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12)

<81화> 

* * *

루블리에와 새틴의 이혼 소식에 가장 크게 쾌재를 부른 사람은 키리온과 딜라일라였다.

근래 최고로 유명했던 결혼이 파탄으로 치닫자마자 그들은 침실의 문을 닫아걸고 교활한 머리를 맞댔다.

딜라일라가 확연하게 안도한 기미를 풍겼다.

“드디어 이혼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됐네요.”

“그래, 큰 산을 하나 지나갔군. 하지만 웬만한 죄목 가지고는 기세등등한 파수꾼 가문을 건드리긴 어려울 거요.”

사제가 세상에서 사라졌으니 키리온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새틴과 기요른, 그 둘만 남았다.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불륜의 정황을 엮은 끝에 스캔들을 터뜨렸기는 했으나 그건 개인의 망신에서 그칠 뿐 일신상의 위협이 되기는 다소 부족했다.

“예하께서는 어떻게 하고 싶으신가요?”

딜라일라가 물었다. 키리온은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들은 사제에게 신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뒤를 캐어 나를 위험에 빠뜨리려 했지. 그렇다면 나도 똑같이 돌려줘야 하지 않겠소?”

신탁의 비밀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적으면 적을수록 안전했다. 특히나 새틴과 기요른은 키리온이 숨긴 진실을 알아내려 기를 쓴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사라져줘야만 했다. 딜라일라는 키리온이 에둘러 내비친 속내를 눈치챘다.

“물론이죠.”

그러나 델 마레와 셀 위오는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어떻게든 기회를 보아 몰래 손을 쓰면 당장 목숨을 해칠 수야 있겠지만, 자식들의 공교롭지 않은 죽음은 두 가문의 지나친 추측과 간섭을 불러일으킬 터였다.

그럴 바에야 오히려 이쪽에서 위중한 죄를 덮어씌워 정당하게 처결하는 편이 나았다.

키리온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파수꾼 가문에서 저지를 중죄라…….”

문제는 죄목이 마땅치 않다는 점에 있었다.

“파수꾼 가문은 칼데브란카가 건국되던 초기부터 성물을 하나씩 나누어 받고 국가를 수호하는 책무를 띤 가문이죠. 그렇기에 남들보다 더한 권세와 부귀를 누렸어도 용납됐고요.”

키리온을 따라 오래된 원칙을 읊던 딜라일라가 번뜩 머리를 기울였다. 키리온 또한 딜라일라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 책무를 저버리면 더할 나위 없이 큰 죄가 되지.”

역모. 파수꾼 가문에선 절대로 나와선 안 될 중죄였다. 도리어 파수꾼 가문이기에 더더욱 용서받지 못할 중죄 아닌가.

다만 그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키리온은 얼마간 고민하다가 입매를 끌어당겼다.

“때마침 우리에겐 처치 곤란한 물건이 하나 있었지 않나.”

키리온의 침대 바닥 안에는 베르비움 사제가 가져온 진짜 신탁이 아무도 모르게 숨겨져 있었다.

누군가의 눈에 띌까 불안해 함부로 버리지도 못하고 꽁꽁 감싸 넣어 둔, 비탈리스의 머리글자가 적힌 골칫덩이 돌덩어리.

진짜 신탁을 가짜라고 속여 증거물로 내놓는 것이다. 키리온의 제안에 딜라일라가 반갑게 동의했다.

“신탁도 없애고 증거도 만들고. 일석이조네요. 음, 혹시 이 신탁을 보고 예하의 신탁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겠죠?”

진짜 신탁이 가짜가 되고 가짜 신탁이 진짜가 되었으니 다소간의 위험부담이 따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딜라일라는 말끝에서 약간의 염려를 내비쳤다.

한데 일순 키리온이 성을 냈다.

“내 신탁 또한 ‘진짜’요.”

황급히 그의 기색을 파악한 딜라일라가 부드럽게 수습했다.

“물론이에요. 예하의 신탁도 진짜예요. 죄송해요, 제가 실언을 했어요.”

“좋소. 그럼 그들이 역모를 꾸밀 동기만 나오면 되겠군.”

“……동기.”

그건 진작 세간에 적절한 핑계가 나와 있지 않던가.

“아마 기요른님은 예하께 감정이 좋지 않으실 거예요.”

“나에게?”

“제가 그를 버리고 예하를 택했으니까요.”

“하지만 기요른은 새틴과 스캔들이 터지지 않았소?”

어느새 키리온의 입에선 기요른과 새틴을 칭하는 호칭도 반말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와 예하를 향한 앙심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상상해 보세요. 그쪽에선 우리가 추락하고 자신들이 잘 되길 바랄 거예요. 그러나 현실을 보면 자신의 소망과 다르게 흘러가지요. 예하께서는 승승장구하여 성좌에 오를 것이고, 이미 예하의 곁에는 다른 세 가문이 발 빠르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대세를 좇은 라이벌에 비해 굼뜨게 움직인 셀 위오와 델 마레는 뒤처지게 생겼고요.”

“하긴. 그대 때문에 가문 간의 정략결혼까지 망친 남자 아닌가. 뜻밖의 무모함이 있긴 해. 어리석기도 하지.”

키리온의 반응에 딜라일라는 계속해서 극본을 진행시켰다.

“불안하겠죠. 그럼 유혹에 빠질 거예요. 키리온 예하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하여 비탈리스 예하를 법황으로 세우고 꼭두각시로 써먹기 좋은 법황을 자신들이 좌지우지한다면……?”

“그런 엄청난 계획이 가능하겠나?”

“그래서 어느 정도 준비는 했어도 완벽한 실행까지는 안 된 거죠. 실제로 옮기기엔 역시 터무니없는 부분이 존재하긴 하니까요. 다만 예하의 권위가 막강해서 불가능한 시도가 되었다 하더라도, 위조한 신탁이 등장한 것 자체로 파수꾼 가문의 긍지를 잃은 거예요. 역심을 품은 거니까요.”

“새틴은 기요른과 사랑에 빠졌으니 협력했다고 하면 되겠군.”

“사랑과 복수심에 눈먼 젊은 사람들이 혈기에 저지른 잘못이라도, 법황을 지켜야 하는 파수꾼 가문에서 법황에 반하는 마음을 가진 셈이죠. 기요른님이야 집안의 막내라 세력이 약하다 쳐도 새틴님은 다음 대 델 마레의 가주예요. 그런 가문을 사람들이 과연 신용할까요?”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에 꼭 들었다. 키리온은 등을 등받이에 느긋하게 묻었다.

“멋진데. 단지 사람들이 다들 믿을지가 관건이겠소.”

“저를 보셔요. 또 우리가 만든 스캔들을 보셔요. 어차피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진실이 아니라 자극적인 가십이에요. 단서만 던져주면 사람들은 그게 진짜이기를 바라서 나름대로 상상력을 덧붙이죠.”

딜라일라는 눈을 내리깔고 소곤거렸다.

“사람들은 파수꾼 가문을 경외하면서도 한편으론 질투하니까요. 그만한 가문의 몰락을 지켜볼 기회를 놓치려고 하진 않을 테지요.”

“소문을 더 교묘하게 손봐서 뿌려 놓아야겠소. 그러나 어쨌든 시일이 흐르면 흐를수록 의심을 품는 사람이 나오기는 할 거요. 오래 끌면 누군가 눈치채는 건 시간문제지. 모두가 혹해 허둥지둥할 때, 속전속결로 끝내야만 해.”

키리온의 마무리에 딜라일라도 의견을 보탰다.

“소문은 천천히 퍼뜨려야 해요. 사람들에게 미리 듣고 판단할 시간을 주면 안 되니까요.”

그는 다시금 강조했다.

“우린 돌아갈 곳이 없소. 반드시 성공해야 하오.”

성공해야 한다. 성공할 것이다. 이루어내리라. 같은 다짐을 몇 번이나 반복해도 모자랐다.

“당연한 말씀을요. 참! 예하, 먼저 팔라딘을 수도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으시는 걸 잊지 마셔요. 이혼해서 제정신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전 부인에 대한 소식이 돌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요.”

“그건 하나도 어렵지 않소. 내일 당장이라도 임무를 지워 내보내면 그만이오.”

키리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입가를 끌어올린 채로 한동안 가만히 있던 그가 나직한 음성으로 되뇌었다.

“조금만 지나면 손에 넣을 수 있겠군.”

얼핏 스쳐 들은 딜라일라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

“성좌를요? 그건 벌써 예하의 손에 들어온걸요?”

키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 * *

고래고래 터지는 고함과 울음으로 델 마레 저택은 온통 아비규환이었다.

딸을 잡아가러 온 신성 기사단을 부모님이 막아섰으나, 명령권자가 키리온이었다. 저항은 무의미했다.

영문을 모르는 사용인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라리가 허둥지둥 달려 나와 새틴을 연행하는 기사들을 온몸으로 붙들고 매달렸다.

“역모요? 우리 아가씨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증거는 진작 법황청에서 확보했소.”

“증거라니요? 아가씨가 역모를 꾸민 적이 없는데 무슨 증거가 있어요?”

“그건 재판에서 확인하시오.”

따박따박 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라리가 도통 물러서지를 않자 남자들은 라리를 거세게 걷어찼다.

파수꾼 가문의 외동딸을 끌고 가는 마당에 일개 하녀의 안위 따위를 보장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라리가 주르륵 떠밀렸다.

“악!”

“라리!”

새틴이 새된 비명을 터뜨렸다.

“일개 평민이었다면 역모가 확인된 순간 즉결처형이오. 그래도 칼데브란카를 지켜 온 파수꾼 가문이기에 재판이나마 받을 수 있는 걸 행운으로 여겨야 할 것이오.”

한 기사가 새틴을 향해 을러댔다. 그들은 새틴을 죄인 취급하며 공대하지도 않았다.

처벌이 정해져 있는 혐의를 씌워놓고 선심 쓰는 척 재판이라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새틴은 남자들이 입고 있는 기사단 제복을 노려보았다. 같은 제복을 입고서 기사단을 통솔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의 전남편이었다.

물론 루블리에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는 절반의 기사단을 이끌고 막 동부 지방으로 떠났다고 들었다.

기사들은 그녀가 자신들의 수장의 전 부인이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 듯 행동했다.

아니다. 루블리에가 불행하게 이혼했기에 그녀에 대한 사감은 더욱 나쁠 수밖에 없었다.

루블리에는 이 사태를 알고 있을까.

키리온은 그를 유달리 신임했다. 루블리에 역시 키리온에게 깊은 충성을 바쳤다.

키리온을 통해 미리 귀띔을 들었대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싶다가도, 그가 이 어지러운 시기에 수도를 비운 점으로 미루어 보아 몰랐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똑바로 생각하고 있기는 한 건가.

누구보다도 혼란스러운 사람이 바로 저였다. 새틴은 일말의 기대감을 지웠다.

알았든 몰랐든 무슨 소용인가.

그는 수도에 없고, 그의 부하들은 자신을 잡으러 왔는데.

“새틴, 너 아니지? 네가 그런 짓을 하진 않았지?”

“아니에요! 제가 무엇 때문에 그러겠어요?”

새틴은 반발하다 말고 이를 악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겠냐는 제 호소는 반쯤 힘을 잃었다. 반면 무엇 때문에 이 지경까지 몰렸는지는 자명했다.

제게 없던 죄도 만들어 씌우고 싶어 할 사람이 너무도 확실한데, 무얼 의심하겠는가.

“이 신탁 조작 혐의를 받은 사람, 또 누가 있죠?”

“기요른 셀 위오. 당신의 애인도 같은 반역자로 붙잡혔소.”

새틴의 예상은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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