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12)

<80화>

9. 두 개의 신탁

사용인들이 마차에 차곡차곡 짐을 실었다. 새틴은 느린 걸음으로 집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켜켜이 아로새긴 기억이 의외로 많았다.

장기 출장으로 혼자 남은 집에서 자유롭게 활개치다, 돌아온 루블리에를 피해 숨바꼭질을 했던 어느 여름.

약속대로 이혼할 날짜가 되었다고 이혼장을 들이밀자 능글맞게 기한을 유예하던 그의 모습.

바짝 다가오던 얼굴과 스친 코끝의 촉각이 되살아났다.

‘스킨십이 안 되잖아요?’

‘어디, 정말 불가능한지 한번 시도해 볼까?’

그랬었지.

오묘하게 빠져들던 검푸른 눈과 저를 내려다보던 그림자 낀 이목구비에 숨도 쉬지 못했던 밤이 있었다.

‘너에게 닿고 싶고 만지고 싶어. 남편이 부인을 바라는 게, 내가 내 부인을 원하는 게 이상한 건가? 나쁘다고 생각해?’

그 기억이 있던 새틴의 침실은 악령이 불타면서 망가졌다. 두 번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으나 악령이 가져온 행복한 변화도 있었다.

그날을 계기로 루블리에와의 관계가 급물살을 탔다. 부부가 한 침실을 쓰게 되면서 새틴의 침실은 빈방으로 복구되었다.

들뜬 라리가 육아실로 꾸미자고 조르던 일이 여전히 선명했다.

“마님, 아니…… 아가씨. 큰 짐은 다 챙겼어요.”

라리가 새틴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 신기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고작 입고 쓰던 물건들을 뺐을 뿐인데, 언제 복작복작 살았냐는 듯이 생활감이 싹 사라졌다.

꿈을 꾸다 깨어난 기분이었다. 바로 어제조차 흐릿했다. 현실이 낯설었다.

막 결혼해서 독립했을 때에는 아가씨에서 마님이 된 저 자신이 생경했는데, 이제는 다시 아가씨로 돌아갈 제가 어색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적응하게 될 터다.

차라리 그날이 빨리 왔으면 싶으면서도 어떻게든 현실에 적응해갈 제 미래가 두렵기도 했다.

가능하다면 기억을 지우고 싶었다.

돌이켜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행복했던 시절이어서, 과거가 불쑥불쑥 떠오를까 봐 무서웠다.

살아가다가 추억이 느닷없이 가슴을 치면 어떡하지?

이미 그때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데.

그렇게 되어버렸는데.

“아가씨, 귀중품들은 직접 챙기겠다고 하셨잖아요. 다 챙기셨어요?”

“……아직. 짐마차는 먼저 출발시켜.”

새틴은 차분하게 지시했다.

“아가씨는요? 같이 가셔야지요.”

“난 좀 이따 갈게. 잠깐만 혼자 있고 싶어. 두 시간 뒤에 데리러 와.”

“두 시간이요? 하면 제가 여기 같이 남을게요.”

“됐어. 겨우 한두 시간 혼자 있는다고 나 어떻게 안 돼.”

복잡한 기색으로 새틴을 살피던 라리가 어쩔 수 없이 몸을 물렸다.

“여기 계실 거죠?”

“당연하지. 내가 어딜 가겠어?”

라리를 안심시키려고 새틴은 엷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집안이 집안이기도 했고 시중의 스캔들이 원체 크기도 했거니와, 새틴과 루블리에 양측이 동의한다고 작성한 이혼장이어서 그런지 이혼 허가는 가타부타 끌지 않고 빠르게 떨어졌다.

“셀 위오 가는 진짜…….”

라리가 욕 대신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새틴은 표정을 싹 지웠다.

기요른에 대해서는 이름도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 집안의 밑바닥을 볼 만큼 본 까닭이었다.

스캔들이 터진 뒤 델 마레에서 수습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 데에는 셀 위오의 침묵이 큰 역할을 했다.

그 집안에서 새틴을 위해 해명을 도와줄 리 없었다. 도리어 기요른은 새틴의 평판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를, 그래서 비슷한 처지를 상기시키며 다시금 인연을 댈 수 있기를 기대할 인사였다.

“누가 뭐라 하든 아가씨는 델 마레예요. 근심하지 마세요.”

참 우스운 일이다. 한쪽에서는 새틴과 기요른의 부정을 의심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이혼하고 돌아온 새틴과 만나보고 싶다는 초청장이 줄을 서고 있다고 했다.

오히려 예전에는 델 마레의 후광이 두려워 입도 대지 못하던 가문들까지 새틴과 인연을 잇고 싶다고 슬금슬금 요청했다.

“물론이지. 나 델 마레야. 내가 근심을 왜 해. 난 아주 잘 살 거야.”

“그래요. 이제야 우리 아가씨다우시네요.”

“나? 내가 어땠는데?”

“마음이 강하시잖아요. 대범하시고요.”

글쎄. 침착하게 인장을 찍던 모습이 라리에게는 강해 보였던 걸까.

사실 새틴은 루블리에가 떠난 날부터 기억이 몽롱했다. 한꺼번에 많은 일을 겪었더니 방어기제라도 작동한 모양이었다.

매일 죄다 저를 쳐다보고 있어 함부로 울기도 힘든 입장이었다. 대신 라리가 온종일을 훌쩍거렸다.

“맞아. 난 괜찮아.”

허세를 앞세워 걱정이 많은 라리를 먼저 내보내고서, 새틴은 텅 빈 집을 가로질렀다.

카 딜론 가문의 사용인들은 이혼이 결정되던 날 일찌감치 집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새틴과 델 마레 사람들이 나간 뒤에 돌아와 이 집을 정리할 것이다.

거의 모든 짐은 짐마차에 실렸다. 새틴이 남의 손에 함부로 맡기지 못하는 귀중품은 단 하나 남아 있었다.

새틴은 금고를 열고 그 안의 성물을 꺼내 조심스레 품에 감췄다.

다섯 가문 중 세 가문은 확실하게 키리온의 편에 섰다. 남은 가문은 이렇다 할 태세를 취하지 않은 셀 위오와 델 마레 뿐이었다.

하나 자식들끼리 얽히고설킨 악연이 깊으니 두 가문의 연합은 불가능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델 마레만은 넘어가선 안 돼.”

새틴은 각오를 다졌다.

키리온이 어떤 식으로 보복하려 들지 짐작하기 힘든 지금, 새틴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뿐이었다.

* * *

루블리에는 날카로운 걸음으로 키리온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이혼을 겪고서 그는 기사단 수련장에서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보냈다.

맨 처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 맨 마지막에 문을 닫고 나왔다.

왜 그러는지 모두가 알았지만, 모두가 모르는 척을 했다. 그의 앞에서 이혼을 입에 담을 용기를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몸이 힘들어야 잡다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루블리에는 하루를 최대한 바쁘게 살았다.

엊그제는 신혼집을 정리하러 들어갔던 사용인들이 저들끼리 수군대는 이야기를 들었다.

집을 비우던 날 새틴은 뒷정리까지 싹 끝내놨다고 했다. 은색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바닥에 떨어져 있지 않았노라고.

덕택에 품이 덜 들어 편하게 돌아왔다는, 아주 잡스럽기 그지없는 한담이었다.

고작 몇 마디에 불과한 그 이야기를 루블리에는 기척까지 죽인 채로 엿들었다.

이성을 차려보니 왜 듣고 있었는지도 모르게 거기 그러고 있었다.

델 마레 본가로 돌아간 새틴은 두문불출했다.

소식이 들리면 미치지 않을까 싶었는데, 소식이 들리지 않아도 미칠 지경이었다. 제 속이 어떤지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다.

하필 핼쑥하던 얼굴을 마지막으로 봐서 그럴 것이다. 원하는 대로 이혼해 줬으니 잘 살겠지.

지금은 이래저래 몸을 사려야 할 시기이니 외출을 자제하고 있을 테고. 굳이 쓸데없는 상념으로 정신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루블리에는 키리온을 대면했다.

“불렀나?”

“동부에 악령들이 횡행한다는 소문이 돌아.”

“또?”

“나도 놀랍군. 나라가 혼란스러운 시기라 악령들의 출몰이 잦아지나 싶어. 하여튼 자네가 신성 기사단을 이끌고 다녀와야겠네. 좀 시일이 오래 걸리겠지만 사람들이 고통받게 둘 순 없는 일이지.”

명실상부 법황으로 임명받은 자의 명령이었다. 키리온은 머지않아 정식으로 성좌에 오를 것이다.

더불어 이 순간 너무도 반가운 명령이기도 했다. 현재는 새틴과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질 필요성이 있었다. 게다가 달리 몰두할 임무도 생겼다.

“알았어. 바로 출발하지.”

루블리에는 기꺼이 명령을 받들었다. 불을 피워 몸을 보호하는 방편은 평범한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악령을 베어 없애려면 훈련받은 자경단이나 신성 기사단의 파견이 불가피했다. 다만 동부의 작은 마을들은 자경단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다.

“부탁하네.”

키리온이 눈짓했다. 루블리에는 턱을 끄떡이려다 말고 어지럽게 서류가 쌓인 키리온의 책상을 응시했다.

키리온은 신탁을 받고서 불철주야 일에 매달렸다. 그는 성실한 지도자였다.

더구나 카 딜론 가문의 성물은 수년 전 키리온을 법황이라 지목했다. 성물은 키리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탁에 문제가 있어.’

그런데도 새틴은 왜 묘한 말을 했을까.

“루브?”

“……아.”

루블리에는 어색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머릿속을 잠식한 은발의 아름다운 얼굴을 밀어내고서, 그는 격식을 차려 인사했다.

“다녀오지.”

* * *

최근의 칼데브란카는 태풍의 눈 속에 잠겨 있었다. 어쩌다 평화로운 하루를 맞아도, 사람들은 그다음 날 어떤 소식이 전해질지 몰라 불안해했다.

“요즘 들어 웬 악령 소문이 이리도 자주 도는 거야?”

“그러게나 말이야. 그래도 키리온 예하께서 바로바로 대처를 하시더라고. 어제 신성 기사단 절반이 수도를 떠났다더군.”

“카 딜론 가문은 좋겠어. 팔라딘을 배출하고, 키리온 예하께서 신임하시니 홀로 탄탄대로를 달리게 됐지.”

“그에 비하면 델 마레와 셀 위오가 저리될 줄은 누가 알았겠나. 팔라딘께서 이혼하고서 카 딜론 가에 혼담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다던데, 아니 델 마레도 참…… 놓칠 집안이 따로 있지.”

“아이고, 여기저기서 줄 대려고 난리인 건 델 마레나 셀 위오도 마찬가지야. 물어도 준치 썩어도 생치라고, 우린 우리 먹고살 일이나 걱정해야지.”

“다들 쓸데없는 노력을 하는군. 거기 둘은 자기들끼리 결합하겠지. 그래야 살아남을 것 아닌가. 나머지 세 가문이 이미 키리온 예하의 측근으로 붙어버렸는데 그 두 집안만 입장이 애매하잖아.”

“델 마레 가는 딸만 믿다가 뒤통수 얻어맞은 격이야.”

여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 이상 가는 사건이 세간을 휩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루블리에와 새틴의 이혼 건만 해도 대단한 이슈였던 까닭이다.

그러나 폭풍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갑자기 칼데브란카의 수도가 벌컥 뒤집혔다. 법황청에서 보낸 기사단이 델 마레와 셀 위오 가에 들이닥쳤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기웃대던 사람들은 법황청이 밝힌 죄목을 듣고 얼이 빠지도록 경악했다.

파수꾼 가문인 델 마레 가의 외동딸, 새틴이 셀 위오 가의 전 약혼자인 기요른과 함께 신탁을 조작해 역모를 꾀한 혐의로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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