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12)

<91화>

“카 딜론 경도 최대한 너를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아주 만약에 말이다. 네 재판이니 네게도 결과가 어떻게 될 거란 육감이 있지 않겠니? 상대가 애초에 너무 거물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힘들겠다는 느낌이 들면…… 카 딜론 경과 멀리 도망쳐라. 이쪽으로 돌아오지 말고. 목적지도 우리에게 말할 필요 없어. 몰라야 네가 더 안전할 테니까.”

결론이 이미 기운 상대였다. 국가 권력을 장악한 통치자를 상대로 승리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나마 델 마레라는 오래된 명가의 이름이 짜고 치는 재판이나마 받을 수 있게끔 유도했을 뿐이다.

부모님은 최악의 결말을 각오하고 있었다. 돈, 보석, 문서. 전부 몸에 가볍게 지니기 좋고 환금성이 뛰어난 재산이다.

자신들이 미끼가 되어 델 마레 본가에 남고 딸을 빼돌려 두었다가, 여차하면 떠나보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새틴은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요. 도망쳐 봤자 저는 너무나도 확연한 델 마레 핏줄이라 오래 숨지도 못해요. 저 때문에 시작된 일인데 제가 도망친다는 것도 어리석은 행동이에요.”

유난히 튀는 은발과 창백한 피부색만으로도 이름을 밝히기 전에 출신이 알려지는 이들이 바로 델 마레 일가였다.

직계와 방계를 합쳐도 수가 다른 가문에 비해 훨씬 적어, 그만큼 더 눈에 띄었다.

그러나 최소한 거처만은 옮기라는 부모님의 권유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새틴은 그 권유를 받아들여 루블리에와 둘이 신혼집으로 향했다. 솔직히 단 얼마만이라도 편안하게 태교할 장소로는 그 집만 한 데도 없긴 했다.

둘은 조용히 신혼집에 도착했다. 극소수로 가려 뽑은 사용인들이 먼저 와서 집을 정리하고 있었다.

델 마레에서 너무 자주 사람들이 들고 나면 눈에 띄기 때문에, 카 딜론 가문에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침실은 예전에 쓰시던 방에 꾸며 놓았어요.”

예전의 침실은 부부침실이었다. 새틴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혼자 썼던 방으로 걸어갔다.

악령이 불타 죽은 후로 내내 빈방으로 남아 있었던 그곳은 라리가 육아실로 만들어 아이를 키우고 싶어 했던 곳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이를 품고 돌아왔는데 라리가 이제는 없었다.

새틴은 등으로 문을 닫고 몸을 옹송그려 앉았다. 자꾸만 눈물이 쏟아지는데, 소리를 내면 루블리에가 달려올까 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하루에도 수차례 주변을 헤매고 다니는 습관은 신혼집에서도 여전했다.

심지어 새틴은 한밤중에도 깜빡깜빡 눈을 떴다. 자다 말고 일어나 침실 문을 열었다가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검을 쥔 루블리에가 침실 문 옆의 벽에 기대앉은 채로 선잠을 청하다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놀랐을 때 가슴부터 쓸어내렸을 텐데, 임신했다는 진단을 받고서는 저절로 손이 아랫배로 향했다. 괜히 배를 다독이게 됐다.

“놀랐지, 미안…….”

이제는 습관처럼 사과하는 루블리에를 지나쳐 새틴은 드레스룸에서 겨울 코트를 찾았다.

잠옷 위에 코트를 걸치고 복도를 걸어가자 말없이 짐을 챙겨 따라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화한 바람이 불어왔다. 언제 가지고 나왔는지 몰라도, 루블리에가 목과 어깨에 숄을 둘러주었다.

새틴은 아주 천천히 걸었다. 루블리에는 그녀에게 보폭을 맞췄다.

침실에서 나와 들판을 느릿느릿 걸어가는 동안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집을 헤매고 돌아다닐 적에는, 아무리 넓다 해도 집은 집이었다.

다닐 만한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새틴은 자신이 얼마나 걸어도 되는지 잘 몰랐다.

걸을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면 속이 시원하게 풀릴 순간까지 맘껏 걸어도 되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체력의 한계는 일찍 다가왔다.

새틴은 겨울 들판의 맨땅 위에 몸을 구부리고 앉으려 했다. 지쳐서 좀 쉬었다 갈 참이었다. 마냥 앞만 보고 걸어온 탓에 돌아갈 체력을 남겨 두지 않았다.

한데 뒤에 있던 루블리에가 재빨리 새틴을 들어 올려 안았다.

“네가 허약해진 원인이 추운 감옥에서 지낸 영향이 크대. 밖에서 오래 있었으니 돌아가자. 나한테 화난 건 알지만…… 네가 힘드니까. 조금만 참아.”

새틴은 거부하려다가 얼른 생각을 고쳐먹었다. 잠시 제 기분은 무시하기로 했다.

찬 바닥에 앉는 것보다야 루블리에의 힘을 빌려 집으로 돌아가는 쪽이 아이에게 훨씬 이로웠다. 다소 계산적이어도 뭐 어떤가. 아이가 있는데.

새틴은 팔을 가만히 늘어뜨렸다. 손가락 사이로 공기가 흘러갔다. 힘주어 쥐어보았다. 텅 빈 손안에 남은 것이 없어 허전했다.

꼭 지나간 결혼 생활 같았다. 흘러간 느낌은 있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결혼 생활.

화. 새틴은 되뇌었다. 그런 걸까. 화가 난 걸까. 그에게 내내 화를 내고 있었던 걸까. 물론 화가 없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이제는 화와 다른 감정이 생겼다.

“화 아니에요.”

제 귀로 듣기에도 목소리가 아주 침착하고 나직해 마음에 들었다.

귀족답게 감정을 잘 갈무리하라는 부모님의 오랜 교육이 드디어 빛을 발한 모양이었다. 새틴은 서걱서걱 이어지다 머뭇거리는 발소리를 들었다.

“……새틴?”

“카 딜론 경도 혼란스러웠잖아요. 이해할게요. 나도 무조건 다 잘했다고 할 순 없을 거예요.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점이 분명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오해했고, 이혼했죠.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거고요.”

저를 고쳐 안는 손에 힘이 실렸다.

“그러니까…….”

새틴은 일정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굳이 우리의 과거를 돌이키지 않으려고 해도 돼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서로를 상대로 한 번씩 실수를 저질렀으니 나중에 다른 사람을 만나서는 적어도 한 가지 실수할 일은 줄어들겠죠. 그럼 된 거예요.”

새틴은 손에서 전해지는 불안한 떨림을 모르는 척했다.

“난 카 딜론 경을 보면 문득 뒤돌아보지도 않고 집을 나갔던 뒷모습, 혼자 웅크리고 지냈던 감옥의 차가운 냉기를 종종 떠올리겠죠. 마찬가지로 카 딜론 경도 날 보면 기요른이 자꾸 떠오를 테고요. 굳이 우리가 곁에 남아 있으면서 고통받을 이유는 없어요. 서로 상처받는 일인데요.”

의도적으로 시선을 멀리 흩었다. 어두운 밤이 그렁거렸다. 웃자란 풀, 늘어진 옷자락을 흔들며 지나가는 시간과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그의 걸음에만 집중했다.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은 해도 신뢰 없는 결혼 생활은 할 수 없다고 말해왔잖아요. 내 최고의 가치는 신뢰예요. 우리는 이미 신뢰가 한번 무너졌고요. 처음부터 신뢰를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보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쪽이 훨씬 어려워요. 뭐하러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해요?”

새틴은 무감하게 말을 맺었다.

“우리 인연이 거기까지였던 걸로 계속 나에게 얽매일 거 없어요.”

루블리에는 묵묵부답을 지켰다. 가슴이 저 아래로 곤두박질쳐서 말이 얼어붙은 탓이었다.

주관이 강한 성격이라 욱하면 바득바득 성을 내던 여자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확실하게 선을 긋는 존대로 화 한번 내지 않고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루블리에는 그녀가 차라리 버럭 화를 냈으면 했다. 화낼 가치조차 없다는 것 같아서, 생기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마음을 깡그리 비워버린 것 같아서 이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다.

손에서 내려놓는 순간 사라지지 않을까 겁을 먹었다.

마치 그녀를 만났던 아카데미에서의 첫인상처럼.

눈부시게 쏟아지는 빛을 받아 금방이라도 허공으로 비산할 듯 보였던 열두 살의 소녀가 지금 새틴의 얼굴에 겹쳐졌다.

“괜찮아. 너는 나에게 무슨 짓이든 해도 돼. 너에겐 그럴 권리가 있어.”

루블리에는 조심스럽게 새틴을 추어올렸다. 새틴과 아이, 두 사람의 무게가 너무도 가볍디가벼워 목이 메었다.

“아무것도 안 바랄게. 속죄하면서 살게. 곁에만 있게 해줘.”

문득 비가 오는가 했다. 새틴은 하늘을 확인하려다 말고 눈을 내리깔다가 언뜻 시야에 스친 장면을 다시 보았다.

저를 추슬러 안는 루블리에의 손이 언제 어디서 다쳤는지도 모르게 딱지 앉은 상처투성이였다.

상태로 보아서는 꽤 된 상처인데, 전혀 기억에 없었다. 그만큼 그를 외면하면서 지내왔던 것이다.

새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집이 지척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 * *

세상과 덩그러니 떨어진 외딴집에 급작스럽게 손님이 들었다. 어지간한 손님이라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내몰았겠지만, 사용인이 전한 손님의 정체는 루블리에의 부모님이었다.

“자고 있어. 금방 올게.”

육체적, 심적으로 쉽게 피로가 쌓이는 탓에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새틴은 여전히 침대 안이었다.

식사를 챙기러 잠시 침실에 들렀던 루블리에는 새틴을 남겨 두고 혼자 응접실로 나갔다.

카 딜론 가에서 루블리에를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아들이 이 일에서 손을 떼길 바랄 것이다. 키리온과 별 접점이 없었던 저와 달리 루블리에는 키리온의 유일한 지기였다.

그간의 인연을 보아서라도 키리온은 저와 루블리에의 처분을 달리하려 할 터였다.

새틴의 부모님은 새틴을 이 집으로 보내면서 그간의 흉금을 털어놓았다.

자식이란 부모에게 있어 무조건 살아 있어야만 하는 거라고. 그건 카 딜론 가에도 똑같이 적용될 마찬가지의 이치였다.

아들이 이혼한 부인으로 인해 신성 기사단을 그만두고 나와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부모님이 되어 마냥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겠지.”

새틴은 잠을 청하려 잠자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정신은 말똥말똥 돌아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다려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완전히 잠이 개었다.

결국 새틴은 이불을 걷어냈다.

“제발 좀 오라고 오라고 불러도 네가 들은 척도 안 하니 어쩌겠어. 우리가 와야지.”

멀쩡한 정신으로 하릴없이 침대에 누워 있기도 지겹고, 루블리에의 손님이 와 있으니 집을 비워주는 게 좋겠다 싶어 새틴은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잠시 집 앞을 거닐 예정이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복도를 가로지르는데, 응접실에서 쩌렁쩌렁 뻗어 나온 고함이 귓전을 후려쳤다.

“도대체 네가 왜 여기까지 따라와서 매달리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 아인 이혼할 작정으로 목걸이를 경매장에 내놓지 않았더냐? 너 델 마레와 재결합할 생각이야?”

본의 아니게 엿듣는 셈이 되어버렸다. 더욱 서둘러 집을 나가려다 말고 새틴은 멈칫했다.

목걸이가 경매장에 나갔다니? 기요른이 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

“새틴은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럼 목걸이에 발이라도 달렸다더냐?”

“발뿐이겠습니까. 더한 것도 달릴 수 있습니다. 새틴을 해코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까짓 목걸이 하나 빼돌리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요.”

새틴은 멍해졌다. 나름대로 키리온의 어두운 면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놓친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목걸이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루블리에도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았다.

아예 목걸이는 없었던 것처럼 묻지도, 언급하지도 않아서 새틴은 그가 목걸이의 존재를 잊었겠거니 했었다.

그러고 보니 집을 정리하고 결혼 생활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도 목걸이는 빠져 있었다.

가문의 역사가 실린 보물이었으니 이혼하면서 돌려달라고 요구해 봄직도 한데 루블리에는 그저 이혼장을 통보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걸 경매장에서 찾았구나.

언제 찾았을까.

그래서 이혼을 결심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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