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이건…… 그가, 나한테 이럴 줄은 몰라서.”
다시금 벌레가 스멀스멀 피부 위를 기어가는 듯했다. 기요른이 남긴 촉각이 되살아났다.
수치심과 충격이 뒤섞여 새틴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입에 담아야 한다는 그 자체로 미칠 것 같았다.
정신을 추스르지도 못했는데, 지금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저를 겨냥한 ‘진실’이 그의 입에서 칼처럼 쏟아지니 황망했다.
“원래 욕망은 순식간이지. 내가 너에게 그랬듯이. 게다가 너는 네 발로 그의 밀실을 매번 먼저 찾아가지 않았나? 이거 봐, 꼭 보란 듯이 찍어놨군그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도대체 무슨 말로 해명해야 하나.
오늘 하루 지치도록 많은 일을 겪었다. 머리가 멎고 말문도 굳었다. 새틴은 우두커니 루블리에를 올려다보았다.
“넌 나를 남편이라 여기기는 했어?”
마음이 미어졌다. 너무도 아리고 아파서 새틴은 가슴을 눌렀다.
“……나한테 네가 남편이 아니면 누가 남편이야.”
“그래? 그런데 난 왜 너에게 지금까지 조롱당한 기분이 들까. 반년 동안 껍데기뿐인 남편으로 살았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네 마음은 기요른한테 돌아가게 되어 있었던 거지. 네가 이혼에 집착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
“아냐!”
뻗어가는 의심이 하염없어 아찔했다. 그는 제게 손 하나 대지 않고 있는데, 기이하게도 목이 꽉 졸려오는 듯했다.
“루브, 기억 안 나? 기요른과 파혼하겠다고 선언했던 사람이 바로 나야. 그런데 어째서 나와 기요른을 의심하는 거야?”
“너는 기요른의 약혼녀로서 21년을 보냈으니까.”
루블리에가 짓씹듯 내뱉었다.
21년. 새틴의 인생 대부분이 기요른에게 있었다.
그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따라잡지 못할 기간이었다. 교감한 세월의 깊이가 다를 것이다.
지위, 재능, 노력, 사랑. 기요른에 비해 무엇도 부족하지 않다 자신했으나 단 하나, 새틴과 쌓아온 시간만큼은 턱없이 미약했다.
새틴은 손을 들어 루블리에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루블리에는 냉정하게 그녀의 손을 떨어냈다. 감정의 감각이 사라졌다.
그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우리 둘 중 늘 아쉬운 사람은 나였지.”
새틴은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짙푸른 밤을 투과해 쏟아지는 눈빛이, 그의 언어가 쓰디썼다.
“루브. 넌 나에게 확신이 없구나.”
“그럴 수밖에. 너는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그야 그동안 결혼에는 사랑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 왔으니까.
사랑처럼 위험하고 불확실한 감정보다는 굳건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중요하다고 새기며 살았다.
가문에서 그렇게 가르쳤기에, 첫 약혼자이자 평생의 동반자라 믿어 마지않던 기요른이 그저 우정을 기반으로 한 친구였기에, 사랑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하여 표현에 박하게 굴었던 제 태도가 마침내 오늘을 불러일으키고야 말았다.
사랑을 잘 몰랐다. 사랑이 뭘까. 의문스럽기도 했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루블리에는 어떤 심정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걸까, 궁금했었다.
“여태껏 마치 허공에 대고 외쳐온 것만 같은 기분이야. 너는 메아리조차 돌려주지 않는데 말이지. 내가 무슨 짓을 해 왔나 싶군. 참으로 허무해.”
“나는…… 너랑 평생을 믿고 의지하면서 잘 살고 싶었어. 기요른 말고 너와 잘 살고 싶어졌어. 그래서…….”
같이 살고 싶었다.
새틴은 입을 틀어막았다.
태어나 보니 이미 정략혼을 맺은 채로 살았다. 결혼의 낭만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신뢰로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그에게 사랑이 중요했듯 저에게는 신뢰가 중요했다.
그의 사랑이 새틴에게는 곧 신뢰였다. 같은 가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같은 의미였다. 지금 헤아리니 제 마음이 그러했다.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는데 미처 몰랐다.
숨이 베인 듯이 욱신거렸다. 루블리에와는 처음인 경험이 많았다. 누구로 인해 이만큼 아파보기도 처음이었다.
프리마 돈나를 정부로 들였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파혼하겠다고 미련 없이 돌아섰던 제가, 살면서 누군가를 아쉬워해 본 적 없는 제가, 부정을 의심해 극장까지 따라왔던 루블리에 앞에선 차마 돌아설 수가 없었다. 애원하며 매달리고 있었다.
이게 사랑이었구나.
시야가 후드득 흐려졌다. 새틴은 에이는 울음을 삼켰다.
미안해. 늦게 알아차렸어. 난 나도 모르게 널 사랑하고 있었구나. 사랑하고 있었는데…….
“……루브. 내가 널 사랑한다고 말하면 믿을래? 지금이라도 널 사랑한다고, 정말로 네가 짐작하는 그런 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신중하게 행동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면…… 내 말 좀 들어줄래?”
“아니.”
냉랭한 대답이 선을 그었다.
“새틴, 눈물로 호소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울음조차도 수단으로 쓰고 있냐고 다그치는 듯했다. 새틴은 광막한 밤을 망연히 응시했다. 아름다웠고, 쓸쓸했고, 적막했으며 잔혹했다.
꼭 루블리에를 닮았다. 지금의 루블리에를.
“지치는군. 그만하지.”
루블리에가 돌아섰다. 새틴은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만.”
그가 제 결백을 믿어주지 않을지라도 이 이야기는 반드시 전달해야 했다.
“루브, 이것만 알아줘. 신탁이 위조되었다는 증언을 하고 실종된 사제가 있어. 정말이야.”
루블리에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사랑하는 부인의 배신을 목격하고 지옥의 입구에 떨어진 그에게 부인의 이야기 따위가 제대로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또 그 얘기야? 증거는 있어?”
“……없어.”
심지어 증거도 없었다.
막막했다. 베르비움은 고향에 일이 있어 떠났다고 말했다. 어찌어찌 수소문해 그의 시신을 찾아내긴 했으나 사제는 시신 안치소의 아궁이 속 한 줌 재로 변했을 터였다.
새틴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한심한 눈으로 새틴을 일별한 루블리에가 저벅저벅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인생 중 이토록 초라한 날이 또 있을까.
“마님…….”
사용인들은 부부의 불화를 누구보다도 빨리 눈치채는 존재였다. 기죽은 라리가 새틴에게 따라붙었다.
“우선은 목욕하고 쉬세요. 아까의 문제는 내일 다시 말씀해 보시고요. 팔라딘께서는 마님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분이시잖아요. 울컥해서 뱉은 말씀도 많으실 테고요. 시간이 흐르면 아마 누그러지실 거예요.”
손을 잡아끄는 라리를 따라 새틴은 비틀비틀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추위와 눈물에 젖어 차마 보기 민망할 수준이었다.
“따뜻한 물로 손부터 녹이세요. 어휴, 밖이 추워서 손이 꽁꽁 얼어붙으셨네요.”
“라리. 진짜로 나는 내 마음에 부끄러울 짓을 하지 않았어. 기요른은, 기요른은 다른 의도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제 억울함을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다. 라리가 다독다독 위로했다.
“그럼요. 저는 알아요. 세상 사람들은 다 몰라도 저는 알지요. 제가 모시면서 봐온 마님은 한 번 아니라 하면 끝까지 아닌 분이신걸요.”
“……응. 나 혼자 좀 있을게.”
“네, 저 나가 있을게요. 목욕 다 마치시면 부르세요.”
라리를 내보내고서 새틴은 따뜻한 물에 손을 담갔다. 움큼 퍼 올린 물에 눈물 자국 가득한 얼굴을 묻으려는 순간 허전한 목이 번뜩 스쳤다.
그녀는 파리하게 질려 손끝으로 더듬더듬 목덜미를 매만졌다.
목걸이가 없었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명약관화했다. 몸싸움을 벌이다 기요른의 손에 들어갔겠지. 그리고 기요른에게는 절대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감시하는 눈이 많으니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 엄포를 놓고 왔다. 목걸이를 되찾을 길이 요원했다. 새틴은 저 자신을 후려치고 싶어졌다.
침실의 문을 열기까지는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했다. 새틴은 문고리를 잡고 오랫동안 서 있다가 숨을 크게 들이키곤 문을 밀었다.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고 같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그렇게 살면서 좀 더 부부로서의 관계가 깊어졌다고 생각했다.
물론 루블리에의 화가 가라앉기에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대화를 하려면 같은 방에서 얼굴을 봐야 하지 않을까.
하나 문을 열자마자 새틴은 미간을 찌푸린 루블리에와 맞닥뜨렸다. 루블리에의 눈길이 목덜미에 꽂혀 있었다.
새틴은 당황해 손으로 목덜미를 감쌌다. 감촉을 씻어내고 싶어 벅벅 문질러 닦았더니 피부 아래 맺힌 울혈이 더 불그스름하게 도드라졌다.
“집이라고 해도 보는 눈은 많지. 이 집에 고용된 사용인들이라고 해서 다 네 허물을 가려줄 거라 기대하는 거야? 절반은 카 딜론 가 사람들이야. 좀 조심하는 게 어때? 다 들통났다고 이젠 조심할 마음도 사라진 건가?”
당연히 조심하고 싶었다. 그래서 잠옷의 옷깃을 부자연스럽게 세워 목을 가려보았다.
그래도 움직일 때마다 옷깃이 흘러내려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아예 외출용 숄을 목에 칭칭 두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루블리에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고 새틴을 스쳐 밖으로 나갔다.
새틴은 다급히 그를 제지했다.
“……내가.”
나갈게.
원래 이 침실은 루블리에가 쓰던 침실이었다. 그러니 제가 나가는 편이 옳을 것이다.
말을 채 맺기도 전에 방문이 쾅 닫혔다. 나간 건 루블리에인데, 도리어 새틴이 방에 갇힌 꼴이 되었다.
주름 하나 잡히지 않은 침대를 보니 몸이 떨렸다. 편하게 누울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서 새틴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밤새 으슬으슬한 추위에 시달렸다. 은근하게 배도 욱신거렸다. 접질린 발목 또한 말썽이었다.
여기저기 아프다고 아우성을 치는 몸 때문에 식은땀으로 이마가 축축하게 젖었다.
“스트레스 탓인가……?”
새틴은 힘없이 책상에 엎드려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처지가 처지인 만큼 아프다고 티 내기도 죄스럽고, 밖에는 루블리에가 있으니 출근할 때까지만 참자 했으나 새벽은 지나치게 길었다.
견디다 못한 새틴은 종을 울려 라리를 불렀다. 간밤의 냉전을 눈치채고서 양쪽으로 눈치만 보고 있던 라리가 급히 달려왔다. 새틴은 문간을 짚고 속삭였다.
“라리, 나 감기 기운이 있나 봐. 진통제 좀 줘.”
“마님?”
라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굴이 해쓱해요. 의사를 불러야겠어요.”
“괜찮아. 그냥 약만 먹으면 돼. 별거 아닌 걸로 집 시끄럽게 하지 마.”
“마음 힘드셔서 계절을 타시나……. 마님 월경이 가까워 오는 건 아니시고요? 항상 그쯤에 아프다 하시잖아요. 그럼 약 데워서 가져다드릴 테니 마시고 푹 주무세요. 잠시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