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12)

<87화>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그 생각을 고칠 기회 말이오.”

그가 준 기회 같지 않은 기회라면 거짓 자백을 하고 성물을 반환하는 것이다.

기실 기요른의 거짓 자백과 위증 하나로도 즉결처형까지 가능했을 키리온이 굳이 명망 높은 성직자들을 재판에 세워가면서까지 이 모든 연극을 준비한 의도가 또다시 드러났다.

여전히 그는 새틴을 회유하고 있었다.

죄를 인정하고 성물을 반환하라고.

기요른이 숨을 들이켰다.

“……새틴.”

저를 말리려는 의미가 분명했다. 그러나 새틴은 날을 세워 거부했다.

“필요 없습니다.”

“고생을 덜 했군. 끌고 가라.”

키리온의 명령을 받들어 새틴을 결박하려는 기사단이 뚜벅뚜벅 접근했다. 힘을 잃은 몸이 강제로 일으켜 세워졌다.

죄인을 다루는 기사들의 손속에는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질질 끌려가려던 찰나.

쾅, 부서질 기세로 문이 열렸다.

“멈춰.”

그 이후 벌어진 장면은 너무 빠르고 온통 혼란스러운 일뿐이었다.

제일 먼저 새틴을 잡아가려던 기사의 턱으로 주먹이 날아갔다.

기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두세 명의 기사를 바닥으로 메다꽂고서 그는 마지막으로 긴 검을 뽑아 다른 기사들을 겨눴다.

새틴은 제 앞을 가로막고 선 넓은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갑자기 수장이 나타나 재판소에 난입하니 부하들도 얼이 빠졌다.

검을 검집에 집어넣지도 않고 바닥에 세운 루블리에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키리온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예하. 신탁이 내려지는 대신전을 공개하십시오.”

“뭐라고?”

“대신전을 개방해 두 개의 신탁의 진위를 가려주시길 요구합니다.”

“법황의 검이 감히 나를 의심하나? 루브 네가, 나를?”

하극상이 벌어졌다. 법황의 명이라면 그 자리에서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기사가 의혹을 제기했다.

더구나 키리온과 루블리에는 칼데브란카에서 가장 유명한 우정을 나누던 관계였다.

루블리에가 덤덤하게 입술을 뗐다.

“압니다. 세상에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파수꾼 가문은 정당한 신탁을 가려내 따를 의무가 있으며, 팔라딘은 추호의 의심 없이 법황만을 따르는 검입니다.”

그가 말을 맺었다. 일견 홀가분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음성으로.

“그러하기에 저에겐 신성 기사단의 수장으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이 시간부로 팔라딘의 지위를 내려놓겠습니다.”

루블리에의 의심은 새틴과 기요른의 의심과 비중이 달랐다. 루블리에가 키리온과 얼마나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왔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하나도 없었다.

흔들리는 사람이 나올 터였다. 이미 루블리에가 이끌었던 신성 기사단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키리온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좋다. 신전을 개방하지.”

대신전의 사제들은 별안간 방문한 귀빈들의 행렬에 어리둥절하면서도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방문객들의 면면이 키리온과 추기경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과 대귀족들인데 어찌 감히 남들과 같은 절차를 요구하겠는가.

“신탁은 시기가 되면 이 돌에 새겨집니다. 저희는 단지 석판을 떼어내 법황청으로 전달하는 역할만 하고 있습니다.”

사제가 석주를 가리켰다. 지금까지 내려진 석판을 하나하나 탑처럼 쌓아 올리면 오로지 신앙 하나로 이백 년을 지켜온 나라의 역사가 고스란히 세워지는 격이었다.

“이제 어쩔 텐가?”

키리온이 비딱하게 물었다.

루블리에는 새틴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재판소에서 다시 신전으로 이동하면서 남아 있던 체력을 모조리 소진했다.

두 다리로 설 힘은커녕 등을 세우고 앉지도 못해서 어머니의 부축을 받아 겨우 중심을 잡고 있었다.

초점 잡힌 눈빛이 그나마 그녀의 정신이 아직 명료하다는 점을 대변하고 있었으나 딱 그뿐이었다.

루블리에가 시선을 보내도, 이름을 불러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서 손을 내밀어도 돌아오는 반응이 전혀 없었다.

대신전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고집스레 제 모든 힘을 깎아가며 직접 움직였다.

새틴은 감정에 항상 솔직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고초를 겪은 얼굴은 석고상처럼 무감했다.

그토록 넘치던 감정이 아예 사라졌을 정도라면 홀로 많은 고통을 감내했을 것이다.

무서웠다.

새틴이 혼자 보고 있었을 세상이.

새틴이 혼자 겪고 있었을 괴로움이.

루블리에는 새틴이 진짜라고 주장한, 비탈리스의 이름이 새겨진 신탁을 들었다. 우선은 이 신탁의 출처를 알아야 했다.

그는 석판을 석주에 가져다 댔다. 모두가 긴장하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석판은 정으로 쪼아 떼어내기에, 아무리 편편이 떼어낸다 해도 각기 다른 요철이 있었다.

석판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석주와 밑바닥의 면이 맞물리지 않은 것이다.

“역시 가짜잖아.”

기대가 없었던 사람들은 실망하지도 않았다. 그러려니 하는 반응이었다.

“내 것을 해 보지.”

키리온이 자신의 석판을 건넸다. 사제가 석판을 석주와 맞추자 그린 듯이 딱 맞아떨어졌다. 유독 눈에 띄게 안도하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이래도 자네는 여전히 그녀의 말을 믿나?”

루블리에는 대답 대신 그 위에 비탈리스의 석판을 얹었다.

바닥을 여러 방향으로 움직인 순간, 두 개의 석판이 한 몸처럼 달라붙었다.

“이 역시 대신전에서 나온 신탁이군요.”

“……이게 무슨.”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설마 대신전 내에서 위조가 이루어졌단 겁니까?”

경악성이 흘렀다. 추기경도 눈을 커다랗게 뜨고 손수 하나의 석주에서 나온 두 개의 석판을 들여다보았다.

“심지어 비탈리스 예하의 석판이 먼저 나왔습니다.”

순서를 지적하는 사람도 나왔다. 새틴의 아버지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의문을 얹었다.

“예하, 정말로 저희가 처음 소집되었을 당시에 신탁이 없었던 것이 맞습니까?”

감옥에 갇힌 새틴은 부모님에게 호소했었다.

‘법황청에선 신탁 문제로 파수꾼 가문을 두 번 소집했잖아요. 진짜 신탁은 처음 부름에 이미 나와 있었어요. 그걸 숨기고 가짜 신탁을 조작해서 진짜인 양 내보인 거예요.’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의혹을 제기하기에는 상대가 너무도 거물이었다.

키리온을 어떻게 건드린단 말인가.

더구나 무능력한 비탈리스를 어찌 법황으로 섬긴단 말인가. 하여 딸만 살아난다면 진실과는 상관없이 눈을 감을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새틴은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생각지 못한 조력자가 나타났다.

지금은 이를 새틴을 살릴 동아줄로 여기고 붙드는 수밖에 없었다.

키리온의 낯빛에 분노가 서렸다.

“지금 내 신탁을 의심하는가?”

곧장 루블리에가 반문했다.

“진짜가 없는데 위조를 먼저 합니까? 진짜가 없이는 가짜도 없습니다. 진짜가 선행되어야 그 결과에 따라 위조품을 만드는 사람이 나오는 법입니다.”

얀 실럿의 가주가 키리온을 두둔했다.

“그러나 이번 신탁은 우리 모두가 미리 예견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위조가 먼저 이루어졌던 겁니다.”

“어디서 비슷하게 만들어 왔다면 모를까 대신전의 석주에서 신탁이 위조되었는데 가짜라고 꿰뚫어 보았단 겁니까? 오히려 가짜라고 의심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루블리에는 사제들을 날카롭게 훑어보았다.

“대신전의 사제들을 갈아엎어야겠습니다. 자기들 집안에서 신탁이 조작되고 있는데도 아무도 몰랐다니 말입니다.”

기함한 사제들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희는 온전한 마음으로 신을 믿기에, 이런 부정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콴 테온 가에서도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진작 위조품을 간파하셨으니 키리온 예하께서 능력이 있으셨던 겁니다. 아니, 공범이 자백했는데 이 이상으로 어떤 증거가 필요합니까?”

“동기가 없습니다. 새틴에게 비탈리스 예하를 법황으로 세울 동기가 뭐가 있습니까?”

“자네가 재판에 처음부터 참석하지 않아서 말이 안 통하는군. 새틴은 자네를 배신하고 기요른과 정을 통했잖나. 자네는 내 사람이지만 기요른은 아니지. 내가 법황으로 즉위하면 델 마레와 셀 위오에 불리할까 봐 비탈리스를 즉위시키려는 거야.”

제 입으로 새틴에게 쏟아냈던 가시 돋은 말들이 키리온의 입에서 다시금 반복됐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심정에 루블리에는 새틴의 기색을 살폈다. 새틴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태도로 무덤덤하기만 했다.

키리온이 어깨를 추어올리며 쐐기를 박았다.

“자네도 봤잖아.”

루블리에는 잠시 침묵했다가 낮게 되물었다.

“……내가 무얼 봤는데? 꼭 뭔가를 아는 듯한 어투로군.”

그는 경어를 쓰지 않았다. 마치 이 자리에 루블리에와 키리온, 단둘만 존재하는 듯이.

“같이 산 사람은 자네인데 내가 뭘 알겠나. 그냥 부부 사이에 느낌이란 게 있겠지. 그래서 이혼한 거 아닌가?”

키리온이 태연하게 능청을 떨었다. 의혹을 일으키며 매섭게 날을 세우던 루블리에의 분위기가 날카로움에서 차분함으로, 차분함에서 다시 냉정함으로 차례차례 변해갔다.

“키리온, 자네는.”

루블리에는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의문을 맺었다.

“자네는 내가 이혼해서 기쁜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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