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라리가 부랴부랴 약을 가지러 뛰어갔다. 하녀를 기다리면서 새틴은 문간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내리감았다.
평소보다 이르게 출근 준비를 마친 루블리에가 복도를 지나가면서 언뜻 침실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라리, 부탁이 있어.”
루블리에가 집을 비운 한낮에 새틴은 라리를 호출했다. 라리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예,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조용히 기요른을 만나고 와. 그냥 내가 보냈다고 하면 알아들을 거야. 내가 아주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렸어. 그걸 받아 와야 되는데 다른 사람은 못 믿겠어서 그래. 이 집 절반은 카 딜론 가 사람이잖아.”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은 똑같았다. 꼴이 우습게 보일지라도 목걸이를 돌려받아야 했다.
평범한 다이아몬드라면 그까짓 거 하나 잃어버린 셈 치고 말겠지만, 그 목걸이는 카 딜론 가문 대대로 내려온 보물이자 결혼의 상징이었다.
쉽게 포기하면 안 될 물건이었다. 더불어 그 목걸이라도 손에 쥐고 있어야 안정이 찾아올 듯싶었다.
“마님, 그러지 마세요.”
하지만 새틴의 부탁을 들은 라리는 대번에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은 위험해요.”
“라리, 너도 날 의심해?”
“물론 저는 마님을 믿어요. 근데 시기가 정말로 좋지 않아서 그래요. 두 분이 다투시고서 카 딜론 가에서 온 사람들 분위기가 나빠졌어요. 저희는 마님을 따르지만 그 사람들은 팔라딘을 따르던 사람들이잖아요. 다들 자기 주인의 편을 드느라 사소한 싸움이 종종 벌어지고 있어요.”
문 너머를 돌아본 새틴이 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제가 마님께 불려가기만 하면 따라와서 엿들으려는 사람도 있을걸요.”
새틴은 허탈해서 웃었다.
카 딜론 가에서 온 사용인들은 새틴에게 그간 잘해왔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으로 믿고 따르는 주인은 루블리에였다.
원주인이 부인에게 기만당했다고 받아들이면 그들의 충성심은 오로지 카 딜론 가문으로만 향할 것이다.
새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서 카 딜론 가와 루블리에에게 시시콜콜 전할 터였다.
욱하고 속이 치받혔다. 그럼에도 새틴은 차마 그들을 나무랄 수 없었다.
정반대의 경우엔 라리와 델 마레의 사용인들도 기꺼이 새틴을 위해 같은 행동을 하리란 것을 알기에. 혹은 루블리에의 지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집안의 사용인들마저 저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럼 오페라 대극장에 가서 혹시 분실물이 들어온 게 있지는 않은지 한번 알아봐 줘.”
크게 기대하기 힘든 가능성이었지만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 장소는 극장뿐이었다.
새틴의 지시를 받고 오페라 대극장에 다녀온 라리는 역시나 습득물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래, 기요른이 챙겨갔겠지.
당연한 결과였으나 허망했다. 이 마음을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새틴은 애써 미련을 추슬렀다. 이 이상의 빌미를 잡히지 않으려면 어쩔 수가 없다. 당분간은 목걸이를 잊어야만 했다.
언젠가 되찾을 기회가 오겠지. 그녀는 작은 위안으로 가슴을 다독였다. 그것만이 지금 제게 주어진 유일한 소망이었다.
* * *
복도를 걸어 들어가면서 루블리에는 제복의 단추를 끌렀다. 가슴이 답답한 까닭이었다. 사용인이 따라오며 새틴의 일거일동을 고해바쳤다.
“마님께선 온종일 집에만 계셨어요. 누굴 만나거나 편지를 쓰시지도 않고요. 라리가 불려가긴 했는데 나올 때 표정을 보니,”
루블리에는 차갑게 말을 끊었다.
“내가 언제 그런 일을 시켰던가?”
지레 찔끔한 사용인이 물러갔다.
귀족이 사는 저택의 구조는 대체로 비슷한 편이다. 손님들이 자주 오가는 응접실이 문과 가장 가깝고, 가족들의 사적인 공간은 안쪽에 위치했다.
응접실을 지나가다가 루블리에는 걸음을 멈췄다.
안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가늘고 새하얀 실루엣의 주인은 이 집에서 단 한 사람뿐이었다. 새틴.
그녀는 무정물처럼 표정을 잃고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가뜩이나 희디흰 얼굴이 핏기를 잃어 인형인 줄로만 알았다.
“루브.”
새틴이 나직이 그를 불렀다.
“오늘은 늦었네.”
그는 그냥 지나치려 했다. 새틴은 그 발걸음을 급히 붙들었다.
“나랑 얘기 좀 해.”
“무슨 이야기? 할 변명이 남았어?”
“……우리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순 없잖아. 나한테 화를 내도 좋고, 델 마레에 보상을 요구해도 괜찮아. 대가는 내가 최대한 치를게. 어떻게 사과해야 네 화가 풀릴지 모르겠지만…… 어떤 방식이든 네 마음이 나아진다면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해명할 기회만 줘.”
일단은 사과를 전해야 했다. 해명은 사과를 받은 사람이 들을 마음이 생겼을 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화를 부채질할 뿐이었다.
“어떤 방식이든?”
루블리에는 큰 보폭으로 응접실을 가로질렀다.
새틴이 얼굴을 들었다. 모든 것을 각오한 듯 눈빛이 잔잔했다.
“너한테 화를 내면 있던 일이 사라지나? 카 딜론 가는 이미 넘치도록 부유한데 보상을 받는다고 해서 딱히 의미가 있나?”
루블리에는 미간을 좁히고 새틴을 내려다보았다.
“난 네가 뭘 원해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지금 원하는 건 단 하나야. 너랑 잘 살아가고 싶어.”
“왜?”
한동안 말이 없던 새틴이 차분하게 고백했다.
“널 사랑해.”
절로 헛웃음이 났다. 그토록 듣고 싶던 말을 들었는데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루블리에는 새틴의 얼굴을 쥐고 제게로 들어 올렸다.
늘어뜨린 긴 은발, 어쩐지 아득하게 느껴지는 녹색의 눈, 혈색을 잃은 뺨, 사랑한다고 고백한 입술.
그 모든 것이 미치도록 미웠고, 그 모든 것이 여전히 아름다웠다.
루블리에는 충동적으로 입을 맞췄다. 기다란 은발이 그의 손안에서 헝클어졌다.
새틴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어떤 방식이든’에 이마저 포함되어 있었던 걸까.
돌연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방향을 상실하고야 말았다.
입술의 체온이 섞일 때 루블리에는 내심 당황했다. 아팠다더니 평소보다 미열이 있었다.
그가 아는 새틴은 항상 도도하고 야무지고 새침한 사람이었는데, 제대로 약을 먹긴 한 건지 내내 환자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는 꼴도 눈에 거슬렸다.
루블리에는 새틴에게서 입술을 뗐다.
“그만 들어가.”
새틴은 눈을 내리떴다. 그늘에 표정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는 꼼짝도 않는 새틴을 내몰았다.
“난 널 보는 게 더 괴로워. 네 얼굴을 보면 자꾸 상상하게 돼.”
차라리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괴롭진 않았을 것이다.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합한 정략혼이었다면 애초에 아무런 기대 없이 살았을 테니.
마음이 생지옥이었다.
“루브. 난 항상 고민하고 있어. 내가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후회할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후회?”
그야말로 우스운 소리였다. 루블리에는 조소했다.
“난 너와 결혼한 걸 후회해.”
새틴이 버티니 그가 비킬 수밖에 없었다. 루블리에는 성큼성큼 응접실을 나갔다.
등 뒤에 덩그러니 남겨진 새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새틴은 루블리에의 통보를 받았다.
“우리는 당분간 떨어져 지내는 편이 좋겠어.”
새틴은 빛이 바랜 얼굴로 루블리에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복받쳐 목이 아파 왔다. 입술을 끝없이 깨물며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참는 사이에도 그가 내린 결론은 이어지고 있었다.
“본가로 들어가면 주변에서 시끄럽게 굴겠지. 내가 카 딜론 가로 들어갈 테니 너는 여기서 지내든지 해. 이 집이 불편하다면 델 마레로 들어가도 상관없고.”
“여기 있을 거야.”
루블리에는 무덤덤하게 응했다.
“그러든가.”
몸만 나가던 여느 출근 날과는 달리 그는 가방 몇 개에 간단한 짐을 챙겨 놓았다. 새틴은 그 가방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인사했다.
“다녀와.”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집에서 순식간에 멀어지는 흑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 *
키리온은 법황에게 또다시 불려갔다. 눈에 안개가 자욱하게 낀 법황이 키리온을 꾸중했다.
“팔라딘은 왜 오지를 않는 것이냐.”
“몇 번 왔었는데 성하께서 잠들어 계셔서 차마 깨울 수가 없다고 그냥 갔습니다.”
“그냥 갔다고?”
법황이 인상을 썼다. 탄력을 잃은 피부가 울룩불룩 주름졌다.
“팔라딘으로서 수행하는 막중한 임무가 많습니다. 가정도 꾸렸으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지요. 루블리에에게는 다시 말해 두겠습니다.”
“내가 잠들어 있더라도 그가 오면 깨워라.”
“네.”
“비탈리스는 일을 잘 배우고 있나? 왜 인사를 오지 않는가.”
“나랏일의 비중이 막대하니 공부에 몰두하느라 마음에 여유가 없나 봅니다. 비탈리스도 부르겠습니다.”
깊게 인사하고 물러서는 키리온에게 법황이 마지막까지 한탄했다.
“정말로 오래 살지 못할 모양이다. 내 기력이 확실히 예전 같지 않아. 나도 모르는 사이 깜빡깜빡 잠이 든다. 오늘이 며칠이냐?”
“아직 닷새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조급히 판단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못 자고 못 먹을 때 허약해지지 않습니까. 성하께서는 아직 스스로 죽도 드시고 잠도 주무시니 괜찮으실 겁니다.”
법황의 침실에는 약의 매운 내가 잔뜩 배어 가시지를 않았다. 문을 닫고 돌아선 키리온은 참고 있던 호흡을 터뜨렸다.
얼마 전 수면제를 지어 올리던 의사의 염려가 잠시 기억의 변두리에 걸렸다.
‘예하, 성하께서는 아직도 잠을 못 주무십니까? 연세가 있으셔서 독한 약을 자꾸 쓰면 존체가 무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눈 뜬 채 괴로운 시간을 보내시기보다는 약의 기운이라도 빌려 편안한 잠을 청하시는 게 나을 것이오.’
닷새.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제 임기응변에 키리온은 실소했다.
수면제에 취해 몽롱해진 법황의 시간 감각을 흐트러뜨리는 정도는 이제 힘든 일도 아니었다.
그는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딜라일라가 와 있었다.
“성하께 다녀오셨나요?”
“다녀왔소. 둘러대는 것도 슬슬 한계요. 계획을 빨리 진척시켜야 하는데 루브가 미적거리기만 하니 답답하군.”
거짓 스캔들을 퍼뜨리고 밀회 장면을 목격하게 하면 금방 갈라설 줄 알았는데 루블리에의 결혼 생활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참다못한 카 딜론 가에서 아들을 불러들여 스캔들에 대해 캐물었어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고 들었다.
키리온이 은근슬쩍 떠보기도 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속은 엉망진창일지라도 겉으로는 내색을 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