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12)

<92화>

새틴은 손을 들어 쇄골 근처를 더듬거렸다. 목걸이를 잃어버리고 그 허전함은 꽤 오래 갔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당연히 있을 적에는 몰랐는데 사라지고 난 후의 공허함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과거가 두서없이 몰려들면서 세상의 소리들이 잠시 멀어졌다.

새틴이 퍼뜩 의식을 차렸을 땐, 그새 어떤 격론이 오갔는지 루블리에가 화를 내고 있었다.

“……저 역시 파수꾼 가문인 카 딜론 가 사람입니다. 잘못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합니다. 신탁이 위조되었는데, 잘못된 사람이 성좌에 앉는 걸 지켜보기만 할 순 없습니다. 새틴의 전남편이어서가 아니라, 이 가문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너는 키리온 예하와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오지 않았냐? 세월이 아깝지도 않아? 네 앞날이 탄탄대로인데 친우에게 뭐하러 박하게 굴어?”

“키리온이 차기 법황이 될 사람이기에 친구로 지낸 적 없습니다. 친구로 지내자고 다가온 사람이 어쩌다 보니 차기 법황이 될 사람이었던 거지요. 그가 만약 저를 불러 신탁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을 일입니다. 놀라긴 하겠지만 그가 법황이든 아니든 키리온은 키리온인데 자리가 뭘 그리 중요하다고.”

루블리에의 음성이 다소 낮아졌다.

“오히려 저는 신탁을 위조하고 새틴을 죽이려는 그가 낯섭니다.”

“그래도 비탈리스 예하께서 즉위하시면 우리 가문에 하나도 이득이 되지 않아.”

“언제부터 파수꾼들이 이득만 좇았습니까? 이득은 여태껏 충분히 취했으니, 지킬 건 지켜야지요. 다섯이나 되는 명문가가 있어봤자 뭐합니까? 진정 파수꾼 가문답게 신탁을 지키려는 사람이 새틴 하나밖에 없었는데. 신념이 없다면 카 딜론이라는 이름이 무슨 소용입니까.”

자신이 부모님을 설득하느라 했던 이야기를 그가 자신의 부모님께 하고 있었다.

새틴은 부모님의 눈에 저와 루블리에가 비슷한 부류의 사람으로 보였다는 의미를 얼마간 이해했다.

부모님의 모든 생각에 동의할 순 없어도, 더 오랜 인생을 산 만큼 많은 사람들을 보고 겪은 부모님의 안목은 안목이었다.

한동안 격론이 펼쳐지던 응접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새틴은 다시 발을 뗐다. 동시에 다소 가라앉은 음성으로, 루블리에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루브. 네가 새틴에게 돌아간 게 아이 때문이냐? 새틴이 임신했다는 소문은 들었다만…… 너도 세간에 짜하게 퍼졌던 스캔들을 알 거다. 지금도 사람들 하는 이야기가 심상치 않아. 네 아이인 게 확실하냐? 넌 새틴을 믿을 수 있어?”

응접실 부근에 모여 있다가 새틴을 발견한 사용인들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방금 들은 이야기를 되짚느라 새틴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뭐라고?

방금 뭐라고…….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냐, 누구라도 붙잡아 묻고 싶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다리를 억지로 떼어내려던 찰나였다.

“저는 오늘부터 카 딜론 가 사람이 아닙니다.”

분노는 응접실 쪽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새틴은 도로 멍하게 멈춰 섰다. 루블리에의 울분이 폭발해서, 도리어 감정을 느낄 겨를이 사라졌다.

“사람이라면 절대로 해선 안 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제 앞에서 제 아이를 의심하는 사람을 아무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새틴을 믿느냐고요? 누가 감히 새틴에게 믿음을 요구합니까? 도리어 제가 새틴에게 제발 나를 믿어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루브, 그런 뜻이 아니었다.”

“전 아버지 얼굴 다시 보지 않을 겁니다. 새틴에게 부끄러워서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창피한 줄 아십시오. 남들이 전부 이득을 따를 때 혼자 신탁을 따르려는 사람에게 모두가 합심해서 얼마나 더러운 누명을 씌우고 있는지 말입니다.”

루블리에의 어머니도 이번에는 아들의 역성을 들었다.

“어쩜 그런 말을 해요! 델 마레처럼 사정 복잡한 아이, 나도 탐탁지 않지만 의심할 게 따로 있지 그런 황색 선전까지 입에 담으면 우리가 길거리 시정잡배들과 뭐가 달라요? 아이를 가졌을 때의 기억이 얼마나 오래 남는데, 그 애가 알면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나도 아이들을 셋이나 낳아 키워 봤잖아요.”

새틴은 기척을 죽이려던 노력을 그만두었다. 응접실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복도를 지나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새틴!”

문을 열고 나와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새틴은 부모님을 남겨 두고 뛰쳐나온 루블리에에게 붙들렸다.

루블리에가 바로 무릎을 꿇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 다 내 잘못이야.”

새틴은 그를 쏘아보았다.

“누구 애든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내가 키울 건데요. 이 애는 내 성과 내 가문을 물려줄 거고, 이혼했으니 카 딜론 가문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요.”

“……그래, 내가 자격이 없어. 나에게 과분한 사람을 만나서 욕심을 내고,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지르는 바람에…… 네가 나 대신 겪지 말았어야 하는 일들을 겪고 있나 보다. 미안해.”

태산처럼 큰 남자가 파리하게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떨고 있었다. 기요른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았냐는 의심은 새틴이 받고 있는데, 정작 그 말로 크나큰 타격을 입은 사람은 루블리에처럼 보였다. 새틴 앞에서 그는 죄인이기를 자청했다.

새틴은 눈을 내리감았다.

제 속이 뒤죽박죽이라 모든 것이 혼돈이었다.

그를 미워하고 싶은 건가, 이해하고 싶은 건가, 원망하고 싶은 건가.

그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시간의 깊이에 비해 마음의 깊이가 훨씬 빠르게 쌓이는 바람에, 불안감을 교묘하게 자극하는 수작이 들자마자 눈과 귀가 흔들렸다. 결국 그만큼 상처도 크게 입었다.

새틴은 천천히 마음을 다잡았다. 눈을 뜨고 차분하게 물었다.

“그런 소문이 돈다고 왜 말을 안 했죠?”

“그따위 헛소리로 널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어.”

“기사단 그만두고, 가족들하고는 연을 끊겠다 하고. ……나야 언제든 델 마레로 돌아갈 수 있지만, 당신한테는 남은 게 뭐예요? 말했잖아요. 당신에겐 이제 부인도 아이도 없다고. 우린 끝난 사람들이라고요.”

그에게 상처가 될 줄 알면서도 일부러 모질게 말했다. 하지만 루블리에는 되려 희미하게 미소를 보였다.

“알아. 그게 내가 치러야 하는 잘못의 대가라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어. 새틴. 지금 내 소원은 단 하나야.”

루블리에가 느리게 되뇌었다. 어쩐지 고요한 와중에도, 어조가 단단하게 잡혀 있어 그의 소원은 단순한 언어를 떠나 어떠한 의지처럼 느껴졌다.

“너만 살면 돼.”

그의 목소리가 멍울처럼 얼얼하게 맺혀왔다.

“나는 어찌 되든 괜찮아. 너만 살면 돼. 내가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어.”

* * *

일주일에 걸쳐 치러진 법황의 국장을 담당한 사람은 키리온이었다.

그는 정제된 모습으로 나타나 시가지의 행렬을 지휘했고, 시민들의 애도를 들어주었다.

대신전의 성사와 묘지 안장식까지 끝마쳤다. 누가 보아도 차기 법황으로서 취할 법한 완벽한 자세였다.

키리온이 국장 절차를 점검하고 사람들을 불러 이런저런 명령을 내리는 동안 비탈리스는 말없이 형을 따라다녔다.

둘째 아들로서 주어지는 역할이 있긴 했으나 전면에 나선 키리온에 비하면 턱없이 작고 초라해, 그는 국장 내내 눈에 띄지 않았다.

특히 단에 올라 연설을 하거나 사람들을 접대해야 하는 과정에서, 말을 더듬는 비탈리스는 제 약점을 부끄럽게 여겨 뒤로 물러나 있었다.

키리온도 성좌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동생에게 거리를 뚜렷하게 두었으니 두 사람은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대화 한번 나누지 않았다.

그런 비탈리스가 처음으로 키리온을 조용히 찾아온 날은 일주일의 국장이 끝나갈 즈음이었다.

키리온은 법황의 집무실에 잔뜩 밀린 업무를 간략하게 보고 있다가 동생을 맞이했다.

“뭐냐?”

“혀, 형님.”

비탈리스는 법황의 집무실 책상에 자연스레 앉아 있는 키리온을 쭈뼛쭈뼛 바라보았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키리온은 시선을 서류에 두고서 툭 질문을 던졌다.

“비탈리스. 네가 법황의 재목이라고 생각하나?”

비탈리스가 화들짝 기겁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 둔중한 몸이 허공으로 풀썩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예? 아, 아닙니다. 제, 제가 감히 어찌…….”

키리온은 여전한 태도로 여상스럽게 반문했다.

“그런데 왜 널 법황으로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 글쎄, 그것이…….”

불안한 눈으로 키리온의 눈치를 살피던 비탈리스는 용기를 짜내어 입을 열었다.

“그, 그것 때문에 왔습니다. 혀, 형님. 주, 줄곧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구, 국장이 끝나면 저…… 제가 지방으로 떠나겠습니다.”

실로 의외의 제안이었다. 이번에는 키리온도 상당히 놀랐다.

“떠나겠다고?”

“예. 그, 그래야 칼데브란카가 펴, 평화로울 것 같습니다…….”

“지금이 꽤 시끄럽긴 하지.”

“조, 조용히 살겠습니다. 주, 쥐 죽은 듯이.”

찔끔한 비탈리스가 살에 파묻힌 목을 움츠렸다. 키리온과 경쟁할 생각이 없으며 자신은 법황의 재목이 아니고, 키리온이 성좌에 올라 세상이 평화로워질 때까지 지방에 기거하며 조용히 지내겠다.

동생의 반쪽짜리 언어를 해석하며 키리온은 남몰래 입가를 끌어당겼다. 손해 볼 것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해라.”

“다…… 단지 혀, 형님께 청이 하나 이, 있습니다.”

“무슨?”

“시, 신탁이…….”

갑자기 비탈리스가 신탁을 언급했다. 키리온은 매서워진 눈매로 동생을 주시했다.

가뜩이나 재판도 엉망이 되었고 루블리에도 기사단을 박차고 나가버려, 신탁만 떠올리면 그는 속이 울컥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비탈리스는 금방 주눅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비교와 차별을 많이 당한 데다가 약자의 입장에 있었기에 비탈리스는 키리온의 기분을 잘 살피는 편이었다. 키리온의 심기가 상하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조심스럽게 제 소망을 전달했다.

“뭐, 뭔가 오류가 있었나 본데, 아, 안타깝습니다. 시, 실수였을 겁니다. 데, 델 마레에는 후, 후계자도 하나, 하나뿐인데……. 형님께서 마, 마음만 좀 넓게 써주십시오.”

이 일로 크게 다치는 사람이 없이 자신만 얌전히 물러나는 것.

이것이 비탈리스의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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