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12)

<82화>

키리온은 제 눈엣가시인 새틴과 기요른을 제거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지금쯤 셀 위오 가문도 벌컥 뒤집혔을 것이다. 이 와중에도 기요른을 그녀의 애인이라 부르는 기사의 표현에 치가 떨렸다.

그만 좀 벗어나고 싶어도 스캔들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그녀와 루블리에를 이혼시킨 힘은 여전히 굳건했다.

“우릴 잡아 오라 명령을 내린 사람이 키리온 예하시고요.”

새틴은 기사에게 쏘아붙였다. 자신들이 저지른 중죄를 도리어 이쪽에 씌워 넘겼다.

기요른과 비밀리에 만났던 장소들을 다 뒤밟아 알고 있으니 그곳에서 둘이 작당해 신탁 위조를 모의했다고 우길 테다.

피차 증거가 부족하면 힘이 실릴 쪽은 당연히 우세를 점한 키리온이었다.

신탁.

신탁에 대해서라면 저도 전할 말이 있었다.

딸을 보호하려고 뛰어들었다가 기사들에게 억류당한 부모님께 달려가려던 새틴은 다급히 마음을 돌리곤 두 다리를 억눌렀다.

당장은 저택을 점거한 기사들의 수가 상당했다. 눈과 귀가 너무 많았다. 하물며 저들은 키리온이 보낸 수하들이다.

지금 입을 섣부르게 놀렸다간 가족들마저 위험에 빠뜨리는 건 아닐까?

이 집에서 끌려나갈 사람은 저 하나로 족했다. 집에 남아 델 마레를 수습하고 제 억울함을 알아줄 가족들은 필시 안전해야 했다.

믿자. 부모님은 모든 수를 써서라도 재판 전에 새틴을 찾아올 것이다.

“난 죄를 짓지 않았으니 거리낄 게 없어요. 내 발로 갈 테니, 이 손 치워!”

그 의도를 담아 소리치고선, 새틴은 제 어깨를 억누르려는 기사단의 손을 맵차게 후려쳤다.

* * *

죄를 지은 귀족들은 저택에 구금되거나 감옥에 가두더라도 생활에 불편함이 없게끔 돌봐 준다고들 하지만, 그것도 죄의 경중에 따라 처우가 달랐다.

역모죄로 수감된 새틴은 평민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사면이 냉골인 감옥에 갇혀 누군가 버리고 간 지저분한 담요로 체온만 보존했다.

매 끼니 나오는 배식이라고는 어디서 먹다 남았는지 알 수도 없는 재료들을 한꺼번에 넣고 끓인 국물이 전부였다.

첫날 새틴은 제대로 된 음식 같지도 않은 국의 냄새를 맡고 욕지기를 일으켰다. 비위가 상해 도저히 먹으려야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귀하게 자라 음식 아까운 줄 모른다며 간수가 혀를 찼어도 새틴은 국을 단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못했다.

무얼 먹기는커녕 토하다가 하루가 다 흘렀다. 후각이 얼마나 곤두섰는지 저조차도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공중에 섞인 수십, 수백의 역한 냄새가 새틴을 괴롭혀 자꾸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참다 참다 그릇을 쥐고 토했더니 속이 빈속이라 신물만 나왔다.

한참을 구토하고 나면 진이 다 빠져 저절로 맨바닥에 드러눕게 되었다.

어질거려 잠시 앉을 기운조차 잃었다. 새틴은 옆으로 누워 등을 옹송그렸다.

정신을 차리고 싶어도 이상스러울 만치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축 늘어져 있는 게 고작이었다.

루블리에와 이혼할 즈음에도 종종 한기가 들어 시리더니만 몸살기가 다시 도졌다.

왜 이러나, 아무래도 환경이 바뀐 탓이겠지 싶으면서도 하염없이 까라지는 몸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감옥이 이런 곳인 줄 미처 몰랐던 게 다행이자 불행이었다. 알았더라면 감옥으로 끌려오기 전에 온갖 발악을 해서 키리온의 분노를 부채질했을 것이다.

그나마 설마 싶은 마음이 컸기에 실제 감옥을 대면하기 전까지 새틴은 제법 침착을 유지했었다.

하나 그 침착이 무너지기까지는 고작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나이가 제법 든 간수는 인간적으로 측은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새틴의 죄목에 경악하면서도 막상 새틴이 앓아눕자 담요를 덮고 있어도 눈감아주었다.

종일을 토하느라 기력을 잃은 새틴이 물로 입을 헹구게끔 배려해주기도 했다.

집이었으면 대단한 도움이라 생각지 못했을 간수의 행동이 은근한 특혜임을 알게 된 건 다른 죄수들 때문이었다.

죄수들은 간수가 델 마레에서 뒷돈을 받았네 어쩌네 하며 비난했다.

근처의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새틴을 향해 조롱과 모욕을 내뱉을 때마다 벽을 쿵쿵 두드려 조용히 시키는 사람도 그였다.

이곳은 새틴이 자란 세계와 전혀 다른 곳이었다. 온 세상의 어둠이 여기 다 모여 있었다. 죄수들은 새틴을 상대로 더럽고 저속한 희롱을 서슴지 않았다.

새틴은 자신에게 독방이 주어진 이유를 하루 만에 깨달았다.

다른 죄수들과 한방에 갇혔더라면 새틴은 지금쯤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 상상하기도 끔찍했다.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대다수의 죄수들은 이미 인생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는 자였다. 그런 자들에게는 델 마레의 후광이 무력했다.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외모를 갖춘 데다 허약해져 별 힘이 없는 새틴은 즐거운 먹잇감만 될 뿐이었다.

“……우욱.”

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젠 남들이 먹는 모습이나 소리만 들어도 속이 뒤엉켰다.

식사 시간만 되면 안색이 질려가는 새틴에게 간수는 식사 대신 깨끗한 물 한 잔만 갖다 주었다.

“훌륭한 집에서 자라 교육도 받을 만큼 받았을 아가씨가 어쩌다 그리 잘못된 선택을 한 거요? 그래도 겨울이라 이만치 견디는 줄 아시오. 여름에는 벌레가 아주 득실거리지. 악취도 겨울과는 비교가 안 돼. 몸이 영 안 좋아 뵈는데 여기서 약이나 치료는 기대하지 마시오. 내가 줄 수 있는 거라곤 물뿐이오.”

새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는 한 잔의 깨끗한 물도 아주 귀했다. 유일하게 삼킬 수 있는 물이라도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감옥의 창은 아주 작아 손바닥만 한 면적으로 들어오는 빛이 전부였다.

한 줌의 햇빛에 스민 색을 보면서 새틴은 아침과 저녁을 가늠하며 시간을 헤아렸다.

그러나 새틴이 지내는 대부분의 공간은 시간과 상관없이 대체로 어두컴컴했다. 그림자에 잠겨 누워있노라면 제 인생의 시계가 멎은 듯했다.

머리를 텅 비우고 쉬어야 아픈 몸이 좀 나아질 것도 같은데 도무지 생각들이 떠나지 않으니 이 또한 곤욕이었다.

새틴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찬 바닥에 기댔다.

지금쯤 부모님은 뭘 하고 계실까? 라리는 많이 다치지 않았을까? 기요른은 어느 감옥에 갇혀 있지? 뭘 해야 하며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나는 어찌 되나.

새틴은 광막한 공포를 삼켰다.

누명을 씌워 저를 붙잡아왔으면 한 번쯤 와 볼 만도 한데 키리온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재판이 언제 열릴지는 더더욱 불투명했다. 제거할 작정으로 끌고 왔으니 시간을 오래 허비하고 싶지 않을 텐데, 침묵의 의도가 의문스러워 더 겁이 났다.

“겁내지 마.”

새틴은 자꾸만 약해지려는 마음을 추슬렀다. 두 가문에서 최선을 다해 자식들을 방어하고 있는 거겠지. 무소식은 오히려 희소식일 테다.

“난 잘 버틸 수 있어.”

대화를 나눌 사람이 달리 없기에 새틴은 혼잣말로 스스로를 격려했다.

“버티기는 뭘 버텨. 어차피 죽을 목숨이면 그냥 간수한테 말해서 이리로 건너오지 그래?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기는 심심하잖아.”

저편에서 죄수들이 키들키들 웃어댔다. 공기가 가라앉는 밤은 옷자락의 서걱거림마저도 선명하게 울릴 정도로 소리가 멀리 뻗어가곤 했다.

“아, 아깝다. 창살 하나만 넘어가면 되는데 말이야.”

“귀족 여자, 그것도 델 마레의 외동딸을 두고 침만 삼키고 있어야 한다니.”

“귀족이라 그런지 확실히 태가 다르긴 달라.”

새틴은 귀를 틀어막았다. 한번 발동이 걸린 음담패설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간수가 구정물을 끼얹거나 끼니를 뺏어 벌을 줘도 효과는 짧았다. 차라리 제 귀를 막아 듣지 않는 쪽이 속 편했다.

기요른은 무사하겠지?

사람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걱정이었다. 저는 여자라 최악의 불상사를 피해 다행히 독방이 주어졌지만, 같은 행운이 기요른에게도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기요른은 집요한 괴롭힘을 버텨낼 성격이 못되었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남자와 같은 죄목을 덮어쓰고 각기 찢어져 갇혀 있으려니 암담했다. 불안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문뜩문뜩 새틴을 물어뜯었다.

그때마다 새틴은 담요를 움켜쥐고 가빠오는 호흡을 다스려야만 했다.

어느 날은 문득 꿈을 꾸었다.

훌륭한 신분으로 좋은 집에 태어나 자란 까닭에 행복했던 시절이 길어 꿈도 깊었다.

‘새틴, 너는 파수꾼 집안에서 태어났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니?’

어린 새틴을 앉혀 놓고 이어지던 부모님의 훈육도 이렇게 다시 보니 즐거웠다.

델 마레를 이어받을 고귀한 귀족으로, 일찌감치 결혼할 남자도 정해진 덕분에 사람을 두고 재고 따지며 계산할 궁리도 덜었다. 마치 그린 듯한 인생이었다.

인생의 풍파라고는 정혼자가 결혼식 직전에 느닷없이 바람이 난 정도였다. 물론 충격적인 사태였으나 새틴은 극복했다. 기요른은 새틴의 인생 근본을 흔들진 못했다.

‘새틴 델 마레.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인생을 흔들었던 다른 사람이 있어서.

‘난 너와 결혼한 걸 후회해.’

그러나 그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순간에 새틴을 비웃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남자 역시 같은 사람이었다.

새틴은 눈을 떴다. 새벽빛으로 검푸르게 물든 감옥의 벽이 보였다. 이게 현실이었다. 꿈과 현실의 괴리가 아득했다.

입을 벌렸다. 목소리가 짧게 새어 나왔다.

“……아.”

무얼 기대해서 얘기도 들어주지 않는 남자에게 자존심도 버리고 그렇게 매달렸던 거니.

결국 이런 감옥에 갇히게 될 것도 모르고. 그는 키리온의 사람인데.

어리석었던 과거의 저를 조소하며 새틴은 야윈 팔뚝에 뺨을 묻었다.

부모님은 어느 날 한밤중에 조용히 나타났다. 천으로 겉을 감싸 밝기를 줄인 등이 조심스럽게 새틴의 얼굴을 비췄다.

선잠에서 어슴푸레 깨어난 새틴은 이내 달빛이겠거니, 고개를 돌리고는 더 굳게 눈을 감았다.

“새틴.”

물기 젖은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새틴, 깨어있니?”

새틴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어떻게…… 어떻게 오셨어요?”

“어떻게 오기는. 네가 고생하고 있는데 반드시 와야지.”

어머니가 울먹였다. 아버지가 간수에게 몰래 자그마한 주머니를 건넸다.

뒷돈이 오가는 광경을 목격하고도 새틴은 담담했다. 다른 죄수들의 의혹에는 역시 원인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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