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새틴이 직접 신탁을 입에 담자 재판소가 술렁거렸다. 재판을 지켜보는 부모님은 당장에라도 쓰러져 실려 나가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파리했다.
그 신탁으로 딸의 생사가 오가는 마당에 이성을 챙겨 증언을 들을 정신이 있을 리 없다.
심지어 부모님 근처에는 언제든지 난동을 피우면 제압하게끔 검을 뽑아 든 기사들이 여럿 포진해 있기까지 했다.
“이왕 신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중요한 증거물을 하나 제시하겠습니다.”
추기경의 눈짓을 받은 사제가 석판을 하나 가지고 나왔다. 신탁이었다. 사제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석판의 본을 떴다.
젖은 종이에 글씨가 새겨지도록 기다려 탁본을 들어 올리니 비탈리스의 머리글자가 선명히 떠올랐다.
사방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누군가는 키리온의 신탁이 가짜임을 알면서도 바람을 잡느라 동조하고 있을 테고, 누군가는 증거품으로 나온 신탁이 가짜라는 말을 믿고 경악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비탈리스의 이름이 각인된 신탁을 본 순간 새틴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게 진짜겠구나.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짐작했던 진짜 신탁이 바로 저것이었다.
그게 가짜 신탁이 되어 눈앞에 나와 있었다. 모두가 그 증언을 믿었다. 아니, 그 증언이 진실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득을 좇는 귀족들이 따르고자 하는 미래는 키리온이 법황인 세상이었기에.
애초에 안될 싸움이었던 것이다. 부모님마저도 대세에 수긍하는 길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라고 말했다.
대세에 수긍한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새틴은 문득 까마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이 재판소는 결국 일종의 공연이었다.
공연이란 결국 없는 이야기를 진실처럼 느끼게 만드는 과정이다.
관객들은 배우가 연기하는 주인공들에게 웃고 울고, 분노하기도 하고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 이야기는 허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다들 기꺼이 속아 넘어간다.
속이려는 사람과 속아 넘어가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공연 무대가 여기 있었다.
일방적으로 발언권을 가진 키리온이 증거품까지 대동하며 새틴을 몰아붙였다.
소문이 워낙 짜하게 돌아 다들 아는 이야기였으나 재판에서 들으면 느낌이 새로운 법이다.
불륜 스캔들에 이어 이들이 그른 마음을 품게 된 과정이 한바탕 설파된 후에 얼떨떨한 표정의 비탈리스가 소환되었다.
“어, 그, 그게…… 저, 저는 전혀 아…… 알지 못했던 일입니다. 도, 도대체 이게 무슨, 무슨 영문인지…….”
얼마나 당황했는지 가뜩이나 서투른 말이 더욱 알아듣기 힘들게 변해 있었다.
비탈리스는 키리온과 새틴을 몇 번씩이나 번갈아 가며 눈치를 살폈다.
몇몇 사람들이 얼핏 짜증스러운 기색을 내보였다가 재빨리 표정을 간수했다.
저렇게 갑갑하고 둔한 인사니 남의 손에 좌지우지를 당해도 못 알아차리겠지.
워낙 무시를 받아온 세월이 길어 비탈리스는 새틴과 기요른을 충동질해 법황에 오르고자 했던 인물보다는 그들에게 이용당할 뻔하고도 모르는 얼뜨기로 비쳤다.
그렇게 비치도록 키리온이 이끌어가기도 했다.
건국 기념일 행사에서 비탈리스와 조금이나마 사담을 나눈 사람이 이들뿐이었다는 점도 악영향을 끼쳤다.
우물거리면서 신탁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증언을 마친 비탈리스가 새틴을 향해 걱정스러운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 제, 제 생각엔 뭔가 오,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새, 새틴님과 기요른님은 이런 일을 꾸, 꾸밀 사람이 아, 아니라고 봅니다.”
“비탈리스. 묻지 않은 이야기는 하지 마라.”
키리온이 엄하게 꾸중했다. 가뜩이나 영문도 모르는 자리에 증인으로 소환된 데다 사람들마저 자신에게 적대적이니 기가 죽은 비탈리스는 움츠러들었다.
“저 신탁이 가짜라고 증언해 줄 사람이 하나 더 있소. 증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셀 위오 가문의 기요른을 데려오라.”
새틴은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깔끔하게 씻고 단장한 기요른이 걸어들어오는 중이었다.
감옥에서 지내야 했던 새틴과 달리 거짓을 자백한 이후 그는 저택으로 돌아가 휴식의 시간을 보낸 듯했다.
그렇지만 난생처음 감옥에 갇혀 보냈던 공포의 시간은 기요른의 전신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움푹하게 팬 뺨, 하얗게 질린 입술, 어느 한 곳에 고정되지 못하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
그는 반쯤 넋이 나간 사람으로 보였다.
새틴은 그를 노려보았다. 기요른은 슬그머니 새틴의 눈길을 외면했다.
“기요른 셀 위오. 너는 새틴과 공모해서 신탁을 조작해 비탈리스 대주교를 법황으로 세우려고 했다. 인정하는가?”
추기경이 해야 할 질문을 키리온이 대신했다.
기요른은 무릎에 올린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드는 감각이 아릿했다.
‘기요른. 네가 죄를 자백하고 성물을 반환하는 성의를 보이면 네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예하께서 공언하셨다.’
‘……새틴은요?’
‘이 와중에 새틴은 무슨 새틴이냐. 델 마레는 델 마레 알아서 스스로 살길을 찾아가겠지. 이건 너 한 사람의 위험이 아냐. 너는 셀 위오 가문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 거야! 너 때문에 대체 이게 무슨 재앙이냐? 얀 실럿 가와 콴 테온 가는 진작부터 키리온 예하를 따르기로 마음먹었고, 카 딜론 가는 가장 오래, 제일 깊은 친분을 다져놓았는데 우리 집안은 이대로 망하게 생겼어!’
부모님의 압박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기요른은 어쩔 수 없이 거짓 반역을 시인했고 부모님은 성물을 보내어 그를 구명했다.
감옥에서의 해방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그는 모든 잡념을 지우고 회복에만 열중했다.
똑같은 회유를 받은 새틴이 끝까지 버텼다는 사실은 뒤늦게야 알았다.
새틴의 재판이 열리는 재판소로 들어오면서 기요른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추기경이 대답을 채근했다.
“질문에 대답하십시오. 정말로 역심을 품고 새틴 양과 함께 거짓 신탁을 만들었습니까?”
새틴. 기요른은 마음으로 새틴의 이름을 불렀다.
새틴은 꿇어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력을 엄청나게 소모한 듯했다.
단시간에 사람이 저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새틴의 몰골은 엉망진창이었다.
죄책감이 일었다. 기요른은 입을 벙긋거렸다.
미안. 새틴. 미안해. 진짜 미안해.
“네,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지만 재판소의 특수한 구조로 인해 충분히 또렷하게 들렸다.
키리온이 지그시 웃었다.
“공범이 자백했는데 더 할 말이 있나?”
새틴은 기요른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실망할 마음도, 원망할 마음도 사라졌다.
우스운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 새틴은 생각했다.
역시, 이 남자와 결혼하지 않기를 잘했다. 이런 남자와 인생을 함께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다.
극도의 피로에도 정신은 다분히 선명했다.
“저는 여전히 가짜 신탁이라고 나온 저 신탁이 진짜고, 예하께서 받았다는 신탁은 거짓이라고 믿습니다.”
“새틴!”
쿵, 딸의 결말을 예감한 어머니가 의자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반쯤 실신했다.
새틴은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의 고함을 들었다.
콘첸트 추기경은 복잡한 눈빛으로 새틴을 응시하다가 마지막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사제들에게 손짓했다.
“과거에 머리글자가 겹치면서 신탁 하나만으로는 적법한 후계자를 가리기 어려웠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법황은 성물을 모아 자식들에게 검의 손잡이를 쥐게 했지요. 우리의 기록에는 검이 후계자를 가려냈다는 대목이 실려 있었습니다.”
추기경은 나름대로 이 재판의 의혹을 최대한 걷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새틴도 같은 이야기를 루블리에로부터 들은 기억이 났다.
‘몇 대 전엔가, 신탁으로 후계자를 가리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는데 파수꾼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던 성물들을 모아 만져보게 했더니, 누가 정당한 후계자인지 가릴 수 있게 됐다고.’
“이 기록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오늘 파수꾼 가문들이 성물을 가져왔습니다. 비록 델 마레의 성물은 비었지만, 남은 네 개의 성물은 여기 모였으니 두 분께서 한 번씩 만져보십시오.”
더불어 새틴은 키리온이 카 딜론 가문의 성물을 쥐고 받았다는 계시도 떠올렸다.
‘검이 불러요? 착각 아니에요? 거짓말이거나.’
‘그때 키리온의 표정을 네가 봤다면 거짓말이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을걸.’
혹시 그때는 키리온이 법황의 재목이라 인정받았고, 세월이 흐른 지금은 신탁이 바뀐 만큼 비탈리스에게 계시가 내려오지 않을까.
새틴은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
이내 마지막 조각을 제외하고 검의 형태로 놓아 맞춰진 성물이 등장했다. 성물은 먼저 비탈리스에게 주어졌다. 비탈리스는 조심조심 성물을 더듬었다.
추기경이 질문했다.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까?”
새틴은 비탈리스를 주시했다. 비탈리스는 당황하면서 검을 이리 만지고 저리 만졌다.
마지막으로 조각을 들고 흔들어 본 그는 끝내 머리를 가로저으며 성물을 내려놓았다.
“아, 아뇨, 아니, 아니요……. 무, 무슨 계시인지…… 모, 모르겠습니다.”
“그럼 키리온 예하께서 만져보십시오.”
키리온은 자신만만하게 일어섰다.
“나는 검이 보여주는 증좌가 어떤 것인지 아오. 이미 경험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지.”
그는 익숙하게 성물의 손잡이를 쥐었다.
“나는 열네 살부터 검의 부름을 들었소. 보시오. 검이 나에게 명하고 있소.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정당한 자리에 오르라고.”
허공을 응시하는 키리온의 얼굴에 서서히 황홀감이 번져나갔다. 루블리에는 키리온의 반응을 보면 절대 거짓일 수 없다고 단언했었다.
그 말뜻이 이해가 됐다. 지금 그는 재판을 떠나 마치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듯했다.
“예하.”
키리온은 추기경의 부름도 듣지 못했다.
“예하.”
두 번을 부르고, 추기경이 그의 팔에 손을 대서 제지를 하고 난 뒤에야 키리온은 화드득 정신을 차렸다.
“그만하셔도 좋습니다.”
추기경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키리온은 재판에 참석한 사람들의 면면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성물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손끝이 성물의 언저리를 맴돌다 아쉬워하며 떨어졌다.
“이 자리엔 부재중이나 내가 첫 계시를 들었던 당시의 증인이 바로 팔라딘이오. 더불어 카 딜론 가문이지.”
키리온은 떳떳하게 루블리에를 들먹였다. 누구보다 이른 나이에 이름을 알렸던 젊고 재능있는 팔라딘이 이 재판에 신빙성을 더했다. 그의 말이 사실임은 새틴도 이미 알고 있었다.
키리온이 노골적으로 새틴을 지목했다.
“이렇게 모든 정황이 다 나를 증명하고 있는데, 그대는 여전히 가짜 신탁을 주장하는가?”
새틴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잠시 뒤 고개를 들었을 땐 선명한 녹색 눈이 키리온을 똑바르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번 일로 원칙은 세우는 것보다 지켜가는 게 더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수꾼 가문으로서 저에게는 원칙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여전히 비탈리스 예하께서 정당한 후계자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