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12)

<79화>

“스캔들만으로는 아직 부족했나 보네요.”

“뭔가 더 써먹을 수단이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오. 저러다 유야무야 화해할까 봐 불안하군.”

“그럴 리가요. 찬찬히 들여다보면 분명 새로운 약점이 나올 거예요.”

음률을 섞어 흥얼흥얼 대답하며 딜라일라는 키리온의 책상 위에 대충 널브러진 잡동사니들을 하나하나 주웠다.

모두 새틴과 기요른의 동향을 파악하느라 사방팔방 수집한 물건과 보고서들이었다.

딜라일라가 상자 하나를 열어보고는 반색했다.

“어머, 이건 뭐예요? 저 주시는 건가요?”

“아, 그거. 기요른이 대극장에 두고 간 거요.”

“여성용 목걸이를요?”

“훌륭한 보석이지? 카 딜론 가에서 소유하고 있었던 보물이오.”

딜라일라는 흥분으로 눈을 빛냈다.

“아아. 무슨 유래가 있었는지 알겠네요. 그런데 이걸 왜 극장에 두고 갔을까요?”

“글쎄. 새틴 부인이 다시 돌아와서 찾아갈 줄 알았나 보오. 이걸 가지고 기요른과 다시 엮어보고 싶은데 마음에 드는 계획이 아직 안 나오는군.”

스캔들이 퍼진 이후로 새틴은 몸을 사렸다.

본인들 소문이니 본인들 귀에 들어가면서 나름대로 대처 방식을 연구했을 테고 기요른도 제 딴엔 무탈하게 돌려줄 방안을 고심하다가 극장에 남겼을 테지만, 목걸이는 결국 새틴이 회수하기 전에 키리온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을 엮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목적은 팔라딘의 불화잖아요.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건드리면 어때요?”

“어쩌려고?”

“팔라딘과 그 부인은 둘 다 좋은 집안에서 자라 자존심이 엄청 세지요.”

키리온이 턱을 움직여 재촉했다. 딜라일라는 빙그레 웃으며 속살거렸다.

“경매장에 내놓는 거예요. 카 딜론 가문에서 주로 참석하는 소규모 경매장에요.”

* * *

지올리는 고위 귀족들 상대로 쉽게 구할 수 없는 보물이나 예술품들을 내놓고 비공개 경매를 진행하는 경매소였다.

초청장을 받은 극소수의 사람만 참석 가능하며 경매에 오르는 물건들도 비밀리에 공수된다.

물건의 내력은 기밀로 묻고 오로지 희소성과 값어치만을 따지기에, 도난당한 명화라던가 명장의 악기를 비롯해 저주받았다는 악명이 짜한 보물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 경매소에서 물건을 낙찰받더라도 언제 터질지 모를 불필요한 분쟁을 피하기 위해 다들 입을 다물고 수집한 물건은 수년, 수십 년씩 숨겨 보관했다.

오늘 경매에 참석한 가장 유명한 가문은 카 딜론 가였다. 열 명 남짓의 참석자들이 검은 벨벳을 깐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멀찍이 둘러앉았다.

지올리 경매소 설립자의 손자이자 경매사인 막심은 낙찰봉을 고쳐 쥐었다.

경매는 두 시간째 진행 중이었다. 검은 벨벳 위로는 한 천재 연주가가 마지막까지 소유하고 있었던 바이올린, 법황청에 진상된 그림과 한 벌로 만들어진 명화, 백 년 전 작곡가의 서명이 남은 초안 악보 등등이 차례차례 올라 대단한 가격에 낙찰되었다.

하나하나 귀하게 선별한 경매품들이었다. 그러나 어딜 가든 불평분자들은 있게 마련이다.

“오늘 지올리는 퍽 시시하군.”

물건을 하나도 낙찰받지 못한 귀족이 투덜거렸다. 매대에 오른 대부분의 경매품들은 오늘의 큰손인 카 딜론 가에서 쓸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카 딜론 가 상대로 감히 불만을 표할 순 없으니 애먼 경매소만 눈총을 받을 뿐이었다.

막심은 어수선한 불평들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 지금까지 보신 물건들이 조금 시시하셨다면, 저희가 마지막으로 선보여 드릴 보물을 기대해 주십시오. 저희 지올리의 이름을 걸고 준비한 상품이 있습니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웅성거리던 귀족들이 모두 입을 닫았다. 경매소의 고용인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상자의 크기가 작은 것으로 보아 보석류라는 정도만 가늠됐다.

막심이 뚜껑을 열고 손님들을 향해 상품을 전시했다.

“여기를 주목해 주십시오. 여러분, 38캐럿의 다이아몬드 목걸이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다이아몬드는 어디 가서 쉽게 구하지 못하실 겁니다.”

한눈에 봐도 가치가 어마어마한 다이아몬드였다. 크기와 색상, 투명도로 따지는 품질도 최상급이거니와 세공 또한 대단히 공을 들였다.

다이아몬드의 주변에 흩뿌려진 다른 보석들도 중량이 상당했다.

“오!”

“어느 가문에서 급히 내놓은 물건인가? 저만한 크기의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있을 만한 집안이라면 칼데브란카 내에서 열 손에 꼽을 텐데.”

유명한 보석을 소유하고 있는 열 몇 곳의 이름이 바쁘게 오르내렸다. 모두들 감탄하는 가운데 단 한 사람만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바로 카 딜론 가의 가주였다.

억지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저 다이아몬드를 수 대째 소유하고 있던 집안이 카 딜론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제 집안의 보물을 못 알아볼 리 전무했다.

그의 아내는 카 딜론의 이름을 이어받을 첫째 아들에게 보석을 물려주었다.

아들은 보석을 목걸이로 다시 세공해 자신의 부인에게 선물했다.

한데 그 다이아몬드가 대체 왜 여기 나와 있는 것인가.

누군가 카 딜론 가의 가주에게 아는 척을 해 왔다.

“카 딜론 가에도 저런 다이아몬드가 몇 개 있지요?”

“이번만은 저희에게도 좀 양보해 주십시오. 카 딜론 가는 이미 훌륭한 보석들과 명품들을 여럿 수집하셨지 않습니까?”

그는 턱을 윽물었다. 절대 그럴 순 없었다.

그나마 목걸이의 출처가 밝혀지지 않은 데엔 아주 최근 보석이 재세공된 덕분이 컸다.

루블리에가 새로 만든 목걸이의 형태는 아직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카 딜론 가문의 가주는 번호판을 든 시종에게 눈짓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목걸이는 사수해야만 했다.

“그럼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시작의 알림과 동시에 열 개의 번호판이 앞다투어 올라갔다. 사람들은 다이아몬드를 낙찰받기 위해 엄청난 돈을 걸었다.

경매가가 한도 없이 치솟았다. 경매 일을 하면서 어지간한 금액에는 눈 하나 깜짝 않았던 막심마저 이 열기에 혀를 내둘렀다.

목걸이는 근래 진행되었던 모든 공식적, 비공식적 경매를 통틀어 최고가에 낙찰되었다.

누구보다 큰 대가를 치르고 카 딜론 가는 간신히 다이아몬드를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치른 노고와 비용의 불똥은 당연히 루블리에에게 튀었다.

“우리 가문의 다이아몬드가 왜 경매장에서 나와! 네 입으로 설명해라. 이건 네가 어머니에게서 받아간 보석 아니냐?”

루블리에는 본가로 퇴근한 즉시 불벼락을 맞았다. 무슨 일인지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부족했다.

부모님이 던지다시피 민 상자를 열어보고서야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새틴에게 선물한 목걸이가 안에 고이 들어 있었다.

“……새틴이 대답을 한 것 같습니다.”

그녀가 결혼의 증표로 받은 목걸이를 경매장에 내놨다면 의미는 확실했다. 결혼을 이어갈 의지가 사라진 것이다.

끝내 이날이 도래하고야 말았다. 루블리에는 한참 동안 목걸이를 감싸 쥔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 * *

집이 황량했다.

집을 떠난 사람은 루블리에 하나뿐이고 집안일을 돕는 카 딜론 가의 사용인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음에도, 한 사람의 부재가 심연처럼 공허했다.

양 가문의 사용인들 사이에 미묘한 알력이 작용하면서 집안의 생기가 사라졌다.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수레바퀴가 삐걱삐걱 굴러가는 듯했다.

델 마레의 사용인들은 카 딜론의 사용인들이 집에 남아 새틴을 감시하려는 의도가 있지는 않은지 의심했고, 카 딜론의 사용인들은 그저 계속해서 새틴의 시중을 들라는 지시만 받았을 뿐 그 외의 목적은 없다며 의심을 부정했다.

어쨌든 신혼집은 카 딜론 가문이 가지고 있던 저택 하나를 새단장한 집으로 본래 루블리에의 소유였다.

이 집에 머무르며 루블리에를 기다리기로 결심한 이상 함께 지내야 할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저를 감시하려는 의도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새틴은 델 마레 사용인들의 불만을 불식시켰다. 오해를 살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젠 그럴 일도 없었다.

홀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니 절로 지난날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항상 자신한테 지고 들어온 사람은 루블리에였다. 새틴도 알았다.

그는 저한테 고집을 세운 일이 극히 드물었다. 이 결혼이 무사히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터다.

그가 이 결혼 생활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존심을 내려놨는지 문득 절감했다.

그렇게 흘러온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반년이 지났다. 그러니 이제는 자신이 결혼 생활을 지킬 차례였다.

그럼 뭐든 해야지. 잠시 그까짓 자존심을 내려놓는 게 뭐가 어렵다고.

새틴은 몇 번이나 보내려다 보내지 못했던 편지를 다시 꺼냈다.

제발 만나자고 하자, 무조건 미안하다고 하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때가 아니었다.

우선 루블리에의 충격과 실망부터 보듬을 차례였다. 그러고 나면 해명할 기회는 언제고 올 것이다.

한참 편지를 적어 내려갈 무렵이었다.

“마님, 팔라딘께서 편지를 보내셨어요.”

라리가 문을 두드렸다. 도중에 반가운 이름이 들렸다. 새틴은 벌떡 일어났다.

“편지? 이리 줘.”

새틴은 라리에게서 봉투를 낚아챘다. 가문의 인장으로 잘 봉한 편지는 제법 두께가 있었다.

그녀는 페이퍼 나이프를 가져올 겨를도 없이 손으로 씰을 뜯고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도톰하게 말린 편지 뭉치를 펼치자마자 새틴은 아득해졌다.

이혼장이었다.

성격 차이로 인한 결혼 지속 불가. 루블리에의 글씨로 제가 작성했던 이혼장의 내용이 고스란히 옮겨져 있었다.

그는 새틴에게 유책을 물어 위자료를 청구하지 않았다. 칼데브란카를 휩쓴 스캔들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없었다.

한때나마 부부로 지냈던 자신에 대한 마지막 배려일까.

혹은 오로지 빠르게, 깔끔히 갈라서려는 목적일까.

어느 쪽이든 무의미했다. 서류는 가장 끝에 새틴이 인장만 찍으면 되게끔 완벽히 꾸며진 상태였다.

“마님…….”

덩달아 내용물을 보게 된 라리가 희뜩하게 얼어붙었다. 새틴은 제 입으로 내건 약속을 돌이켰다.

‘어떤 방식이든 네 마음이 나아진다면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그의 마음이 나아질 방식이 이것뿐인가 보다.

한동안 떨어져 지내던 사이, 마침내 그가 통보한 결론은 이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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