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눈앞이 아뜩해졌다.
루블리에는 새파랗게 질린 새틴이 제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라리를 부르던 기억을 끌어냈다.
‘라리, 나 감기 기운이 있나 봐. 진통제 좀 줘.’
유독 그 시기 새틴은 다른 사람같이 느껴질 정도로 기운이 없었다. 기요른과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불화가 생겨 위축됐나 보다, 무신경하게 넘겨버렸는데 그게 아니었다.
‘얼굴이 해쓱해요. 의사를 불러야겠어요.’
‘괜찮아. 그냥 약만 먹으면 돼. 별거 아닌 걸로 집 시끄럽게 하지 마.’
그녀는 내내 아팠던 것이다. 살얼음판이나 다름없는 집에서 아파도 아프다 한마디 않은 채, 대화를 하고 싶어서 그를 기다리고 응접실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우리가 후회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다는 그녀에게 그는 무슨 짓을 했던가. 무슨 말을 했던가. 억지로 입을 맞추며 미열을 느꼈으면서도 그걸 몰랐다. 새틴을 알아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임신한 몸으로 감옥에서 지내시면서 입덧으로 섭식도 제대로 못 하고 마음고생을 워낙 크게 하셔서……. 입덧은 아마 스트레스가 심해 증세가 더욱 악화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곳이 임산부가 있을 환경은 아니니까요.”
의사가 안쓰러움을 가득 담아 새틴의 침실을 곁눈질했다.
“지금 잠드셨으니 일어나실 때까진 절대 깨우지 마세요. 아가씨께선 무조건 잘 드시고 잘 쉬시고 마음 편하게 계셔야 합니다. 가장 안정을 취해야 했을 시기를 추운 감옥에서 보내시고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는 건 기적입니다. 아이가 아주 튼튼한 녀석인가 봅니다.”
의사의 위로도 하등 의미가 없었다. 루블리에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 * *
델 마레 저택 주변은 내내 시끌시끌했다. 새틴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안 사람들은 저택을 기웃거리며 한 조각의 이슈라도 알아내려 용을 썼다.
사용인들이 쫓아내기에도 한계가 있어 아예 힘으로 밀어내려 밖으로 나온 루블리에는 모퉁이를 돌다가 반갑지 않은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곧바로 멱살을 잡아 담벼락까지 쾅 밀어붙였다.
“컥!”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기요른이었다.
목 졸린 기요른이 다리를 버둥거렸다. 두 손으로 루블리에의 팔뚝을 잡고 한참 몸부림을 치던 그는 루블리에가 숨통을 살짝 풀어주자 콜록콜록 거친 기침을 터뜨렸다.
루블리에가 보인 분노에도 기요른은 그저 순응했다. 그는 잔뜩 기에 짓눌린 기색으로 머뭇거리며 새틴의 안부를 물었다.
“……새틴은 무사해?”
“그걸 왜 네가 묻지?”
“내가 새틴한테 잘못한 게 많아서…….”
기요른이 웅얼거렸다.
“잘못한 게 많은 걸 알면서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나타나나.”
“맞아. 나도 아는데, 알지만…….”
소심한 눈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틴을 만나려고 온 건 아니야. 누구든 나오면 새틴이 괜찮은지만 물어보고 싶어서. ……정말이야. 나 이제 새틴하고 다시 잘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새틴이 날 용서하지도 않을 거고. 새틴이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다 알게 됐는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새틴이 그를 사랑하는 걸 안다는 기요른의 말만 들어도 가슴이 저몄다. 기요른마저 아는데 정작 그가 새틴을 믿지 못했다. 이토록 멍청할 수가 있을까.
“이미 목걸이를 거기 두면서 새틴과는 이제 완전히 끝이라고 생각했었어. 미안하다고 전해줘. 재판에서 했던 말은 전혀 내 의지가 아니었어. 다 잃고 남은 게 없는 내게 이제 지켜야 할 건 우리 가문밖에 남지 않아서 그랬어…….”
기요른의 태도를 보니 위증을 했다고 재판에서 번복해 줄 의지는 없는 듯했다. 기요른은 그럴 용기가 없는 자였다. 루블리에도 기대를 버렸다. 그러다 돌연 귓가를 스친 대목에 그는 번뜩 긴장했다.
“목걸이는 무슨 소리지?”
“새틴이 결혼 기념으로 받은 목걸이를 떠, 떨어뜨리고 갔잖아. 금방 찾으러 오겠지 해서 극장에 뒀거든. 새틴이 못 받았어?”
새틴의 목에 찍혀 있던 입술의 흔적과 경매장에서 발견됐던 목걸이의 비밀이 이제야 풀렸다. 새틴이 목걸이를 떨어뜨렸다고? 그녀가 과연 떨어뜨린 걸까.
그때는 새틴이 밀회를 마치고 남들 눈에 띌까 허둥지둥 숨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짐작이 완전히 틀렸다.
새틴은 도망가고 있었다. 흐트러진 차림으로, 기요른에게서. 오죽 놀라고 두려웠으면 새틴이 목걸이를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집까지 돌아왔겠는가.
그 대극장에서 루블리에는 키리온의 계략에 여러 번 걸렸다. 목걸이를 습득해 출처를 세탁해서 경매장으로 넘기는 정도야 키리온에겐 별반 품이 드는 일도 아닐 터였다.
위로가 절실하게 필요했을 여자에게 불륜을 근거로 들어 맹비난했다. 충격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새틴은 그에게 죄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틴은 이혼을 바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걸이 때문에 이혼했다.
이혼하게끔 강요했다.
지금 누가 누구를 욕한단 말인가. 누구를 위협한단 말인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무슨 권리로.
아귀힘이 풀렸다. 바둥거리던 기요른은 목이 놓여나자마자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고 루블리에의 기색을 살폈다.
“루브. 나한테 화풀이를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해도 돼.”
기요른이 찾은 사죄의 방식은 고작 그런 것뿐이었다. 루블리에는 주먹을 꽉 쥐었다. 오랫동안 전문적인 훈련을 거쳐온 기사의 힘이고 기사의 분노였다.
기요른처럼 평범한 사람이 그런 주먹에 맞으면 어느 한구석은 부러질 각오를 해야 했다.
끔찍하게 아플 테다. 게다가 루블리에는 셀 위오 가문이 함부로 항의하기 힘든 상대였다. 그럼에도 기요른은 눈을 꾹 감고 기다렸다.
하나, 둘…….
속으로 숫자를 세기 무섭게 쾅, 엄청난 타격음이 터졌다. 귓전이 멍해지는 요란한 소리에 기겁한 기요른은 잠시 뒤 어리둥절해서 눈을 떴다. 몸 어디도 아프지 않았다.
“……루, 루브.”
“화풀이는…… 나한테 하고 싶군.”
벽을 후려친 주먹에서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하나 새틴이 고통스러웠던 만큼 똑같이 고통스러우려면 도대체 얼마나 자신을 후려쳐야 할지 막막했다.
이까짓 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루블리에가 재차 벽을 내리쳤다.
“정말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야.”
* * *
한참 깊이 잠들었다가 눈을 뜬 새틴은 제 머리맡에 어른거리는 형상을 발견하곤 소스라쳐 비명을 질렀다.
“아악!”
캄캄한 밤이었다. 창가의 커튼을 내리고 행여 잠에 방해가 될까 불도 하나 켜지 않아 방은 온통 어둑어둑했다. 그 색이 감옥의 그늘과 꼭 닮아 있었다.
그 감옥에 그녀는 항상 혼자 있었다. 반드시 혼자 있어야만 했다.
‘아, 아깝다. 창살 하나만 넘어가면 되는데 말이야.’
‘귀족 여자, 그것도 델 마레의 외동딸을 두고 침만 삼키고 있어야 한다니.’
‘귀족이라 그런지 확실히 태가 다르긴 달라.’
호시탐탐 저를 희롱하던 죄수들의 비웃음이 메아리쳤다. 공포에 손발이 얼어붙었다.
“아악! 라리, 라리……!”
“놀라지 마, 새틴. 나야.”
악을 지른 새틴은 도망 대신 저항을 선택했다. 누가 뭐라고 다독이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새틴은 정신없이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힘껏 발로도 걷어찼다. 손에 잡히는 대로 쥐어뜯었다. 간혹 손톱을 세워 할퀴기도 했다.
상대는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새틴이 후려치고 때리는 대로 묵묵하게 얻어맞았다.
한참 후에야 새틴은 자신이 꿈과 현실을 착각했음을 알아차렸다. 이곳은 자신이 지내던 델 마레 저택의 침실이었다. 푹신한 침대와 깨끗하고 따뜻한 이불이 있었다.
이성이 돌아왔다.
그래, 재판은 연기되고 집에 오게 되었지.
루블리에가 대신전에서 저를 번쩍 들어 안고 나와버렸던 부분까지 기억났다.
차차 그 이후를 더듬어가다가 새틴은 저를 다독이는 루블리에의 가슴을 밀쳐내고 물러앉았다.
“새틴, 봐봐. 손 다치지 않았어? 괜찮아?”
루블리에가 새틴의 손을 살펴보려 했다. 새틴은 그 손마저 후려갈겼다.
“왜…… 왜 여기…….”
호흡이 가빠 단어가 뚝뚝 끊겼다. 루블리에가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밥 먹자. 일어나면 잘 챙겨 먹고, 아무 생각 말고 잘 쉬어야 한대. 자꾸 놀라면 좋지 않다고 했는데…… 의사를 불러줄게.”
“나가요.”
“밥 먹고 자는 것만 보고 나갈게.”
“나가라고요.”
“……너 임신했어, 새틴.”
그제야 새틴은 그동안 몸 상태가 어째서 그토록 엉망이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아이가 있었다. 배 속에, 그의 아이가.
분명 놀라야 마땅한데, 하도 많은 사건을 겪었더니 이젠 이 정도의 소식은 놀라운 축에 들지도 않았다.
새틴은 눈을 치뜨고 쏘아붙였다.
“뭘 주장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어쩌라고요. 이 애는 델 마레야!”
루블리에는 주저 없이 끄덕였다.
“맞아. 그 애는 델 마레의 후계자야. 무조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단지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니까 우선은 네 건강을 챙겼으면 해서…….”
끝까지 듣지도 않고 새틴은 팔을 뻗어 종을 흔들었다. 감정을 실어 두들기듯 종을 쳤다. 숨넘어가게 울리는 종소리에 새틴의 부모님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새틴은 루블리에를 노려보았다.
“이 사람 내보내 줘요.”
어머니가 새틴을 달랬다.
“새틴, 진정하자. 네가 혼자 있으면 위험하니까 카 딜론 경이 널 지켜주는 거야. 응?”
“그래, 새틴. 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너를 경호해야 하니 말이다.”
첫마디부터 참으로 기막힌 이야기를 들었다.
“뭐라고요? 누가 누굴 지켜요?”
새틴이 또박또박 내쏘았다.
“기요른과 그 빌어먹을 스캔들이 돌아서 더러운 욕을 먹을 때도 나는 혼자 있었고, 라리를 잃었을 때도…… 견뎌냈고, 감옥에서 다른 죄수들이 온갖 모욕을 해도 참았고, 재판에서 죽이네 살리네 위협을 받으면서도 버텼는데 왜 이제 와서 내가 혼자 못 지내요? 홑몸이 아니라서? 이게 뭐라고. 이까짓 게 뭐라고!”
“……아이에 대해 내가 아버지라고 어떻게 해 달라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없는 거 잘 알아. 네가 나와 분리해 델 마레의 후계로 키우겠다면 얼마든지 그래도 좋아. 그저 책임만 지게 해줘.”
“무슨 책임을요. 델 마레에 돈이 없어요, 명예가 없어요? 남의 도움 없어도 난 혼자 낳아 잘 키울 수 있어요.”
“너와 아이가 안전하게 살아가게끔 지킬 책임.”
루블리에의 대답에 새틴은 입을 꾹 다물고 그를 응시했다. 한참 만에 그녀는 조용히 가라앉은 어조로 루블리에를 끊어냈다.
“정작 필요로 할 땐 곁에 없었으면서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