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미안해.”
루블리에가 사과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미안해’가 낯설어서 새틴은 자못 당혹했다. 들어본 적 없는 단어였다. 제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듯 루블리에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미안하다, 새틴. 난……. 그저 나는.”
오랫동안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루블리에가 처참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제 속을 토로했다.
“네가 살아가면서 나한테 복수했으면 좋겠어.”
새틴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새틴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루블리에는 델 마레 저택에 머물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사용인들이 들어야 할 수발을 일일이 그가 들었다.
새틴은 제게서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 루블리에에게 두손 두발을 다 들었다.
입덧으로 음식을 극도로 가리게 된 새틴이 구역질을 하다 잠들면 그도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새틴이 잠드는 순간까지 머리맡에 있었고, 새틴이 자다가 아무 때나 일어나도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도대체 언제 얼마나 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늘 검을 준비하고 있는 긴장 상태였다.
새틴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겉보기로 칼데브란카는 꽤 조용했다. 법황의 국장 기간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새틴에 대한 소문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마주칠지 모른다는 가족들의 염려가 컸기에 새틴은 저택에 돌아온 후 문 바깥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저택이 암만 크고 화려하다 해도 사방이 막힌 공간이다. 답답한 심정에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거리를 내려다보던 새틴은 검은 옷을 입고 법황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그러고 보니 루블리에는 계속 델 마레 저택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저야 환자라 그렇다손 쳐도 도대체 이 남자는 왜 국장에 동원되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도대체 남의 집에 언제까지 있는 건가. 돌아갈 집이 없기를 하나, 직업이 없기를 하나. 왜 무위도식하는지 모르겠다.
“돌아가요. 기사단에 할 일 많잖아요?”
오래간만에 던진 첫마디가 곱지 않았는데도 루블리에는 기뻐하면서 대화를 받았다.
“이제 안 가. 때려치웠어.”
“……그게 뭔.”
맙소사. 진짜 대신전을 여는 대가로 팔라딘을 버렸구나.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자신과는 무관한 루블리에의 사정이다. 새틴은 등을 돌리고 턱을 괴었다.
감옥에서 막 돌아와 당시의 기억으로 음식이 잘 안 받는 것만 빼면 건강은 빠른 속도로 나아졌다.
멀쩡히 먹을 게 없던 감옥과 달리 부모님과 루블리에는 새틴이 먹을 수 있을 법한 음식을 모조리 공수해 왔기에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는 식사도 그럭저럭 가능하게 되었다.
태풍의 눈과 같은 평화였으나, 일상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조용했다. 하지만 잠잠히 지내다가도 불쑥불쑥 속에서 천불이 났다. 마음의 병이 생겼나, 싶었다.
그럴 때면 가슴을 식히려 새벽을 가리지 않고 온 집안을 돌아다녔다.
새틴의 부모님은 딸에게 몽유병이 생긴 줄 알고 기함했다. 하지만 새틴이 멀쩡히 눈을 뜨고 있자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게끔 내버려 두었다.
루블리에는 항상 새틴과 두세 걸음의 간격을 두고 따라다녔다.
램프도 없이 어둠을 헤매던 새틴이 자칫 넘어질 뻔하면 재빨리 잡아주고 새틴이 더럭 화를 내기 전에 다시 물러났다.
아무도 없는 거리를, 들판을, 호수 주변을 천천히 걷고 싶은데 고급 저택으로 즐비한 시가지는 혼자 여유를 부리며 걷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저택에 갇혀 있는 꼴이라 답답증이 일었다.
일주일의 국장 기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부모님이 새틴을 불러 앉혔다.
“새틴, 네가 살던 신혼집 있잖니? 당분간 거기 가서 지내는 게 좋겠구나.”
“……왜요?”
“왜긴. 네 안전 때문에 그렇지.”
“맞다. 이 저택은 시끄러워 네가 지내기엔 영 좋지 않아 보인다.”
부모님의 권유에는 차마 말 못 할 이유가 있었다. 새틴의 임신이 알음알음 퍼져나가면서 몇몇 사람들은 새틴이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가 기요른이라고 넘겨짚었다.
어차피 델 마레 가문의 핏줄인 만큼 새틴을 닮아 특유의 유전적 형질을 타고날 테니 아버지가 누군들 들통날 리는 없지 않냐면서.
상점가에 삼삼오오 모여 이 소문을 떠들어대던 사람들은 때마침 새틴을 위한 과일을 찾아 그녀가 잠든 새에 외출했던 루블리에의 손에 걸려 치도곤이 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장소에 숨어 수군수군 퍼뜨리기 시작했다.
훤한 장소에서 떠들면 두들겨 패서라도 악담에 대한 책임을 물을 텐데 루블리에와 델 마레가 무서우니 몰래 속닥거려 더 미칠 노릇이었다.
새틴을 신혼집에서 지내게 했으면 좋겠다고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루블리에였다.
새틴에게는 조용하고 한적하며 자유로운 장소가 필요했다. 건강 문제로 외출조차 제재를 당해 창밖만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는 새틴을 보고 있으면 날개가 꺾인 새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뒷담이 새틴의 귀에 닿기까지는 시간문제였다.
물론 이를 알 리 없는 새틴은 극렬히 거부했다.
“편한 제집 두고 남의 집에 있기 싫어요.”
동석해 있던 루블리에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 집의 소유권은 델 마레로 이양하겠습니다. 사람을 보내면 당장이라도 서류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에 뜬금없이 집이 생겼다. 새틴은 어처구니가 없어 루블리에를 쳐다보았다.
“미쳤어요?”
“제가 새틴에게 지불해야 할 배상금이 큽니다. 앞으로 차차 갚아나가겠습니다.”
상호 합의로 이혼이 결정 난 게 언젠데 배상금은 무슨 배상금인가. 금시초문이다. 달라고 한 적도 없고 받을 생각도 없다. 그러나 부모님과 루블리에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카 딜론 경.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어요?”
대화가 지지부진 맴돌기만 하자 새틴의 어머니가 요청했다. 루블리에는 새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방 밖으로 나갔다.
아마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다. 저 문 근처 어딘가에 있겠지. 새틴은 어렵잖게 짐작했다.
어머니가 새틴의 손을 그러잡았다. 새틴은 시선 둘 데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어머니의 손 아래 감춰진 제 손등만 오도카니 응시했다.
“새틴, 너에게 그를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야.”
새틴은 고집스레 입술을 다물었다.
“카 딜론 경을 용서하고 말고는 네 마음이지. 마음이 시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고 어찌 너에게 강요하겠니? 다만 또다시 기사단이 검을 들고 이 집으로 밀고 들어오면 우리 가족 중에선 널 무력으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
“네가 우리에게 화가 난 것도 안다.”
아버지의 첨언에 새틴은 가타부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너에게 많이 미안하구나.”
그러나 아버지에게서 사과를 듣고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면서도, 새틴은 부모님을 외면하고 있던 시선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너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자식이란 부모에게 있어 그저 살아 있어야 하는 거란다. 반드시 살려내야만 하는 거야. 정의니 원리원칙이니 하는 건 상관이 없어. 이건 전혀 다른 범주의 이치야.”
“세상에는 종종 불의한 일이 벌어져. 그러면 사람들은 대부분 누군가 희생해서 그 불의와 맞서 싸워주기를 바라지. 하지만 희생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거나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기를 바라는 게 또 사람의 마음이더구나.”
그 심정으로 새틴이 신탁에 대해 어떤 말을 하든 듣지 않고 오로지 새틴을 살릴 길만 찾아다녔다.
기요른이 키리온의 거래에 응해 감옥에서 풀려나자, 같은 방법으로 새틴을 구하고자 했다.
“전 세대의 사람들이 후대에게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유는 보통은 그렇게 사는 게 너무도 어렵기 때문일 거야.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자신이 안전할 때, 해를 입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을 때에 한정해서 정의를 지켜. 그러나 위험이 확실하면 반기를 들고 나서기보다는 대세에 순응하는 게 쉽지 않겠니?”
“자신을 희생해 불의를 이겨낸 사람들은 전설이 되어 남는다. 왜 남느냐면, 그만큼 대단하기 때문이란다. 나는 내 딸이 그런 사람인 줄 이번 일을 겪고야 알았구나.”
아버지가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시민들은 파수꾼 가문의 귀족이라면 당연히 너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겠지. 겪어보지 않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거기 모인 귀족들 중에서 너와 똑같이 행동한 사람이 달리 누가 있더냐? 카 딜론 경이 나타나기 전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역사에 기리고 영웅으로 떠받드는 게다. 칼데브란카의 초대 법황인 디오니시오 1세처럼.”
“네 재판에서 봤던 사람들의 태도가 아마 보편적인 반응일 거야. 네가 죄를 저질렀다고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네가 겪고 있는 위험이 감당할 수 없이 무서운 거지…….”
“네 일을 겪고 나와 네 어머니는 정말 많은 대화를 했다. 그리고 우리끼리 결론을 내렸지. 새틴, 성물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가져도 좋고 버려도 좋아. 두 번 다시 너에게 묻지 않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진작 물려준 것이니 네 소유가 맞겠다.”
이렇게 내려놓기까지 부모님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새틴은 빈손을 들어 아이가 있다고는 전혀 여겨지지 않는 우묵한 배를 만져보았다.
나는 너에게 성물을 물려줄 수 있을까.
“우리가 카 딜론 경을 신뢰하는 이유도 그거야.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온전하게 네 편을 들어준 사람이 그밖에 없잖니. 우리는 너희 둘이 어긋났어도 결은 비슷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남자는 팔라딘이지. 자의로 자리를 내려놓긴 했어도 말이야. 웬만한 남자보다 널 가장 확실하게 지켜줄 사람이라 그가 너와 있어야 마음이 놓여. 응?”
새틴의 복잡한 심사를 염려해 부모님은 굳이 그가 새틴의 배 속 아이의 아버지라고 언급하지는 않았다.
“사실 말이야, 새틴. 카 딜론 경 동의를 얻어 그 집으로 우리 재산을 미리 좀 옮겨놓았구나. 돈, 보석류, 땅이나 별장, 농장 문서가 약간 있는데 나중에 물려받을 유산의 일부를 지금 받았다고 생각하렴.”
이건 퍽 뜻밖의 이야기였다. 새틴은 당혹하여 되물었다.
“뭐하러 그러셨는데요?”
“어차피 다 네 거 될 텐데 일찍 받으면 좀 어떠니. 네 재산도 거기 있고, 태교를 위해서라도 사람 많고 시끄러운 이 집보다는 교외에 있는 그 집으로 옮기는 게 낫지 않겠니?”
또다시 집을 옮기라는 권유로 화제가 바뀌었다. 태교나 재산 때문이 아니더라도 언제고 그 집을 한 번은 방문하긴 해야 했다.
새틴은 곰곰이 궁리에 잠겨 있다 무겁게 입을 뗐다.
“제가 거처를 옮기면 부모님은요?”
“우리는 여기서 본가를 지켜야지.”
“제가 안 보이면 저를 빼돌렸다고 오해를 살지도 몰라요.”
“우리가 여기 남아 있는데 오해를 살 까닭이 없다.”
부모님을 보증인으로 세워 거처를 바꾸는 셈이다.
새틴이 재판에 나타나지 않거나 행방이 묘연하다고 여겨지면 키리온은 부모님에게 보복하려 들 터였다.
“그리고 있잖니. 만약, 만약 새틴.”
언성을 낮춘 어머니가 새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