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12)

<88화>

새틴은 제 말이 루블리에에게 상처가 될까 봐 비밀을 알리지도 못하고 신중을 거듭했는데, 키리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루블리에의 이혼을 입에 담았다.

사람이 기뻐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니 기쁜 것이다.

긴장감이 팽팽하게 달아올랐다.

사제 하나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저기, 둘 다 진짜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신탁이 한 번 내려졌다가 신께서 마음을 고치셔서 다시 바뀐 겁니다.”

“그렇다면 신탁을 위조했다는 제 딸의 혐의는 억울합니다.”

작은 기회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새틴의 어머니가 무죄를 호소했다.

루블리에가 품에서 인장을 꺼내 내세웠다. 언제 그랬냐는 듯 루블리에의 말투는 장소와 상황에 맞는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대신전의 인장입니다. 대신전은 소속된 사제가 살해당한 사실을 알고는 있었습니까? 그 사제는 처음 신탁을 운반했던 사람입니다.”

사제들이 인장을 받아 문양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새틴도 깜짝 놀랐다. 기요른도 움찔하며 새틴을 쳐다보았다.

새틴은 사제들의 손을 부지런히 넘어가는 베르비움의 인장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 뭐든 남아 있을 줄 알았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는 옷차림까지도 위장했다는 사람이, 비참하고 억울하게 죽어가면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리가.

키리온은 당황하지 않고 받아쳤다.

“죽은 사제가 위조를 도왔다가 처리당했겠지.”

거짓말이었다. 그렇다면 새틴이 시신 안치소에 편지를 보내 남자의 행방을 수소문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새틴이 사람을 함부로 해치는 성격이 아님을 그가 알았다.

그녀는 악령이 나타나자 주변 민가를 덮치지 못하게 하려고 직접 악령을 유인했던 사람이었다.

여기서 당장 함부로 증인의 신분을 입에 올려 반박하면 키리온은 곧장 기사단을 파견해 손을 쓸 것이다.

시신 안치소의 관리인이 위험해질 수 있을뿐더러, 법황청의 권력이 억누르는데 평범한 관리인이 당해내기도 힘들 터였다.

그에게 인장을 내밀었던 관리인의 소재를 파악해 보호해야 했다.

루블리에는 잠시 관리인에 대해서는 정체를 숨기기로 결심했다.

“반박할 증거를 제시하겠습니다. 다만 준비할 시일이 필요하니 오늘의 재판을 미뤄주시기를 추기경께 요청합니다.”

분위기는 혼란스러웠다.

“이쪽 말을 들어보면 이쪽 말이 맞는 것 같고, 저쪽 말을 들어보면 저쪽 말도 맞는 것 같고. 헷갈려서 원.”

“대신전의 사제가 죽었다니까 아무래도 찜찜하잖아. 사제라…… 사제라니…….”

신을 믿는 나라에서 사제는 시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평범한 사람이 죽었다면 눈 하나 깜짝 안 했을 이들도 사제의 죽음에는 조금씩 술렁거렸다.

특히 대신전의 사제들 가운데엔 솔직하게 드러내 놓고 경악하는 사람들도 상당했다.

“새틴, 너 괜찮니?”

어머니가 새틴의 어깨를 흔들었다.

너무 많은 감정들이 스치는 바람에 고개를 툭 떨어뜨리고 있던 새틴은 가만히 끄덕였다.

죄인의 신분이라 발언권을 박탈당하고 있었지만, 루블리에의 난입으로 어수선해진 지금 빈틈이 생겼다.

새틴은 기운을 그러모았다.

“의문이 있습니다. 신탁의 진위를 가려줄 가장 중요한 증인은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시죠?”

“새틴 양. 누구를 의미하는 겁니까?”

고맙게도 추기경이 놓치지 않고 들어주었다. 새틴은 또랑또랑하게 목소리를 돋웠다.

“신탁을 가장 먼저 확인하셨을 분. 법황청에는 법황 성하께서 계십니다.”

그러고 보니 누구보다 먼저 신탁을 목격했을 사람이 바로 법황이었다.

단지 오랫동안 자리를 보전하고 누운 법황의 건강을 염려해 모두들 법황의 존재를 열외로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만큼 나라가 시끄러워졌으면 아무리 쇠약한 법황이라도 공식적인 의견을 내야 하는 것 아닌가.

루블리에가 표정을 굳히고 키리온에게 따져 물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대체 법황 성하께서는 어디 계신 겁니까?”

키리온은 멈칫 굳었다.

하나 이내 자세를 가다듬은 그는 엄숙한 어조로 대답했다.

“루브. 자네가 법황청을 떠나 있어서 전달하지 못했군. 성하께서는 어젯밤 승하하셨네.”

일순 정적이 자리했다.

이보다 더할 순 없다 여겨질 만큼 사위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아무도 숨을 쉬지 못했다.

그나마 루블리에가 먼저 정적을 깼다. 하지만 격식을 잊은 외마디 반문만이 튀어 나갔을 뿐이었다.

“……뭐?”

“즉위식 전에 신탁을 두고 지저분한 다툼이 생겨서 이 일을 일단 급히 해결하느라고 승하 소식을 공표하지 못했어.”

소름 끼치게 공기를 압박하던 정적은 깨졌으나, 여전히 누구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눈의 깜빡임조차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새틴은 눈이 시려오도록 크게 떴다.

시간이 멎은 듯했다. 다들 넋을 놓았다.

루블리에가 간신히 이성을 회복했다. 하나 급격히 해쓱해진 기색은 그대로였다.

“자네 제정신인가?”

“왜? 법황 성하께서는 쇠약하셨지.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네.”

“그건 나도 알아.”

잠에 빠져 의식이 없는 채로 며칠씩 보냈다는 소식을 듣기는 들었다.

법황 스스로도 제 여명이 다해 간다고 말했다. 그렇더라도 오랫동안 칼데브란카를 지탱해온 중추가 쓰러졌다.

그럼에도 그 비보는 비밀에 부쳐진 채로 새틴을 처벌할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순서가 잘못되었다.

잘못돼도 아주 잘못되었다는 기분을 떨치려야 떨칠 수가 없었다.

“……키리온. 아버지의 죽음보다 재판이 더욱 중요해? 자네는 내가 알던 키리온이 아닌 것 같군.”

“루브.”

“후일을 기약하지.”

루블리에는 주저앉은 새틴을 번쩍 들어 안고 대신전을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뒤에서 얀 실럿 가문이 언성을 높였다.

“새틴 델 마레에 대한 혐의는 아직 풀리지 않았소. 범인을 마음대로 데려가면…….”

루블리에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럼 날 같이 잡아 가두던지.”

재판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다수가 교리만 공부한 사제들이거나 중년의 귀족들이었다.

검으로 이름을 날린 데다 한창때의 청년인 루블리에를 힘으로 누가 당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신성 기사단에게 명령을 내리기엔 바로 직전까지 그가 그들의 수장이었다.

기사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랐던 남자가 하루아침에 직위를 내팽개친 모습을 보고서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대신전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일부는 정신을 차리고 썰물처럼 빠져나갔으나 대부분은 자리에 남아 자신들의 혼돈을 여과 없이 털어내느라 바빴다.

얼이 나간 사람들 한가운데 서서 키리온은 차츰차츰 멀어지는 루블리에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이것을 위해 팔라딘의 자리를 버린 건가.

법황에게 복종해야 하는 팔라딘의 지위를 가지고 그에게 반목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니까.

차곡차곡 속으로 분노를 쌓아가는 키리온에게 콘첸트 추기경이 침중한 태도로 부탁했다.

“예하, 재판은 당분간 중지하겠습니다. 저희에게 법황 성하를 애도하고 안식을 기원할 시간을 주십시오.”

법황의 죽음이 불러온 충격의 여파가 어마어마했다.

하여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부탁이 되었다. 키리온은 입술을 짓씹었다.

대신전의 입구를 벗어나자마자 새틴은 발버둥을 쳤다.

혹시 어딘가 불편한가 싶어 잠시 새틴을 내려놓자 새틴은 스스로 털고 일어나 루블리에에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도와주신 후의에 감사합니다, 카 딜론 경.”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어도 목소리는 섬뜩하게 서늘했다. 뚜렷하게 선을 긋는 예전의 말투에, 고저까지 없었다.

루블리에는 더럭 겁을 먹었다.

“새틴……. 잠시만.”

그녀는 무감정한 낯으로 루블리에를 향해 묵례했다.

“안녕히 가세요.”

새틴은 약간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았다.

돌아서서 신전의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핑그르르 현기증이 돌았다.

시야가 일그러져 발을 헛디디는 순간 새틴을 다급하게 감싸 안는 팔이 있었다.

새틴은 곧장 팔을 뿌리쳤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놔!”

루블리에는 먹먹한 가슴을 애써 눌렀다.

“잠깐이면 돼. 일단……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너 지금 아프잖아. 혼자 갈 수는 없어.”

대신전 앞에는 카 딜론 가의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마차였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흑마는 팔라딘의 직위를 반납한 즉시 소유권이 사라졌다.

어차피 환자를 말에 태워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간신히 설득한 새틴을 안아 들고 마차에 태워 마부에게 신혼집의 주소를 대자, 새틴이 바로 거부했다.

“아뇨, 델 마레 본가로 가세요.”

“거긴 시가지 한복판이야. 염탐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네가 편하게 쉴 수 없을 거야.”

루블리에의 설득에도 새틴은 완강했다.

“우리 이혼했어요. 델 마레로 데려다주신다는 게 아니라면 제게는 카 딜론 경의 호의가 필요 없네요. 가세요.”

새틴은 마차에서 내렸다.

다급히 새틴을 쫓아 나온 부모님이 고마움과 난처함이 반반씩 섞인 복잡한 눈으로 루블리에를 올려다보며 권유했다.

“델 마레 저택으로 가요. 새틴이 그걸 바라니까요.”

마차에서 새틴은 어머니의 무릎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온통 덮고 있어 숨이 막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루블리에는 머리카락을 걷어주려 손을 뻗었다가, 순식간에 알아차리고 밀어내는 새틴의 손등과 맞닥뜨렸다.

손등뼈와 혈관이 피부 위로 파랗게 비쳤다.

손대면 부서질 것만 같아서 루블리에는 또다시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마차는 델 마레 저택에 도착했다.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부랴부랴 새틴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침실까지 업어가는 동안 의사도 불려 왔다.

새틴이 혼자 있기를 바라서 부모님과 루블리에는 침실 밖에서 진찰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의사는 한참 만에 침실에서 나왔다.

루블리에가 다급히 물었다.

“새틴은 어떻습니까?”

의사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저, 아가씨께서 혹시 평소에 춥다거나, 몸살처럼 아프다거나 평소와 다른 증세를 호소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신혼집에서 돌아와 저택에서 잠시 지내던 시절의 새틴을 떠올리며 어머니가 불안하게 대답했다.

“추위를 많이 타기는 했어요. 그렇지만 추우니까 그런 줄 알았는데.”

입맛이 없다며 음식을 못 먹고 종종 넋이 나가 있기도 했지만, 이혼이 불러온 후유증이라 생각했었다.

스캔들부터 이혼까지 연달아 큰일을 겪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낸다면 도리어 이상하지 않은가.

“새틴에게 큰 문제가 있습니까? 감옥 생활 때문에?”

“물론 감옥 생활이 아가씨께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기는 했습니다만…… 진짜 큰 문제는 따로 있어서요.”

“그게 뭡니까.”

“아가씨께선 지금 임신하셨습니다. 혹시 아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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