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12)

<76화>

그게 무슨 이야기냐고 그는 되묻지 않았다. 새틴은 숨을 짧게 끊어 들이켰다.

“너 알았구나. 그런데 나한테는 말을 안 했네?”

“……나도 늦게 듣긴 했어. 그 소식이 정말 순식간에 번져서 너한텐 미처 전달할 시간이,”

변명을 들을 시간조차 아까웠다. 더듬더듬 이어지는 기요른의 말허리를 새틴은 싹둑 잘라 끊었다.

“됐고, 나는 너와 내 오해가 풀리지 않으면 부모님께 이 일을 말씀드릴 생각이야. 내가 왜 너를 만나야만 했는지, 우리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알려야 해.”

“신탁을? 새틴, 부모님이 우리 얘길 믿으실 거라 생각해?”

문득 속이 답답해졌다. 물론 부모님은 새틴의 말뿐인 증언을 믿지 않으려 할 터였다.

신탁의 부정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키리온과 대적한다는 의미이기에.

기요른이 다급히 새틴을 설득하려 들었다.

“믿지 않으실 거야. 새틴, 우리가 이렇게 멀어지면 안 돼. 비밀을 유일하게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 너와 나뿐이야. 스캔들은 아마 우리를 갈라놓으려고…….”

“그래. 갈라놓으려고 하면 갈라져야지. 내가 말했잖아? 너보다 내가 잃을 게 많다고. ……루블리에도 그 소문을 들었을지 몰라. 난 내 결혼 생활을 지켜야 돼.”

“그럼 신탁은?”

“각자 조사해.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대신 연락은 하지 마. 방법을 찾아서 가족들을 납득시키는 게 우선이야. 우리 집을 설득하고, 너희 집을 설득하면 언젠가 부모님과 더불어 양가가 교류하는 날도 오겠지.”

실현 가능성이 낮은 아득한 미래였다. 희망을 말하고 있어도 기실은 당장 그를 내치겠다는 의미였다. 기요른이 머리를 거세게 내저었다.

“그게 언젠데? 왜 우리가 연락을 그만둬야 해?”

“아직도 모르겠어? 너와 나 둘 중 하나가 뒤를 밟히고 있어. 어쩌면 우리 둘 다일 수도 있고. 더는 만나면 안 돼.”

그의 하소연에도 새틴은 강경했다.

“새틴, 나 너무 무서워. 날 혼자 두지 마. 그 사제의 얼굴이 밤마다 떠올라. 넌 안 봤잖아, 난 봤단 말이야. 지금 내 편은 너밖에 없어…….”

“뭐라는 거야? 난 너를 내 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 우린 그냥 같은 목적을 갖고 잠깐 협동했을 뿐이야. 그런데 딱히 효율이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같이 위험에 빠지게 생겼으니 여기서 끝내는 게 맞아.”

“싫어, 이렇게 끝내는 게 어디 있어?”

돌아나가려던 새틴의 앞을 가로막으며 기요른이 성큼 걸어왔다. 새틴은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기요른. 너 신탁이 목적이긴 했니? 아니면 이마저도 나를 만나려는 구실이었어?”

“새틴, 나는 그냥…… 네가 필요해.”

소름이 확 돋아났다. 새틴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간신히 이성으로 억누르며 그녀는 낮게 화를 내뱉었다. 가뜩이나 여러 차례 꼬리를 밟힌 마당에 더 이상의 빌미를 남길 순 없었다.

“비켜!”

“이러지 마, 새틴. 내가 너를 먼저 알았어. 루브는 열두 살에 아카데미에 들어와서야 너를 알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훨씬 오래전에, 기억도 안 나던 시기에 너와 있었어. 새틴, 우리 결혼할 사이였잖아……. 날 버리지 마.”

밀실의 벽이 도망치는 등을 막아 세웠다. 새틴은 달아날 장소를 잃어버렸다.

기요른이 억지로 입을 맞춰왔다. 비쩍 마르고 얄팍해진 몸이라 방심했으나 남자는 남자였다. 애당초 타고난 힘의 차이를 극복할 방도가 없었다.

입술로 시작된 키스가 목덜미로 내려왔다. 새틴은 몸부림을 쳤다. 발로 걷어차고 손으로 할퀴었다. 그래도 기요른은 새틴에게 달라붙어 한참을 머물렀다.

일분일초가 영원이었다. 끝나지 않는 지옥이었다. 간신히 그를 뿌리쳤을 때도 제힘으로 밀쳐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새틴이 기를 쓰고 발악하니 적당히 물러나 준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욱 끔찍했고 비참했다. 더럽고 역겨워 토하고 싶었다.

새틴은 입술을 손등으로 벅벅 문질러 닦았다.

“……개자식. 신탁이고 뭐고 너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지 마. 너 나타나면.”

호흡이 부족해 숨을 몰아쉬었다. 분노로 눈앞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델 마레의 이름을 걸고 가만 안 둘 거야.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알았어?”

“새틴!”

높은 구두를 신고 헛걸음을 딛는 바람에 발목이 알싸하게 시큰거렸다. 그래도 일단 이 박스석에서 달아나는 일이 중요했다. 아픔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새틴은 정신없이 뛰어나갔다.

중간의 박스석 문 하나가 열려 있었으나 이를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새틴은 그저 달아나고 또 달아났다. 기요른이 쫓아오지 못하게, 그리하여 안전하다 느껴질 때까지.

“……역시.”

그런 거였나.

끝맺지 못한 혼잣말이 목에 걸렸다.

루블리에는 제 목소리에 실린 감정이 무엇인지 헤아려보려 노력했지만, 답은 멀었다.

새틴은 그가 보는 앞에서 방금 복도를 황급히 가로질러 사라졌다. 한 손으로 흘러내린 숄을 추스르긴 했으나, 흐트러진 옷매무새는 범상치 않았다.

무엇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루블리에는 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제야 얼마 전 새틴이 왜 그런 기이한 질문을 던졌는지 이해가 됐다.

‘루브. 네 주변 사람 중 하나가 엄청나게 큰 비밀을 가지고 있다거나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다면 어떡할래?’

‘얼마나 큰 잘못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어떤 잘못인데?’

‘인륜을 거슬렀다 할 정도의 일?’

인륜을 거슬렀다 할 정도의 일. 바로 그녀 자신의 이야기였다.

‘우리 당분간 침실 따로 쓸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저를 피하려 하는 새틴을 그저 붙잡았다. 그래도 눈멀고 귀먹었던 그때가 차라리 나았다.

알려고 하지 말 것을 그랬나. 거짓된 행복 속에서라도 살 수 있도록.

지배인에게 혹시 새틴과 기요른이 같은 날 또 극장을 찾아오면 사람을 보내 달라는 부탁을 남긴 사람이 바로 저 자신이었다.

어리석고 치졸한 마음이 만든 헛된 선택이었다.

끝까지 묻을 용기도 없었고, 끝까지 들추어낼 용기도 없었으면서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여기까지 온 것도 자신의 결정이었다. 원망하자면 스스로를 원망해야 했다.

가슴이 황량하게 식어 내렸다. 루블리에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기요른도 망연자실해서 주저앉아 있었다.

새틴이 저를 안 보겠다고 하니 일순 제정신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같이 비밀을 공유하고 파헤치던 여자가, 그의 옛 약혼녀가 저를 버리려 하기에 무작정 잡아야겠다는 충동만 남아 그를 지배했다.

그녀가 할퀴고 간 자국이 홧홧하게 아파 왔다. 한번 의식하니 통증이 점점 뚜렷해졌다. 기요른은 손바닥으로 상처 부근을 훔쳤다. 발갛게 핏물이 스며 나왔다.

정말 끝인 거겠지.

이렇게 끝난 거겠지.

허탈했다. 한참을 넋을 놓고 있던 기요른은 축 늘어뜨린 다른 손에 얹힌 낯선 무게를 깨닫곤 시선을 돌렸다.

새틴이 매일 하고 다니는 목걸이였다.

‘결혼 예물이야.’

아마도 한창 몸싸움을 하던 도중에 끊어진 모양이었다. 그는 제가 목걸이를 쥐고 있는지도 이제야 알았다.

돌연 울음이 터져 나왔다.

결혼 예물로 받은 목걸이를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 여자. 좋고 싫음이 확실한 여자가 하는 행동에는 언제나 그에 걸맞은 이유가 따르는 법인데, 가끔은 아주 당연한 진실이 뒤늦게야 눈에 보인다.

기요른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손안에 남은 목걸이가 급격히 온기를 잃고 있었다.

* * *

가슴을 가라앉히고 이성을 찾느라 밖에서 머무른 시간이 제법 되었다. 새틴은 기운 없이 마차에서 내리다 흠칫 놀랐다. 커다란 그림자가 발치를 덮어온 까닭이었다.

“루브?”

“새틴, 어디 갔다가 왔어?”

나직한 음성에는 고조가 없었다.

“나 사람들 좀 만나서 오랜만에…….”

대충 둘러대려다 새틴은 그만두었다. 넌지시 전해지는 예감이 있었다. 그는 다 아는 눈치였다. 알고 묻는 것이다.

“사람들이라.”

루블리에는 새틴이 아무렇게나 목에 두른 숄을 걷었다. 검붉은 입술 자국이 찍혀 있었다.

“새틴, 거짓말을 하려면 흔적을 남기지 않는 성의 정도는 보여야지. 안 그래?”

“……루브, 이건.”

“전 약혼자와 사이가 좋은 줄 미처 몰랐군. 아니면 내가 그동안 뭘 좀 착각했나?”

기요른과의 만남을 그가 알고 있었다는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밀실에서 벌어진 일까지 눈치챘다는 점은 새틴에게도 크나큰 충격이었다.

새틴은 어깨를 움츠리고 숄을 움켜쥐었다.

“오페라 대극장에 왔었어?”

“그게 중요한가?”

“……나 누가 널 보냈는지 알아.”

오페라 대극장마저 함정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게 아니었다.

알면서도 일부러 입을 다문 것이다. 함정으로 걸어들어오기를 바라서. 일부러 한 방향을 틔워놓고 토끼몰이를 하듯이.

“키리온 예하께서 널 극장으로 보냈지? 루브, 내 얘기 좀 들어봐. 신탁에 문제가 있어. 그래서,”

서둘러 설명을 하려는 새틴을 루블리에가 차갑게 가로막았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새틴. 키리온은 너와 기요른에 대해선 한마디도 한 적이 없어. 너희 둘에 대한 스캔들이라면 온 세상 사람들이 신나게 떠들고 있더군. 그리고 오늘은 내가 스스로 알아서 간 거야. 너희가 같은 날 또 대극장에 방문했다기에 설마 했지.”

이 또한 충격이었다.

새틴은 맥없이 중얼거렸다.

“……이미 우릴 의심해서 증거를 잡으러 왔구나.”

“너희 둘이 각자 좌석에서 조용히 공연을 보고 돌아갔다면, 나는 내 앞에서 스캔들 따위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을 처벌했을 거다.”

그러나 그는 밀회를 거듭하는 부인과 옛 친구를 보았다. 애정 행각을 벌이고 돌아온 부인의 어수선한 옷차림새도 보았다.

“네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겠어. 근데 세상의 어떤 비밀은 교묘하게 포장된 진실로 눈을 가리기도 해. 루브, 단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나를 믿어주면 안 될까? 당장은 어렵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오해를 풀 수 있어.”

제 마음을 훤히 열어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는데, 사람의 마음은 언어 외에는 증명할 길이 없다.

박스석 안에서 기요른이 새틴을 힘으로 강제했던 일은 오로지 당사자 둘만 알았다.

한심하게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당장은 믿어달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경험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루블리에는 냉담했다.

“내가 아는 진실은, 네가 기요른과 극장의 밀실에서 두 번이나 만남을 가졌다는 거야. 그게 전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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