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 *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여태 몇 년 주기로 목격됐다던 악령들이 왜 요즘 들어 출현이 잦은지 의아합니다.”
부관은 지친 안색으로 늦은 저녁을 뜨다가 언성을 낮추어 속닥거렸다. 루블리에도 얼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수도를 벗어난 후로 악령의 소행으로 보이는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외면하기에는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기에, 목적지까지 급히 이동할 기사단을 먼저 보내고 루블리에는 부관을 비롯한 부하 몇만 추려 주변에 숨어 있을 악령들을 급히 정리한 뒤 뒤따라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추적하다 보니 그 수가 제법 여럿이었다.
본격적으로 꼬리를 밟기 시작하니 놈들도 몸을 사려야겠다고 작정했는지 이리저리 기를 쓰고 달아나는 통에 목적지와는 완전히 반대로 방향이 바뀌어버렸다.
여러 갈래로 갈라져 숨어버린 놈들을 전부 쫓아 없애느라 며칠을 허비했다. 그러고서 이제야 허기진 속을 채우러 근처의 식당에 들른 참이었다.
시간이 퍽 늦은 탓에 손님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수도에서 제법 떨어진 마을인 데다 신성 기사단의 제복은 눈에 잘 띄는 의상이라 손님들은 한두 번씩 루블리에의 일행을 힐끔거렸다.
도톰한 겨울 코트를 입은 남자 하나는 아예 대놓고 루블리에를 의식했다.
그러나 루블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부하들을 데리고 다니다 보면 흔히 겪는 일이었다.
음식을 날라오던 식당 주인이 얼핏 부관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그릇을 내려놓으며 참견했다.
“신이 노해서 그렇다는 말들을 합니다.”
부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이 노했다니요?”
“아이구, 기사 나리들께서 아주 바쁘신 분들이라 못 들으셨나 봅니다. 저희도 들은 지 얼마 안 된 얘기긴 한데, 거…… 수도에서 파수꾼 가문이 모반을 꾸미다가 적발되었담서요?”
기도 차지 않았다. 루블리에는 미간을 좁혔다.
“누가 어디서 그런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들을 퍼뜨렸지?”
식당 주인이 움찔 움츠러들었다. 방금 엄중하게 그를 꾸중한 남자는 식당에 모여 앉은 남자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말씨만 들어도 분위기가 평범하지 않았다.
“저, 제가 퍼뜨린 말은 아니고요. 사람들이 하는 소리가 그렇습니다. 나라를 수호하기로 맹세한 귀족 가문이 자기네들 입맛에 바꿔 꼭두각시 법황을 세우려다가 걸려서 하늘이 벌을 내리고 있는 거라고요.”
들을수록 황당했다. 다섯 파수꾼 가문 중 그런 역심을 품을 가문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식당 주인은 진심으로 뜬소문을 믿는 눈치였다.
성좌의 주인이 바뀔 무렵이라 여러 유언비어가 판을 친다 해도 이건 너무하다.
식당 주인에게 입을 조심하라고 경고를 할까 하다가, 루블리에는 어쩐지 소문의 정황이 제법 구체적이라 느꼈다.
“자세하게 얘기해 봐. 파수꾼 가문의 어떤 가문인가?”
“그…… 요번에 대대적으로 불륜이라 소문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식겁한 부관이 루블리에의 얼굴을 살폈다. 하필 여기서 전 부인의 이름이 올라올 게 뭐란 말인가.
“델 마레?”
“네, 그 두 사람이 범인이라던데요. 이건 절대 헛소문이 아닙니다. 벌써 법황청에서 범인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 심문을 하는 중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요즘 들어 세상에 흉흉한 일들이 많으니 진짜로 역심을 품었나 보다고…….”
루블리에는 벌떡 일어났다. 드르륵, 떠밀린 의자가 뒤로 튕겨 날아가며 쓰러졌다.
그래, 기이하게 낯이 익은 소문이다 싶었다.
‘루브, 내 얘기 좀 들어봐. 신탁에 문제가 있어.’
그는 일전에 같은 얘기를 들었다.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고, 같은 시기 더 엄청난 스캔들이 터지는 바람에 정신이 나가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으나 바로 새틴이 신탁에 대한 의혹을 털어놓았었다.
‘단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나를 믿어주면 안 될까?’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수도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건지 확인해야 했다.
그는 다급히 몸을 돌렸다. 손도 대지 않은 식사를 남겨 두고 뛰쳐나가는 루블리에의 뒤를 부관과 부하들이 따랐다.
“수장님!”
“내 말을 가지고 와. 아니야, 내가 직접 가지.”
지시를 내리다 말고 루블리에는 마구간으로 직접 가려 했다. 가만히 서서 흑마를 기다리는 시간마저 아까웠다. 가슴이 초조했다.
그때였다.
“실례합니다.”
긴장 서린 부름이 루블리에의 다리를 잡았다.
식당 안에서 연신 루블리에를 쳐다보던 남자였다. 코트 깃을 세워 여민 남자는 경계 가득한 태도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루블리에에게 다가왔다.
“저, 아까 나누시는 대화를 들었는데 신성 기사단의 수장님이라고 하셔서요.”
마음이 급한데 길을 가로막는 낯선 사람까지 나타나자 루블리에는 번거로운 낯을 숨기지 않았다.
“뭡니까.”
“신성 기사단이 근방을 지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까지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수도로 들어가기에는 제가 그쪽에 아는 사람도 없고, 겁도 나고,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도 몰라서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다가…….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남자의 서두가 길었다. 루블리에가 그를 재촉하려던 직전에서야 그는 코트 안쪽의 주머니를 뒤적뒤적 헤집었다.
“보여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남자가 조그만 물건을 꺼내 건넸다. 루블리에는 인장을 앞뒤로 살펴보다가, 거기에 새겨진 문양을 알아차리고 더욱 의문에 빠졌다.
이건 사제의 신분을 증명하는 인장이었다. 하나 남자는 사제의 옷차림이 아니었다.
“이게 어디서 나온 건가?”
“시신 안치소에 신분을 알 수 없는 남자의 시체가 하나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시신 안치소?”
“네. 변사체로 발견돼서 소지품도 하나 없어 여행 중 도적이라도 만난 줄 알았었는데, 턱이 좀 이상해서 입을 열어보니 이게 들어있더군요. 꼭 자기 신분을 지키려고 했던 것처럼 느껴져서 신경이 쓰여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체를 찾아왔던 사람이 있었어요.”
남자가 루블리에의 기색을 힐끗힐끗 곁눈질했다.
“원래 연락은 어떤 여자가 먼저 편지를 보냈는데, 실제로 온 사람은 남자였습니다.”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지?”
누구였을지 짐작하면서도 루블리에는 부러 물어보았다.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선한 인상의 남자분이요. 그분이 여자의 서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편지, 편지도 보여드릴까요?”
기요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틴이 일전에 죽은 사제를 언급한 적이 있었기에.
‘사제가 죽었어.’
루블리에는 새틴이 보낸 편지를 넘겨보았다.
인상착의와 함께 이런 시신이 발견되면 꼭 연락을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한동안 밤마다 잠을 못 이루고 몸을 뒤척이던 새틴이 떠올랐다.
‘루브, 이것만 알아줘. 신탁이 위조되었다는 증언을 하고 실종된 사제가 있어. 정말이야.’
그는 인장을 움켜쥐었다. 절로 높아지려는 언성을 간신히 억제했다.
“왜 그때 전달하지 않았나.”
이게 제때 새틴의 손에만 들어갔더라면 새틴은 분명 제게 바로 폭로했을 것이다.
저 역시도 스캔들에 눈과 귀가 흐려지지 않고서 새틴이 하는 이야기를 좀 더 귀담아들었을 것이고.
달리 증거를 못 구한 새틴이 발만 동동 구르다 속수무책으로 모함에 빠지지도 않았을 테다.
‘루브. 네 주변 사람 중 하나가 엄청나게 큰 비밀을 가지고 있다거나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다면 어떡할래?’
네 얘기가 아니었구나. 키리온의 이야기였어.
그래서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눈치만 봤었던 거였다, 그 새틴이. 부인과 친구의 줄다리기 사이에 끼어 고통받을 남편을 걱정해서.
어느 정도 윤곽이 세워져 확신을 줄 시기를 잡으려고 하다가.
남자가 허둥지둥 변명했다.
“바, 발견이 늦었습니다. 손님은 이미 떠났고요.”
“편지라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무서웠습니다.”
푹 수그린 남자의 목덜미에 공포가 어렸다.
“죽은 사람의 신분을 알게 되니 너무 무서웠습니다. 제가 감당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근처의 사제님께 전달하고 잊어버리려 했더니 사제님이 평범한 신전의 문양과 또 다르다고 부담스러워하시며 돌려주시더군요. 저도 가지고 있기가 너무 찜찜하고 겁이 나는데 사제님조차 거부하는 물건을 아무 데나 내보이기도 신경이 쓰여서……. 그래도 신성 기사단이라면 대단한 분들이니 어떻게든 해주시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대단한 분들. 남자의 호칭에 루블리에는 저 자신을 비웃었다.
어디가 대단하단 말인가. 어처구니없을 만큼 장님으로 살아온 사람이 저 아닌가.
겁이 났다는 솔직한 고백을 들으니 남자에게 더 화를 낼 마음도 사라졌다.
무서운 일이 맞았다. 남자의 행방을 파던 새틴과 기요른이 반역죄로 끌려간 결과만 보아도, 이건 무서운 일이었다.
‘……나 누가 널 보냈는지 알아. 키리온 예하께서 널 극장으로 보냈지?’
당시 오페라 극장으로 찾아갔던 건 오롯이 루블리에의 선택이었으나 돌이켜 보니 그에게 의심의 씨앗을 심은 사람은 키리온이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공연을 보러 갔다가 루블리에는 불륜으로 오해할 법한 장면을 목격했다.
그 후로 루블리에는 아주 착실하게 키리온의 의도에 따라 새틴을 버렸다. 그런 제게 새틴은 뭐라고 말했던가.
‘내가 지금 원하는 건 단 하나야. 너랑 잘 살아가고 싶어.’
‘널 사랑해.’
‘루브. 난 항상 고민하고 있어. 내가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후회할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우리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순 없잖아. 나한테 화를 내도 좋고, 델 마레에 보상을 요구해도 괜찮아. 대가는 내가 최대한 치를게. 어떻게 사과해야 네 화가 풀릴지 모르겠지만…… 어떤 방식이든 네 마음이 나아진다면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해명할 기회만 줘.’
기요른의 바람에는 망신을 각오하고서 결혼식장까지 들어가 파탄을 냈던 여자가, 자존심 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여자가 그렇게까지 애원했는데 듣지 않았다.
짐을 챙겨 신혼집을 떠나던 날에도 그녀는 배웅을 나와 차분하게 인사했다.
‘다녀와.’
다녀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도리어 새틴이 혼자 싸우고 있는 동안 치졸한 질투에 눈이 멀어 이혼장을 쓰고 있었다.
새틴은 두렵고 막막한 와중에도 그를 붙잡으려 그토록 애를 썼는데, 그녀의 심정을 전혀 알려 하지 않았다. 멍청하게도.
결국 새틴이 위험에 빠져들게끔 수수방관한 것이다. 다름 아닌 제가.
도무지 이 한심함을 돌이킬 길이 없었다.
새틴. 루블리에는 새틴의 이름을 되뇌었다.
너에게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새틴.
“충고 하나 하지. 당장 짐을 싸서 집을 떠나는 게 좋을 거다. 몸을 의탁할 곳이 있다면 그리 가고, 없으면 카 딜론 가문으로 나를 찾아오도록.”
부관이 안절부절못하며 말에 오르는 루블리에를 올려다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수장님?”
“너희는 이대로 말을 몰아 동부로 가라. 나는…….”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려 나왔다.
“……돌아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