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12)

<93화>

10. 결혼식장에서 운명을 바꿨다.

“일단 증인은 확보해 놨어. 사제가 살해당한 사실을 증언하고 나에게 인장을 전달해 준 사람이야. 베르비움 사제라 했던가? 그 사람을 찾으려고 네가 보냈던 편지도 보관하고 있더라.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래요.”

미우나 고우나 같은 배를 탄 사이다. 새틴은 루블리에와 마주 앉았다.

국장으로 얻게 된 일주일의 유예는 허약해진 몸을 추스르기엔 턱도 없이 짧았으나 언제 재판이 재개될지 모르니 더 이상 미적거릴 수는 없었다.

어느덧 국장이 끝나고 사흘이 더 지나갔다. 새틴이 루블리에와 한 자리에 머물며 앞으로의 일을 논의한 지도 딱 사흘이 되었다.

만약 그가 사랑과 미련이 남아 이 위험에 뛰어들었다고 한다면 새틴도 루블리에의 동참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겠지만, 루블리에는 파수꾼 가문의 의무라는 표현으로 새틴의 짐을 덜어주었다.

게다가 새틴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던 기요른과 달리 루블리에는 적극적으로 신탁을 파헤치는 작업에 몰두했다.

“새틴, 어디 불편해?”

오래 앉아 있었더니 아랫배가 살짝 욱신욱신한 듯한 기분에 새틴은 무심코 배를 매만졌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교활하다.

감옥에 있을 때는 스트레스로 인해 아프겠거니 했던 모든 증상이 이제는 임신으로 귀결되었다.

어쩌다 손이 약간 저려도, 가슴이 답답해도, 배가 조금 아린 듯 만 듯해도 모조리 임신증상인가 싶었다.

새틴은 얼른 배에서 손을 뗐다.

“아뇨.”

“눕자.”

“괜찮다니까요.”

“그래도 잠깐만 눕자. 너 아직 많이 조심해야 한대.”

“문제가 생긴다면 진작에 생겼을 거예요. 아이는 아주 튼튼하댔…….”

거부는 무의미했다.

불쑥 다가온 팔이 새틴을 눕히고 머리맡에 쿠션을 괴어주었다. 다리를 가지런히 올리고 무릎 아래에도 쿠션을 받친 후 담요를 덮어주는 일련의 행위에서 손에 붙은 티가 났다.

새틴의 의견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는 루블리에였으나 유일하게 단 하나, 새틴의 불편에 대해서는 유독 고집이 셌다.

루블리에는 집안 곳곳에 쿠션과 담요를 잔뜩 갖다두었다. 언제라도 새틴이 편하게 눕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쩌다 보니 간격이 무척 가까워졌다. 제 얼굴 위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익숙한 구도였다. 부부 사이라면 신호가 되었을 것이다. 이곳이 침실이었다면, 혹은 침실이 아니었더라도 예전에는 어쩌다 이만큼 얼굴이 맞닿은 즉시 루블리에가 입을 맞추고 새틴은 그의 목에 팔을 둘러 끌어안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새틴은 쿠션에 깊이 뒷머리를 묻고는 눈을 새침하니 내리떴다. 루블리에도 새틴의 편의를 봐주고는 깔끔하게 손을 거뒀다.

새틴은 담요 아래에서 신중하게 아랫배를 쓸어내렸다. 요즘 들어 비로소 임신이 조금씩 실감 났다.

워낙 아이가 귀하기로 유명했던 집이라, 사실 새틴은 제게 자식이 생기려면 몇 년은 걸릴 거라 생각했다.

후각이 예민해지고 매일같이 구토를 하면서도 감옥이 문제인 줄 알았지 임신은 상상도 못 했었다.

아직 아이라고 할 만한 형상도 아니겠지만, 어쨌든 루블리에의 유전자를 넘겨받은 아이다.

다섯 살부터 칼을 배웠다는 유전자가 어디 보통 유전자인가.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튼튼하다 내세우기도 민망한 몸에 별 탈 없이 자리 잡은 것만 보아도 이 아이는 건강을 남다르게 타고났다.

그러니까 이렇게 안달복달할 까닭이 없는데…….

“……어?”

히히힝! 느닷없이 집 앞에서 말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틴이 화들짝 놀랐다.

루블리에가 대번에 얼굴을 굳혔다. 임산부가 있는 집이라 웬만하면 큰 소리가 나지 않게끔 모두들 조심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뭐죠, 방금?”

“말 울음소리가 익숙한데. 아무래도 내가 아는 손님인 것 같아. 나갔다 올게.”

“손님이라니요? 이렇게 갑자기?”

“걱정하지 마. 좋은 사람이야.”

혹시 재판을 알리러 온 법황청의 사용인이 아닐까, 해서 긴장했던 새틴은 반가운 손님을 단언하고 나가는 루블리에를 보고 안심했다.

* * *

“수장님.”

이럴 줄 알았다. 루블리에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어리둥절한 기미 없이 손님과 마주했다.

부관이 하얀 말 위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그 뒤에 딸려온 흑마가 주인을 알아보고는 머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루블리에는 손을 뻗어 거대한 흑마의 머리와 갈기를 만져주었다. 말이 반가움에 히힝, 소리 내어 울었다.

“귀환 보고 올립니다.”

부관의 경례에 루블리에는 손을 대충 내저었다.

“대상이 잘못되었어. 나는 기사단을 나왔거든.”

“압니다. 동부에 다녀오느라고 소식을 한참 늦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찾아온 것도 맞습니다. 카 딜론 저택 사람들이 수장님은 여기 계시다고 해서 말입니다. 임무 마치고 법황청으로 돌아갔더니만 저더러 임시로 팔라딘의 자리를 맡으라는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부관의 투덜거림에 루블리에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관은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하고 손을 내젓는 루블리에를 다소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기사단에서 공적으로 모실 적에는 엄격하고 매서운 상관이었는데 기사단을 벗어나서 마주하니 훨씬 사람다웠다.

루블리에가 대신전에서 새틴을 데리고 나가면서 보인 행동도 기사단 내에서는 엄청난 화제였다.

키리온의 명령으로 얼떨결에 차출되어 새틴에게 손을 댔다가 얻어맞고 나가떨어진 부하들은 줄곧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그나마 루블리에가 먼저 돌아간 이유를 아는 극소수의 기사들만이 루블리에의 돌발행동에 ‘어쩐지…….’ 하는 반응을 보였다.

“결혼에 이혼에 재혼까지, 수장님께서 유례없는 기록 하나 세우시려나 본데?”

부관도 동의했다. 요즘 칼데브란카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이 와중에 루블리에가 새틴과 재혼한다면 그야말로 일대 파란이 일 것이다.

흑마가 연신 머리를 대고 문질렀다. 부관은 루블리에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흑마를 억울하게 흘겨보았다.

“이 녀석 악명이 높습니다. 이렇게 성질머리 더럽고 괴팍한 녀석을 누가 탈 수 있다고 두고 가셨습니까? 몇몇 기사들이 타보겠다고 시도는 했는데, 죄 등을 흔들어서 낙마시키더랍니다. 저는 그래도 수장님을 모신 부관이랍시고 얼굴을 알아봤는지 네 주인에게로 갈 테냐, 물어봤더니 순하게 굴기에 몰고 왔습니다.”

흑마는 제 주인과 자신이 한동안 지냈던 마구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에게 난폭하게 굴었다는 말은 루블리에가 고삐를 잡고 마구간으로 데려가자 세상 다시없이 양순한 모습으로 따라갔다.

그런 흑마를 어이없이 쳐다보다가 부관은 이내 진중하게 태도를 바꾸어 루블리에에게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

“아십니까? 비탈리스 예하께서 떠나셨습니다. 수도에 남아 계시면 괜한 분열만 초래하는 것 같다면서요.”

루블리에를 대신해 임시 수장으로서 법황청을 드나드는 부관이 전해주는 소식이다. 법황청 내부의 최신 근황이었다.

“그래?”

“기사단 내부도 세 파로 분열했습니다. 저희를 내내 훈련 시킨 수장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과 키리온 예하를 따르는 것이 도리에 맞다는 사람, 그리고 잘 모르겠으니 지켜보겠다는 사람으로 갈렸습니다. 사람들이 의외로 동요가 큽니다. 정확하진 않은데 콘첸트 추기경께서도 키리온 예하에 대한 의심이 있으신가 봅니다. 대신전의 사제들을 불러 만남을 가지시고는 자택에 기거하며 계속 재판 날짜를 미루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국장이 끝나고도 새틴을 소환하는 움직임이 아직 없었던 것이다. 법황청의 신실한 종인 콘첸트 추기경마저 키리온에게 불신을 품었다면 이는 대단히 중요한 변화였다.

바깥에 서서 보고를 듣던 루블리에가 집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들어오지.”

부관이 머뭇거렸다. 

“제가 들어가도 됩니까?”

“지금 이 이야기는 새틴도 같이 들어야 할 것 같군. 단 손님 대접은 크게 기대하지 마. 새틴이 안정을 취해야 하고 이 집엔 사람도 별로 없어서 말이야.”

“아, 부인께서는 건강이 좀 괜찮으십니까?”

부관이 자연스럽게 새틴의 안부를 물었다. 루블리에는 잠시 멈칫했으나 자연스레 정적을 수습했다.

“그렇게 부르면 새틴이 싫어해. 호칭을 주의해.”

“저…… 재혼하실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루블리에는 쓰디쓰게 입매를 끌었다. 재혼은 당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새틴은 이성이 아주 분명했고 감정도 크게 내보이지 않았으나, 여전히 집과 들판을 방황하거나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마다 라리를 찾았다.

라리의 죽음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습관처럼 나오는 모양이었다.

불현듯 익숙한 걸음걸이가 다가왔다. 루블리에는 뒤를 돌아보았다. 새틴이 어느새 나와 문가에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나단이라고 합니다. 신성 기사단에서 수장님을 모시고 있, 아, 모셨습니다.”

부관이 허둥지둥 인사했다. 한미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입단 시험을 거쳐 일찌감치 기사가 되었고, 가족을 제외하고는 동료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상이 태반이었기에 부관에게 있어 사교성이 필요한 만남은 매우 드물었다.

특히나 윗사람을 상대하는 격식이라면 몰라도 새틴처럼 귀족 여성을 대하는 예법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일순 그는 이다음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 잊었다.

“반가워요. 새틴 델 마레예요.”

새틴이 자연스럽게 손등을 내밀었다. 부관의 예법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주는 호의였다.

부관은 얼른 그녀의 손등 위에 짧게 입술을 댔다.

루블리에의 부관으로 오래 근무했지만, 새틴을 직접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본능적으로 새틴을 둘러싼 수많은 이슈들이 꼬리를 물고 흘러갔다.

누군가는 새틴이 남편과 전 약혼자 사이에서 오락가락 줄을 탄 것으로 보아 딜라일라 뺨치게 요사스럽다 했었고, 재판소에 동원되었던 동료들은 불리한 재판에서도 꿋꿋하게 키리온과 대립한 그녀가 나이답지 않게 독하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앳된 외모의 아가씨였다. 악의적인 소문들과 반역 모의라는 인생의 큰 사건을 혼자 감당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자신이 낸 소문도 아니고, 도리어 루블리에에게 소문을 경계하라고 전해 줬었을 뿐인데도 부관은 왠지 미안해졌다.

“들어가자, 새틴. 안 그래도 집으로 초대하려던 참이었어. 너도 같이 들어야 할 소식이라서.”

부관은 생소한 기분으로 새틴을 챙겨 들어가는 루블리에를 쳐다보았다.

새틴을 부르는 호칭을 조심하라고 당부했던 루블리에는 새틴이 혹시라도 어딘가에 스치기라도 할까 봐 그녀의 등 뒤로 팔을 멀리 뻗어 방비했다.

새틴에게 차마 닿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멀어지지도 못하는 묘한 간격이 눈길을 끌었다.

그러다 보니 새틴 대신 손이 여기저기 부딪히는 사람은 루블리에였다.

부관은 루블리에가 잠시 주의를 돌린 사이 그의 손을 흘끗 응시하는 새틴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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