 무너졌다.

“어서 가요.”

이번에도 역시 ‘다녀와’ 가 아니었다. 새틴은 더 이상 그에게 다녀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당분간 떨어져 있자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받은 뒤에도 배웅을 나오면서 다녀오라고 인사했던 새틴이, 오늘은 당장 떠나라 말했다. 어서 가라 재촉했다.

서로 돌아올 것을 전제하고 있음에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닌데도 그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 속이 미어졌다.

돌아오지 않았던 그를 되새기고 있는 것만 같아 아플 정도로 아렸다. 그 잘못을 돌이킬 길이 없었다.

즉각 사용인을 부른 새틴이 그의 채비를 도와주라 지시했다. 시간을 아끼려는 목적이 역력했다.

루블리에는 사용인의 도움을 받아 가벼운 짐을 꾸렸다.

그동안 새틴은 부관과 함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고맙게도 부관은 루블리에가 집을 비운 동안 이 집에 남아 새틴을 지켜주겠다고 자청했다.

여행 준비는 금방 끝났다. 사용인들이 주인의 출장에 익숙해, 손이 빠른 탓이었다. 행장 차림을 한 루블리에가 응접실 입구에 섰다.

“새틴.”

부관과 머리를 맞대고서 두런두런 의견을 나누고 있던 새틴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다녀오십시오, 수장님.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부관이 벌떡 일어나 예를 취했다. 루블리에가 팔라딘을 그만두고 나왔어도 부관은 그를 내내 수장님이라 불렀다.

루블리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 새틴에게로 걸어가, 그녀가 반쯤 기대어 앉아 있는 안락의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녀올게.”

“네.”

“돌아올게.”

“……알았어요.”

“너와 떨어져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새틴은 흘끗 루블리에를 바라보았다.

“갈 길이 바쁘니 서둘러요. 카 딜,”

“루브.”

루블리에는 새틴의 말을 끊어냈다.

“카 딜론 경 말고, 아까처럼 다시 한 번만 루브라고 내 이름을 불러줘.”

그의 부탁에 새틴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루블리에는 가만히 미소했다.

그래도 영영 못 들을 줄 알았는데, 한 번은 듣지 않았나. 괜찮다. 어차피 마음은 이곳에 두고 갈 것이다.

“새틴, 너는 내가 아는 가장 용감한 사람이니까 아무 일 없을 거야.”

차마 닿지 못한 손가락이 뺨의 언저리와 입술 근처를 지나 천천히 내려갔다. 엉망으로 무릎만 덮고 있는 담요를 펼쳐 덮어주고, 자세가 불편하지 않게끔 고쳐주었다.

무심코 손등에 은색 머리카락이 스쳤다. 부드러우면서도 서늘한 감촉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불쑥 충동이 일었다. 머리카락 정도라면, 새틴도 용서해주지 않을까. 한동안 못 볼 텐데, 조금만 아주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그는 새틴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쥐고 그 가운데 입술을 묻었다. 새틴이 즐겨 쓰는 비누의 꽃향기가 가득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향으로 감각이 흠뻑 차올랐다.

새틴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싫은 내색도, 좋은 내색도 없으니 욕심이 생겼다. 십 초만 더. 십 초만 더.

하염없이 헤아리다 어느 순간부터는 숫자를 세는 일도 잊었다.

마음속에서 십 초가 하염없이 반복됐다.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발걸음을 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다. 언제까지고 미룰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머리카락을 손에서 놓았다. 파도에 모래알이 쓸려나가듯 새틴의 흔적이 손안에서 사라졌다. 향기라도 쥐고 싶었으나 남은 것이 없었다. 허전했다.

루블리에는 무릎을 세우고 일어섰다. 짐을 든 사용인이 응접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새틴을 돌아보고서, 저벅저벅 걸어 나가던 순간이었다.

“루브.”

새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블리에는 자신도 모르게 새틴에게 달려갔다. 안락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새틴이 예전과 같은 얼굴로 인사했다.

“다녀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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