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법황은 눈을 떴다.
늘 안개가 낀 양 뿌옇기만 하던 머리가 어쩐 일인지 꽤 명료했다.
빨랫감처럼 축 늘어지기만 하던 사지에도 힘이 들어갔다.
항상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는데 오늘은 스스로 등에 베개를 고이고 앉을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의 생에는 그런 날이 있다고들 한다.
꺼져가는 촛불이 마지막 순간 가장 밝게 타오르듯이, 평소에는 사라졌던 기력이 갑자기 되살아나는 날.
“이리 버틸 날도 오래지 않은 모양이다.”
법황은 혼잣말을 되뇌었다. 완연한 노인의 음성이었다.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것이니 억울하진 않았다.
다만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남았다.
비탈리스의 성위 계승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는 손을 뻗어 종을 울렸다.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다급히 들어왔다.
“성하, 부르셨습니까?”
시종은 혼자 힘으로 일어나 앉은 법황을 보고 다분히 놀란 기색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탈리스를 불러와라.”
법황이 명령했다. 잠깐 머뭇거린 시종이 금방 예를 차리고 물러갔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특유의 경쾌한 걸음으로 들어오는 남자는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을 가진 법황의 장자 키리온이었다.
“성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법황은 눈살을 찌푸렸다.
“비탈리스를 불렀는데 왜 또 네가 오느냐?”
루블리에를 부르고 비탈리스를 부를 때마다 키리온은 매번 그들을 대신해 들어왔다.
키리온이 유연하게 해명했다.
“비탈리스는 성하께서 잠들어 계실 적에 여러 번 뵙고 갔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은 장자이든 차남이든 똑같았다.
비탈리스는 여러 번 아버지를 보고 갔다. 단지 키리온이 묘하게 개입해 법황이 번번이 잠들어 있었을 뿐이다.
“내가 깨어 있을 때 와야지 자꾸 잠들어 있을 때 와서 무엇하냐. 비탈리스를 지금 불러라. 팔라딘도 속히 입성하게 하라.”
하지만 법황은 물러나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루브는 동부 지방에 문제가 있어서 떠났습니다.”
“또? 그럼 비탈리스라도 들어오게 해라. 비탈리스는 있을 것 아니더냐.”
“…….”
키리온은 오늘따라 고집스러운 법황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법황은 그 시선을 맞받으려다 감정이 사라진 눈동자에 흠칫, 떨었다. 아들의 눈빛이 텅 비어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너 무슨 꿍꿍이지?”
돌아가는 형편이 영 수상했다. 시종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비탈리스를 불러오라 명령하였는데 시종은 명령을 키리온에게 전달했다.
“어디까지가 한통속인 게야?”
법황은 이제야 아차 했다. 키리온은 일찌감치 후계자로 여겨지면서 많은 권한을 부여받았다.
법황으로서 그 권한을 직접 회수하여 비탈리스에게 돌려주었어야 했는데, 노환이 깊어지면서 몸을 추스르기 힘들어 키리온에게 일임했던 결과가 이렇게 돌아왔다. 크나큰 실수였다.
“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것이냐?”
“진정하십시오, 성하.”
“신탁을 제대로 공표하기는 했냐?”
무언가 불길했다. 신탁이 제대로 공표되고 비탈리스가 국무를 제대로 책임지고 있다면, 키리온이 자꾸 말을 돌릴 까닭이 없었다.
비탈리스와 루블리에를 불러들이라 요청한 지가 언젠데 그들이 여전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이유가 누구에게 있겠는가.
“내가 너를 지나치게 신임했구나…….”
키리온이 언제부터 어디까지 자신을 속여왔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거긴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야!”
법황이 있는 기력을 모조리 짜내어 소리쳤다. 그래봤자 허약한 몸이 빚어내는 목소리에는 한계가 깊었다.
키리온은 천천히 표정을 지웠다.
새틴과 기요른을 반역 혐의로 잡아들이고서 그는 딜라일라와 재판을 논의했다. 증인과 증언, 모아둔 정보가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완벽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무엇이 완벽하지 않은가, 했더니 성물이 아직 그를 적대시하는 가문의 수중에 있었다.
‘성물. 성물을 받아와야 해.’
‘성물이요? 그게 중요한가요?’
‘당연히 중요하지. 그것이 칼데브란카 전설의 증거 아니오? 게다가 재판이 코앞이오. 좀 더 완벽한 증거가 있었으면 좋겠군. 재판에 참석할 사람들이 모두 다 내 사람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소. 증거가 필요해. 저들을 꼼짝 못 하게 만들 그런 증거 말이오.’
키리온의 안달에 딜라일라가 곰곰이 고민에 잠겼다.
‘예하. 역모 혐의를 받고 있던 기요른님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 어떨까요?’
키리온은 흡족하게 미소했다.
기요른을 회유하기는 쉬웠다. 셀 위오 가문은 죄를 자백하고 성물을 바치면 아들을 살려주겠다는 키리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증언을 확보하고 받아내야 할 물건도 받아냈다. 한데 죽은 사람처럼 잠들어 있던 법황이 깨어나 그의 앞날에 초를 치려 하고 있었다.
키리온이 조소했다.
“이 정도 했으면 제 자리여야 합니다. 아니었어도, 제 자리가 되어야 하고요.”
“키리온. 네가 어찌 이런단 말이야! 정녕 내 아들이 맞기는 한 것이냐!”
“무슨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내가 달리 누구이겠습니까.”
키리온은 제 얼굴을 법황에게 가까이 들이댔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간격을 두고 시선이 마주쳤다.
법황은 경악에 젖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입을 억지로 벌렸지만 소리는 새어 나오지 않았다.
이내 노인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뒤로 쓰러졌다.
안색이 검푸르게 변해갔다. 키리온은 곁의 베개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세간에도 법황은 병세로 오늘내일이 위태롭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미 숨이 끊겨가고 있는 기색이었으나 시간이 좀 더 단축되어도 좋을 것이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셀 위오 가의 성물은 수중에 넣었고 새틴의 재판은 내일이었다. 성공이 코앞인데 이까짓 일로 발목을 붙잡힐 순 없었다.
* * *
새틴은 재판소로 끌려 나왔다. 전날까지 부모님의 설득이 이어졌으나 새틴은 듣지 않았다.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인생이 하루아침에 돌변할 수도 있는 거구나.
이날에 이르러 비로소 깨달았다.
부유하고 편안하고 아름답게 살았다. 그 인생이 평생 지속될 거라 믿었다.
그런데 약혼자는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밝혔고,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남자는 저를 버리고 떠났다.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다. 하나뿐인 친구를 잃었다.
더 떨어질 바닥이 없는 줄 알았는데 심연은 끝이 없었다. 내일이 두려울 만치 매번 최악을 경신했다.
어디까지 떨어지게 될까.
어디까지 망가지게 될까.
키리온의 회유에 넘어가면 그 길이 바로 죽는 길이다, 주장하며 버티긴 했어도 감옥에 갇혀 막막한 시간을 헤집고 있자면 그저 모든 일이 악몽이었다. 아니, 악몽보다 더했다.
현실의 낮과 흉몽의 밤 중 어느 쪽이 더 끔찍한지 저울로 잴 수 없었다.
그저 이 시간을 모조리 도려내고 싶었다.
갑자기 숨이 콱 죄어드는 까닭에 느닷없이 몸부림을 치게 됐다.
사람이 이리 미쳐가는가 싶기도 했다.
새틴은 종종 넋을 잃었다.
델 마레에서 딸을 잘 봐달라며 뒷돈을 찔러주기도 했고, 또 새틴이 재판도 받기 전에 잘못될까 봐 더럭 겁을 집어먹은 간수가 훨씬 음식다운 식사를 구해와 밀어 넣기도 했으나 새틴의 입에 들어간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속에서 받질 않아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새틴은 가면 갈수록 부쩍 야위고 초췌해졌다.
“델 마레 가의 귀한 여식이라 들었는데 꼴이 말이 아니군.”
누군가 혀를 내둘렀다.
새틴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재판소의 천장은 둥글고 높았다. 소리가 잘 뻗고 우렁우렁 울리는 구조였다.
누군가 새틴을 바닥에 꿇어 앉혔다. 죄수는 가장 낮은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을 우러러보게끔 되어 있었다.
진실을 가리기 위한 재판이 아니라 죄를 강요하기 위한 재판이다.
발언의 비중 자체가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그 일례로 대신전의 사제는 새틴에게 불리한 정황을 증언하는 중이었다.
재판의 판결을 맡은 콘첸트 추기경은 일전 새틴의 결혼 주례를 섰던 사람이었다.
키리온은 일부러 콘첸트 추기경에게 이번 재판을 일임했다.
부드럽고 온건한 성향으로 명망이 높은 추기경이 새틴의 유죄를 선언해야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신의 이름을 걸고 젊은 형제님이 본 여자가 새틴 양이 맞습니까?”
지긋하게 나이를 먹은 추기경은 한때 행복한 신부였다가, 남편이 그 자리에서 바뀌었다가, 이제는 중대한 죄명을 쓰고 끌려와 있는 새틴을 안타깝게 내려다보았다.
추기경의 위치에 오르면 결혼 주례를 맡는 일은 아주 드물다.
콘첸트 추기경은 법황의 명으로 파수꾼 가문의 혼사를 주례하면서 신랑과 신부가 타고난 명예를 지키며 고귀하게 살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이혼했고, 부인은 재판소에서 다시 맞닥뜨리게 되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어 가는 속도가 너무도 빨라서 나이 든 추기경에게는 도무지 이 흐름을 따라잡을 방법이 없었다.
증인으로 불려 나온 사제는 새틴이 베르비움을 찾으러 갔다가 잠깐 대화를 나눴던 그 사람이었다.
그는 새틴의 얼굴을 흘끗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형제님은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습니까?”
“예, 그녀는 저희 신전의 사제를 찾으며 결혼을 앞두고 있기에 축원 성사를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급히 둘러댔던 변명마저 새틴의 발목을 잡았다. 새틴을 비난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이미 결혼한 사람이 왜 축원이 필요하겠어? 이혼하고 재혼할 작정이었겠지.”
“본인이 불륜에 크게 덴 경험이 있으면서 결국 자신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군그래.”
사제의 증언은 새틴이 기요른과 부정한 관계에 있었다는 스캔들을 다시금 재확인하는 발언이었다.
“그래서 새틴 양이 축원 성사를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베르비움 형제님은 일이 생겨 고향으로 떠난 상황이었기에 저는 다른 형제님을 권했습니다만 그녀는 그냥 돌아갔습니다.”
“새틴 양. 왜 다른 사제에게 축원 성사를 받지 않았습니까?”
어찌 됐든 결혼식 주례로 만난 연도 연이었다. 콘첸트 추기경은 새틴이 발언할 기회를 주었다.
그녀를 고발한 입장으로 재판에 참석한 키리온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축원 성사를 받고 싶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저는 베르비움 사제님을 다른 이유로 꼭 뵈어야 했습니다. 그분이 신탁이 위조되었다고 맨 처음 우리에게 알려준 사람이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