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12)

<83화>

“가까이 좀 와 보렴. 새틴, 너 얼굴이 어쩜 이리 상했니? 맙소사,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 거야? 얘 좀 봐요. 앙상하게 말랐어요.”

좁은 창살 틈으로 손을 밀어 넣은 어머니가 새틴의 팔을 쓰다듬었다.

먹은 게 거의 없으니 마를 수밖에 없었지만, 손등과 팔목의 뼈가 제가 보기에도 유난히 도드라져 있었다.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괜찮긴. 이게 어딜 봐서 괜찮은 얼굴이야?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 아니냐?”

새틴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혈색이 조금이라도 돌아오기를 바라며 입술을 꾹꾹 눌렀다.

“얘한테 당연한 걸 묻지 말아요. 멀쩡한 사람도 병 걸려 나갈 환경인데 이렇게 위험하고 더러운 데서 새틴이 무슨 수로 버티겠어요? 우리가 새틴을 얼마나 귀하게 키웠는데……. 더는 못 두겠어요. 무슨 수를 쓰든 간에 꺼내줘야 해요!”

“그래야지.”

어머니가 새틴을 잡아당겼다. 부드러운 손이 초췌한 얼굴을 매만졌다. 새틴은 그 손에 뺨을 묻었다. 그리운 온기였다.

“그러니까 말이다, 새틴. 우리한테는 솔직하게 말해줘야 한다.”

아버지의 음성이 묵직했다. 새틴은 바짝 긴장했다.

드디어 신탁에 대해 부모님께 털어놓고 조력을 구할 때가 되었다. 여태껏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데 아버지가 꺼낸 첫마디는 새틴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은 내용이었다.

“성물을 어디다 숨겼냐?”

“……네?”

“우리 델 마레가 보관하고 있던 성물 말이다. 우리 저택을 비롯해서 네가 살던 신혼집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가 않아. 분명 네가 가지고 있었으니 너는 알겠지. 어디다 뒀더냐?”

새틴은 어머니의 손에서 얼굴을 뗐다.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하지, 그럼.”

그래, 혼돈의 도가니 속에 빠져 있었을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헷갈릴 수 있었다.

이제부터 말하면 될 일이다. 새틴은 속삭임에 가깝게 목소리를 낮췄다.

“어머니, 아버지. 지금 모두가 아는 신탁은 거짓말이에요. 진짜 신탁은 비탈리스 예하를 차기 법황으로 점지했어요. 아버지도 기억하시죠? 법황청에선 신탁 문제로 파수꾼 가문을 두 번 소집했잖아요. 진짜 신탁은 처음 부름에 이미 나와 있었어요. 그걸 숨기고 가짜 신탁을 조작해서 진짜인 양 내보인 거예요.”

오랜만에 한꺼번에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려니 앞이 핑 돌았다. 새틴은 잠시 쉬었다 말을 이었다.

“그 진위를 밝히고 싶었어요. 그래서 기요른과 만났던 거고요. 처음 신탁을 전달한 사제를 찾았는데, 시체로 발견됐어요. 신분을 밝힐 방법이 없어서 어쩌지 못하고 있던 도중에 함정에 빠졌구요. 저는 기요른과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니었는데 기요른 생각은 아니었나 봐요. 어쨌든 이게 진실이에요. 키리온 예하께서는 신탁을 조작한 대가를 치르고, 비탈리스 예하께서 정당한 법황의 자리에 오르셔야 해요.”

다시 되짚어도 심장이 쿵쿵 울렸다. 이러한 비밀이 아직까지도 수면 아래 숨겨져 있었다는 게 악몽 같았다.

새틴의 이야기를 들은 부모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놀라셨겠지만…….”

부모님을 위안하며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하려던 찰나 아버지의 음성이 어둡게 울려 퍼졌다.

“그래서?”

“그래서요? 지금 그래서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너는 우리에게 성물을 숨긴 장소만 말하면 된다.”

조작된 신탁만큼이나 믿기지 않는 반응이 돌아왔다. 새틴은 기함해 되물었다.

“어머니, 아버지. 신탁이 잘못되었는데 진실은 중요하지 않고, 이 와중에도 성물의 위치가 궁금하세요?”

“새틴, 이 고생을 해서 네가 얻은 게 뭐냐? 남편과는 이혼했고 목숨은 간당간당하게 됐지. 네 능력 밖의 일에 손을 댄 결과가 이런 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델 마레는 나라를 지켜온 파수꾼이잖아요. 가문의 시조에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셨잖아요? 신탁이 바뀌었고 수상한 움직임이 있으면 당연히 바로잡아야죠.”

집에서 배웠고 아카데미에서도 배웠다. 몸에 새겨진 원칙이었다. 그런데 부모님에게 신탁은 중요한 문제처럼 보이지 않았다. 비밀과 하등의 관계도 없다는 듯 새틴의 증언을 무시했다.

이럴 순 없었다. 화가 치미니 줄곧 시달려 온 고통도 지금은 느껴지지 않았다.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었다. 누가 듣든 말든 새틴은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귀는 사람의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 깃드는 존재라고 배웠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약해지지 않도록 원칙을 지킬 의무를 가졌다고요. 그걸 믿기에 파수꾼 가문이 이백 년이나 파수꾼으로서 존립해왔던 거고,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남들보다 더 누릴 자격이 있다고 받아들인 거예요.”

부모님은 복잡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어쩐지 기미가 이상했다. 새틴은 숨을 들이켰다.

“……왜 그러세요?”

“기요른이 인정했댄다.”

순간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새틴은 우두커니 서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멍하게 반문했다.

“뭐라고요?”

“기요른이 너와 모반을 꾸몄다고 죄를 자백했어. 잘못을 빌고 셀 위오가 갖고 있던 성물을 법황청에 반환하는 조건으로 기요른의 목숨을 건졌다더라. 셀 위오가 선수 친 거야. 지금 반역죄는 너 혼자 뒤집어쓰게 됐어.”

이제야 부모님이 다짜고짜 성물의 위치부터 물었던 연유가 이해됐다. 기막힌 배신에 갑자기 혀가 굳어버렸다. 새틴은 간신히 입을 뗐다.

“……그래서 부모님도 똑같이 거래하시기로 한 거예요? 성물을 바치고 제 목숨을 구하기로?”

“그래! 이미 셀 위오는 그렇게 했어! 우리라고 하면 안 될 게 무어냐? 예하께 성물만 가져오면 이 일을 조용히 묻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느라 오래 걸렸다.”

“하지만 옳은 일이 아니잖아요.”

“세상에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있는 법이야. 때론 모르는 척 대세에 몸을 맡기는 것도 하나의 살아가는 지혜다. 사람의 손을 떠난 흐름에 손을 대서는 안 돼. 모두가 늘 올바르게만 살아가진 않는다. 가끔은 꺾일 줄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해.”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이건 안 돼요.”

“부모에게 있어 자식의 목숨만큼 귀중한 게 뭐가 있겠니!”

어머니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뒤이어 아버지도 일갈했다.

“진실? 증거?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성물? 그까짓 거 달라면 줘야지. 백 번이라도 줘야지. 그래서 너만 살 수 있다면 뭔들 못해. 셀 위오 가문도 같은 심정으로 기요른을 살린 거다. 위증을 해서든 성물을 줘서든 일단 아들부터 구하고 보겠다고.”

“더구나 공범으로 묶인 기요른이 죄를 시인하고 잘못을 빌었는데 이제 누가 네 증언을 믿어주겠니?”

“신탁은 어쩌고요? 신탁이 비탈리스 예하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 텐데, 그걸 무시하고 잘못된 사람에게 성좌가 넘어가면 안 되잖아요.”

“누가 감히 키리온 예하를 함부로 건드린단 말이냐? 셀 위오와 우리 가문은 자식들의 목숨이 걸렸다. 나머지 세 가문은 키리온 예하께서 즉위하셔야 가문에 이득이 돼. 그러나 비탈리스 예하의 즉위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아. 그 집안들이 약속된 이득을 포기할 리 없지 않으냐.”

모두가 키리온에게 약점이나 이해관계가 하나씩 잡혀 있었다. 그만한 자신감이 뒷받침하고 있었기에 키리온은 신탁을 위조하고도 귀족들의 수긍을 얻어냈다.

“성물을 반환하면 모반죄를 용서한다고요……?”

“그래, 빨리 가져가야 널 구명할 수 있어.”

“저라면…… 제가 예하라면 절대 그렇게는 안 할 것 같아요.”

“뭐를 안 해?”

“너무 이상하잖아요. 키리온 예하의 입장에서는 제가 당장이라도 죽여 없애도 될 죄를 저지른 사람인데, 어떻게 그걸 성물과 갈음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뭐가 어떻다는 거야?”

정확하게 짚어 표현할 순 없어도 어쩐지 미심쩍었다. 가능한 한 노력했으나 새틴은 조작된 신탁을 뒤엎을 증거를 얻지 못했다.

기요른은 거짓 자백을 하고 새틴을 궁지로 몰았다. 미워 없애고 싶은 사람을 철저하게 없앨 환경을 만들어 놓고서 성물을 가져오면 이제 와서 살려주겠다고?

“그쪽에서 굳이 불필요한 거래를 걸 까닭이 없으니까요.”

암만 헤아려도 키리온의 심중이 의뭉스러웠다. 새틴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는 성물 못 넘겨요.”

“네가 살고 봐야지, 새틴!”

“저도 살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그게 제 생명줄이 되었는데 어떻게 상대의 목적도 모르는 상태로 그냥 넘겨요? 우리에게 요구하는 물건이 있을 때 그걸 쥐고 버텨봐야 해요. 성물이 있어야 제가 살아요.”

재판이 열리면 키리온을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키리온의 의도를 알아낸다면 좋겠지만 만약 실패하더라도…….

실패하더라도 그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방해할 것이다. 제 입으로 성물의 위치를 밝히는 일은 없어야 했다.

부모님의 설득에도 새틴은 굳게 마음을 정하고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죄를 인정하면서 성물을 반환하라니.

결국은 죄인이 되고 성물도 잃는 꼴이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 성물도 지키고 있는 지금 처지보다 나을 게 전혀 없었다.

“이러다 너까지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

어머니의 외침 속에서 새틴은 미묘한 뉘앙스를 읽었다. 너까지. 꼭 죽은 누군가가 있다는 뜻으로 들려왔다.

일찌감치 키리온의 손속에 죽은 사람이 하나 있긴 했다. 베르비움 사제.

그러나 부모님이 얼굴까지 일그러뜨려 가며 애통해하기엔, 그 사제는 델 마레 가와 무연한 사람이었다.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새틴은 머뭇거렸다.

“……저까지, 라니요? 누가 죽었어요?”

어머니가 대답했다.

“라리가 죽었어.”

새틴은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되묻고 있는지도 알 수 없어졌다.

“라리가…… 왜요?”

“네가 옥에 갇혀 있던 동안 널 시중들던 사람들이 끌려가 심문을 당했다. 라리는 널 가장 가까이에서 시중들었으니 제일 고생했지. 그래도 꿋꿋하게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대들었는데 그러다 덜컥 얻어맞은 게 잘못되었더라.”

아.

새틴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죽었어? 죽었다고, 라리가?

‘저는 마님께서 이왕 결혼하신 거 두 분이 잘 사셨으면 좋겠어요.’

라리의 명랑한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그녀는 새틴에게 있어 단순한 하녀 이상이었다.

그녀는 하녀였지만 누구보다 편하게 속을 털어놓는 친구이기도 했다. 늘 곁을 지켜주면서 저를 염려했던 사람이었다.

기요른의 바람에 분개하면서 우리 아가씨 잘 살아야 된다, 애면글면하던 이였다.

‘부부 사이에 이것만큼 빨리 정드는 방법도 없어요.’

가끔은 엉뚱한 짓을 벌이기도 했지만, 다 새틴을 위해서였다. 

‘어차피 마님께서 아이를 낳으면 보모는 제가 되어야 하잖아요. ……제가 마님도 돌봤는걸요. 건강하게 낳기만 하세요. 마님 아이는 제가 키워드릴 거예요.’

라리, 내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다 클 때까지 너는 나와 함께 있는 게 아니었어? 네가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지?

다리의 힘이 풀렸다. 목이 콱 조여왔다. 새틴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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