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12)

<94화>

언제 어디서 손등을 죄 찢겼는지, 루블리에의 손은 덜 아문 상처들로 울긋불긋했다.

하지만 그녀는 금방 시선을 거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새틴은 루블리에를 새초롬히 외면했다. 루블리에는 어느새 새틴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분위기가 있다. 하루아침에 결혼식을 올리고 기사단으로 돌아왔던 루블리에가 한동안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는지 부관은 기억하고 있었다.

자연과 가까이 벗한 집에서 감탄과 부러움을 받으며 동화처럼 살았을 사람들이다. 이들이 잃어버린 평화가, 그는 문뜩 안타까워졌다.

새틴은 침착한 태도로 부관이 가져온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그다지 놀라지도,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다.

“그런가요? 추기경께서…….”

콘첸트 추기경은 재판에서도 나름대로 새틴의 입장을 살펴주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추기경을 비롯해 수도의 분위기가 우호적으로 흐른다는 소식은 분명 기쁜 일이었으나, 새틴은 잠자코 입을 다물고 상념에 잠겼다.

“잘되었습니다. 두 분 재판하시는데 호재로 작용할 테니까 다행입니다.”

“글쎄요.”

부관의 축하에도 새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도의 분위기가 내게 유리하게 흐르면, 키리온 예하께서 그걸 모르실까요?”

“누구보다 제일 먼저 알겠지. 키리온은 눈치가 빠르니까.”

루블리에가 가만히 동조했다. 더구나 루블리에가 새틴을 구해 나오면서 키리온에게서 돌아선 의지를 확실하게 내비치기도 했다.

아들이 강경하게 나오니 카 딜론 가문도 비슷한 입장을 취할 테고, 입지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된 셀 위오를 제외하면 파수꾼 가문도 두 진영으로 갈린 셈이다.

키리온이 그 꼴을 과연 얌전히 두고 보려 할까.

새틴은 의문이었다.

기사단의 분열은 명백히 루블리에의 영향이었다.

부관도 소속은 기사단에 남아 있지만, 일부러 소식을 취합해 루블리에를 만나러 왔다.

새틴은 루블리에가 부하들에게 좋은 수장이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의식했다.

하기야 루블리에는 기사단을 소집하면 맨 앞에서 서서 기사들을 이끄는 사람이었다.

기사단에 입단해 같이 고생하고 같이 부대끼며 지낸 시간이 몇 년인데, 키리온보다는 루블리에를 훨씬 친근하게 여길 터였다.

“그리고 비탈리스 예하께서도…….”

그는 칼데브란카의 평온을 선택했다. 키리온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사라졌다.

많은 부분이 새틴에게 유리하게 돌아섰는데, 기분은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키리온은 비틀어진 흐름을 다시금 제게로 가져가려 할 것이다. 그게 무얼까. 어떤 방법이 있을까.

지금까지 해온 사건들로 미루어 보아 키리온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행하려 할 테다.

“……비탈리스 예하.”

새틴은 숨을 들이켰다.

“루브.”

당혹한 나머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루블리에의 이름을 불렀다.

“응? 왜?”

마찬가지로 이름이 불린 루블리에 또한 얼떨떨했다.

“당장 떠나요.”

“새틴?”

“비탈리스 예하께서 위험해요. 수도의 여론이 묘하게 흐른다면서요. 이미 그쪽은 가진 패를 다 썼는데 분위기를 재판으로 반전시키기에는 힘들잖아요. 이 와중에 그가 성좌에 오를 수밖에 없게끔 사람들을 설득할 흐름이 뭐가 있겠어요?”

선대 법황의 아들은 단둘이다. 여기서 비탈리스가 없어지면 신탁은 내용과 별개로 무용하게 변해 버린다.

성좌에 오를 사람이 키리온 하나밖에 안 남는데 좋든 싫든 새 법황을 인정해야지 어쩌겠는가. 재판은 의의조차 퇴색될 것이다.

“맙소사. 설마 키리온 예하께서 그런 극악무도한 수까지 쓰시겠습니까? 하물며 피를 나눈 형제 사이에 말입니다.”

부관이 경악했다. 하지만 루블리에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냐, 지금이라면 쓸지도 모르지. 그는 성하께서 승하하셨는데도 새틴부터 처형하려고 죽음을 은폐하고 있지 않았나. 키리온은 현재 제정신이 아니야. 이제는 정도를 넘어선 듯해. 뭐든 처음 발을 내딛기가 힘든 법이지. 그 첫발을, 키리온은 한참 전에 뗐어. 그다음은 쉬워.”

심지어 비탈리스는 수도를 벗어났다. 시선을 끌지 않겠다고 단출하게 떠났다니, 여행길에서 기회를 보아 살해하고 사고로 위장하면 그만이었다.

이미 키리온에게는 사제를 같은 방식으로 죽인 전례가 있었다.

새틴은 방안까지 제시했다.

“나단 부관이 말을 끌고 왔잖아요. 그 말을 타고 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예요.”

그가 타는 흑마는 평범한 말들보다 월등한 속도와 지구력을 자랑했다. 다만 이 기동성을 살리려면 루블리에 혼자 다녀와야 했다.

밤낮으로 달려 비탈리스를 따라잡고, 몇 명이 올지 모를 암살자들 상대로 비탈리스를 구해 데려오는 것.

여기까지가 루블리에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모든 부담을 한 사람에게 다 지우는 지시를 듣고서도 루블리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감히 누구의 지시인데 싫다고 할 것인가. 가라고 하면 가고, 하라고 하면 해야지.

그는 저 자신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걱정해야 할 사람은 그녀였다.

“새틴, 너는……?”

다만 그가 떠나면 새틴은 오롯이 혼자가 된다. 새틴이 재차 홀로 남는다는 전제가 오싹하리만치 두려웠다.

“나더러 널 두고 가라고?”

아무리 아이가 건강하다 한들 임신한 몸으로 격렬하게 내달리는 말을 탈 순 없다.

새틴은 여전히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태였다. 두 번의 기적을 바라는 건 욕심이다.

“안 그럼 비탈리스 예하께서 살해당할 거예요.”

“너도 위험해.”

“내 위험은 비교도 안 돼요. 법황이 잘못 서게 생겼다고요.”

즉위 전부터 이 사달이 나는데, 즉위식을 마치고 나면 칼데브란카에 어떤 영향이 생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새틴의 반박에 루블리에의 표정이 흔들렸다. 눈 깊은 곳에 아득한 회한이 서렸다.

“왜 비교가 안 돼? 나는 이 나라와 너 중에선…… 너야. 난 두 번 후회하고 싶지 않아.”

“무슨……. 팔라딘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죠?”

“네가 우선이야. 그래서 기사도 때려치우고 나왔어. 내가 왜 널 선택하면 안 되는데?”

그가 새틴에게서 떨어져 있던 동안 새틴은 옥살이를 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위협이 가해질지 모른다.

새틴은 잠시간 루블리에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이렇게는 못 살아요.”

첫마디는 여상스러운 어조로 흘러나왔다.

“우리 어렸을 때 악령 따위는 알지도 못하고 살았잖아요? 아카데미에서는 파수꾼 가문에서 왔다고 다른 학생들의 부러움을 샀었고요. 그런데 지금은요? 스캔들과 모함에 휘말려 죄인 취급을 받고 법황청에서는 날 눈엣가시처럼 여기죠. 제거하고 싶어 하고요.”

새틴은 객관적으로 자신의 현실을 직시했다. 단기간에 참 많은 부침을 겪었다. 전과 후가 전혀 다른 사람의 인생 같았다.

“그뿐일까요. 다 그만두고 도망친다고 해서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죠. 악령들 때문에 카 딜론 경이야말로 출장을 몇 번씩이나 다녀왔잖아요. 카 딜론 경이 곁을 지켜주는 동안에야 악령으로부터 안전하겠지만요. 평생을 이럴 순 없어요. 그렇다고 나 혼자서 그놈들을 때려잡을 방법도 없고요. 결국 어디든 위험천만하기는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예전처럼 안전한 나라로 되돌려, 동경 받는 귀족으로 살려고요. 태어날 아이에게 델 마레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물려주려면 그래야만 해요.”

그녀가 안전한 곳을 찾아내어 데려다 달라고 요구한다면 루블리에는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법황청에서 저를 해칠 사람들이 이 집에 들이닥치지 못하게 해 달라고 한다면 이 역시도 기꺼이 수행했을 것이다. 혹은 그 이상을 바란다고 해도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새틴은 미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루블리에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새틴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한시라도 빨리 출발해야 비탈리스를 살릴 수 있었다.

하나 새틴과 아이를 키리온의 영향력 아래 두고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숨이 턱 막혔다.

“……그럼 새틴, 하나만 약속해 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최소한 거처를 바꾸고 안전한 데에 숨어 있겠다고. 장소는 내가 마련할 테니까.”

“아뇨. 부모님이 계시는데 내가 어딜 가요.”

새틴이 확고하게 거절했다.

“난 여기 있어야 해요.”

게다가 루블리에가 비탈리스를 데리러 간 동안 그의 부재를 숨기려면 이 집에 남아 시선을 끄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루블리에의 부재를 알아챈 키리온이 새틴을 해치려고 할지도 모른다. 찰나의 상상만으로도 공포가 스몄다.

그러나 새틴은 단언했다.

“어차피 그는 나를 절대 못 해쳐요.”

키리온 측에서 뭐든 손을 쓰려고 시도하긴 할 것이다.

루블리에의 부재는 오래지 않아 발각되게 마련이고, 드러난 빈틈을 마냥 방치하기엔 그쪽도 아쉬울 테니까.

그래도 새틴에게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하나 있었다.

“성물로 자꾸 나를 회유하려 하잖아요. 성물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나뿐이라, 절대 날 어떻게 하지 못할걸요.”

키리온에게는 성물의 의미가 컸다. 그는 재판의 끝까지 성물에 집착했다.

새틴으로선 고마우면서도 의아한 일이었다. 성물이 법황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는 하나, 본디 검의 조각들은 법황청의 소유가 아니라 각 가문의 상징으로 존재해 왔었다.

“그게 기이하긴 해. 키리온은 아직 성물을 각 가문으로 반환하지 않았어.”

하물며 재판에서 쓴 성물을 여전히 손에 쥐고 있다니, 의문이 더 깊어졌다.

“아직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을 텐데요.”

검을 쥐어 후계자를 가리는 방법도 재판에서 썼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검의 부름을 들었다. 이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키리온은 열네 살부터 우연히 카 딜론 가의 성물을 만졌다가 계시를 받았다고 했으니.

성물들은 제 역할을 다 했다. 그럼에도 키리온은 다른 가문들에서 가져온 성물을 돌려주지 않고, 델 마레의 성물마저 받아내려 하고 있다.

왜일까. 선대 법황들 중 이만치 성물에 집착한 사람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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